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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43화 (43/119)

043화

* * *

“그러면, 그녀가 자기 힘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필립이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프리비아는 미간을 좁히며 투덜댔다.

“내가 그런 것까지 네놈에게 알려줄 이유가 있느냐? 참으로 건방지기 그지없구나. 네놈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놈이 월광검의 계승자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내 호의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호된 꾸중이었으나 필립은 순간 머릿속에도 프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느끼곤 흠칫 놀랐다.

―그건 네게 달린 게 아니다. 저 멍청한 요정 계집이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 저년의 운명과 영혼은 이미 네게 종속되었으며, 네게 복종하고 충성하지 않으면 영원히 무력한 채로 남을 것이다.

뭘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었다. 프리비아는 곧 히죽거리며 요정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힘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써먹으면 된다. 저 계집의 몸뚱이는 그 자체로도 아주 훌륭한 재료나 다름없다. 피를 정제하면 엘릭서와 맞먹는 효능의 포션을 만들 수 있고, 살점과 내 이빨을 이용하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 수 있겠지. 심장, 눈, 머리카락, 손톱. 하다못해 배설물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느니라. 만일 저년을 내게 준다면 네놈이 섭섭하지 않게 몫을 챙겨 주마.”

필립은 그녀의 그 끔찍한 제안이 반쯤은 진심이라고 느꼈다.

“…주, 중재자인 드래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요정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프리비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만큼 오래 산 요정은 드래곤이라는 종족과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건 네년이 그 호수에 얌전히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지. 욕심 때문에 의무를 포기했으니 너는 나와 말을 섞을 자격이 없느니라.”

만티코어를 한 방에 갈아버린 요정 또한 그녀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건방진 요정 계집이 널 귀찮게 한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거라. 나는 저년이 네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구나. 오히려 널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저 드래곤 누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스윗하지?’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프리비아가 저렇게 친절한 태도를 보일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이만 가보거라. 길 잃은 요정을 보니 입맛이 돌아 참지 못하겠으니.”

곧 축객령이 내려졌고,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요정 유나를 데리고 교직원 기숙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프리비아는 곧바로 자신의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하핫! 꺄하하하핫!”

그녀는 생에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다.

체통마저 내려놓은 그녀는 침대를 주먹으로 콩콩 내리치며 배가 찢어질 것처럼 한참을 웃더니, 곧 눈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오래 살다 보니 별…… 푸흡….”

방금 그녀와 마주한 소녀처럼 한 지역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정은 인간 사회에선 토지신처럼 숭배받는 존재였다.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에는 요정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들을 제치고 왕이 되는 경우가 꽤 있었을 정도.

천 년을 넘게 산 저 호수의 요정 또한 과거에는 그런 대접을 받았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 인간의 권속이 되어 애완견처럼 눈치를 봐야 할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 * *

필립은 일단 요정 유나를 별장으로 데려왔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 가련한 요정은 고양이를 마주한 어린 새처럼 오들오들 떨며 필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본래 계획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선 필립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필립의 눈빛에서 귀찮음을 읽은 요정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당신은 제게 이름을 준 사람이잖아요….”

그녀는 자신의 목숨줄이 필립에게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사실상 현재로서는 자기 몸조차 지킬 능력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필립에게 붙어 있어야만 했다.

“딱히 버리거나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입니다. 일단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시죠.”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불쌍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기에 필립은 그녀를 위해 목욕탕에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놓을 것을 지시했다.

아무래도 호수의 요정 출신이니 물이 많은 곳이 편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필립은 루아와 함께한 검술 수련을 마치고 땀에 젖은 채 목욕탕을 찾았다. 넓은 저택이나 다름없는 별장이라 목욕탕 또한 제법 넓었다.

조금 무리하면 아홉 명 정도는 함께 쓸 수 있을 정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었으니까.

수건으로 하체를 가린 필립은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허벅지까지 찬 뜨거운 물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요정을 발견했다.

“…거기서 뭘 하는 겁니까?”

요정 유나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이 부력에 의해 떠올라 마치 뜯겨 나간 해초처럼 탕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냥…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있으면 제가 목욕을 할 수 없잖습니까.”

“부디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요정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호수 출신이라 물속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듯했다.

필립은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탕에 몸을 담갔다.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고, 열기와 함께 뭔가 다른 것도 몸에 스며들었다.

‘…어?’

혈관과 힘줄을 타고 흐르는 이 감각은 분명히 마력을 움직일 때의 그것이었다. 깜짝 놀란 필립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건, 마력보다도 조금 더 근본적인….’

마력보다도 훨씬 근원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마법사와 학자들이 ‘마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던 현상이었기에 필립은 요정이 이 탕 안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영약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군.’

그는 그제야 프리비아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살짝 우려낸 것만으로도 물에 이토록 농밀한 마나를 녹여낼 수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요정의 몸에서 나왔을 마나는 오러로 변환되어 필립의 몸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 양이 제법 되었기에 필립은 감탄하며 입을 쩍 벌렸다.

비록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흡수는 멈췄지만, 이런 식으로 몇 년만 지나면 필립이 평생 쌓은 오러의 두 배가 넘을 것 같았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나 나약한 채로 남지는 않겠죠.”

갑자기 요정이 예뻐 보였기 때문에 필립은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럴까요?”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나중에 제가 드래곤님께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침울해하지는 마시고, 심심하거든 루아와 시간을 보내시죠. 착하고 밝은 아이이니 아마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줄 겁니다.”

요정이 물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 물귀신 같은 모습에 필립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태연함을 되찾았다.

‘수영장을 만들어야겠군. 유연성과 근지구력, 심폐지구력을 기르기에 수영만큼 좋은 게 없지. 거기에 마력까지 쌓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사조나 다름없어.’

유나 또한 이 좁아터진 목욕탕 욕조보다는 그나마 더 넓은 물이 나을 터였다.

필립은 요정을 대충 달랜 뒤 곧바로 리즈리엘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하녀를 통해 편지를 전달받은 지 삼십 분 만에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달려왔다.

그녀를 응접실로 데려온 필립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뭐라고요? 수영장이요? 그게 뭔데요?”

필립의 용건을 들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수영을 하고 싶으면 호수나 강, 혹은 바다로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시설을 하나 건축하겠다는 건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필립은 소매를 걷어 팔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리즈리엘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한번 만져봐.”

“당신….”

리즈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녀는 갑자기 필립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실례할게요….”

그녀는 마치 비싼 조각상을 만지는 것처럼 필립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왜 나보다 피부가 좋지?’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남자의 살갗에서 느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부드러움과 탄력이 공존하는 감각.

리즈리엘은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고개를 내미는 걸 느꼈다.

“리즈, 내가 요정을 한 명 주웠거든? 여기서 멀지 않은 호수에 살던 요정인데, 그녀가 몸을 담갔던 물에서 목욕했더니 피부가 이렇게 되더라고. 수영장을 짓게 되면 너도 쓰게 해 줄게.”

“내일 아침에 기술자를 보낼게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물길을 트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몇 주 안에 해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이 근방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을 보낼 예정이거든요.”

리즈리엘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다. 필립은 그 마음을 이해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체 요정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원래 평생 한 번을 마주치기도 힘들 텐데.”

“말하자면 좀 길지. 아, 그리고, 황금 인장은 언제쯤 공개할 생각이야? 나도 할 일이 좀 많아서, 네 계획에 맞추려면 좀 미리 말해 줘야 할 것 같은데.”

필립의 말에 리즈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깐 고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다음 달에 드워프와의 거래가 잡혀 있어요. 거기서 저는 언니와 부딪치게 되겠죠. 아버지께서 파견한 참관인을 사이에 놓고 경쟁하게 될 것 같아요.”

그녀는 곧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라면 분명 함정을 파 놨을 거예요. 제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종류의 함정을요. 하지만 제게 상황을 뒤집을 묘수가 있으니, 그 함정은 언니의 무덤이 될 거예요. 절 도와주실 건가요?”

필립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미 말했을 텐데. 나는 네가 유세프 상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아,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어떠세요?”

“좋지. 루아도 데려가도 되나?”

필립의 말엘 리즈리엘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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