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 * *
필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제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루아가 어떤 존재인가.
검성의 후계자이자 언젠가는 마족과의 전쟁에서 영웅이 되어 인류를 승리로 이끌게 될 소녀.
지금이야 검을 막 손에 쥔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빛날 운명을 지녔다는 걸 필립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루아마저 아직 자격이 안 되는 일을 필립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제가 비록 천 년 이상을 산 요정이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이름을 짓지 못할 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에요.”
요정의 대답에 필립은 뭐라고 덧붙이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니까…뭐, 됐습니다. 일단 해 보죠. 대신 제가 실패해도 탓하지 마십시오.”
“약속할게요.”
요정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의심 섞인 눈으로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큼.”
딱히 대단한 의식 같은 게 필요한 건 아니었다. 게임 속 루아도 별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요정이 속한 장소에서 그녀의 이름을 정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과정이 쉽다고 해서 시작이 쉬운 건 아니었다.
설정에 따르면 이렇게 언령과 관계된 위업을 해내기 위해선 ‘업’이라는 걸 쌓아야 하는데, 이 ‘업’이라는 개념을 필립은 어느 종교의 ‘카르마’와 비슷한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말하는 ‘업’이란 비단 과거의 그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잘은 모르겠으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한데 묶여 계산하는 것 같았다.
‘대사가 뭐였더라….’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본 필립이 곧 입을 열었다.
“내게 주어진 자격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의 이름은 ‘유나’입니다. 동의하십니까?”
필립의 말이 끝나자 요정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희열이 가득한 눈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을 갖기 위해 찾아올 인연을 수백, 수천 년 동안 기다리는 요정들이 온 세상에 널려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아주 천천히 미쳐가곤 했다.
오직 선택받은 요정만이 이름을 부여받고 더 높은 존재로 도약할 가능성을 거머쥘 수 있었다.
“동의해요.”
요정의 동의가 이어지자 곧 찬란한 빛이 그녀의 하얀 나신을 휘감았다.
“…아, 아아!”
쾌락에 가까운 해방감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환희로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듣던 필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민망한 소리를 내는군.’
빛무리는 곧 요정의 몸으로 남김없이 흡수되었고, 그녀는 상쾌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제게 이런 순간이 오는군요. 당신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어느 정도 직감했어요. 당신이라면 내게 이름을 줄 수 있겠다고. 사실을 말하자면, 저 어린 여자아이 또한 제게 이름을 줄 수 있었죠. 단지 제가 원한 게 당신이었을 뿐.”
필립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는 이제 저보다 격이 낮은 모든 요정의 지배자가 된 거예요. 놀랍지 않나요? 당신이 내게 준 고작 두 글자의 이름이 제가 겪은 천삼백 년의 세월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녔다는 게 말이에요.”
그녀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필립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왜 그러죠? 제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에요. 당신은 살아있는 동안 언제든 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속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본래의 목적이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만.”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요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은 곤란한 듯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겁니까?”
그제야 요정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뭔가 세상이 조금 낮아진 기분이었다.
“…어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팔다리가 훨씬 가늘어졌고, 가슴팍에 만져져야 할 게 말도 안 되는 크기로 줄어들었다.
“내 몸이… 왜 이러죠?”
‘이게 뭐래냐.’
필립은 눈앞의 요정을 바라보았다. 이십 대로 보이던 예전의 모습은 간데없었고, 루아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모습의 작은 소녀가 된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모르는 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묻고 있잖아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구요.”
요정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녀는 필립을 노려보며 물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저야 모르죠. 그리고, 실패해도 탓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말도 안 돼.”
호수의 요정은 손을 뻗어 호수와 교감하려 했다. 그녀의 본질은 호수의 물안개로부터 비롯되었고, 호수의 모든 물은 그녀의 몸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원한다면 저 넓은 호수의 모든 물을 다룰 수도 있었다. 단지 그런 후에는 힘을 대부분 잃을 터였지만.
“이게…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나 호수는 응답하지 않았다. 갖은 애를 써 봤지만 한 컵의 물조차 옮길 수 없었다. 물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출 수도 없었고, 수생식물들을 다룰 수도 없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그녀가 갓 태어난 요정이었을 무렵에나 느껴 본 무력감과,
어미의 배에서 막 나온 새끼 짐승이 처음 공기와 닿으며 느낄 법한 공포가 순식간에 그녀를 지배했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
요정은 거의 발광하듯 소리쳤다.
필립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아나?’
* * *
쟈니스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아카데미로 급히 돌아가야만 했다.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출발할 때는 여섯 명이었던 일행이 돌아갈 때는 여덟 명으로 늘었다.
물론 한 명은 기절한 채로 자루에 담겨 짐칸에 탑승해야만 했기에 아이들은 한 명의 신규 인원만 확인할 수 있었다.
스테판과 셰릴은 갑자기 합류한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애는 누군가요?”
“…글쎄, 미아라고나 할까. 사정이 있어서 아카데미에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필립은 조국과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병사처럼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요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요정은 필립에게 이름을 받은 그 순간 호수와 교감하며 동화하는 힘을 잃고 거의 인간과 다름없게 되었다.
필립은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드래곤이 있고, 드래곤이라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호수의 요정, 이젠 유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필립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티코어는 교관님과 교수님이 토벌하신 거예요?”
셰릴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중에 쟈니스가 일어나면 물어보렴.”
펠리시아가 그렇게 셰릴의 입을 다물게 한 뒤 필립을 노려보았다.
‘저번에는 뱀파이어더니, 이번에는 만티코어야? 어떻게 된 애가 가는 곳마다 저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어.’
그녀는 열아홉 살에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교관이 되었으며, 올해로 5년째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 5년 동안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라곤 필립이 일으킨 선배 폭행 사건이었다.
그런데 필립이 교관이 된 이후로 10년에 한 번 일어날 사건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상황.
그것만이 아니었다. 루아를 포함해 벌써 여자아이를 두 명이나 주워오지 않았는가. 루아는 그렇다 치고 다른 한 명은 천 년을 넘게 산 호수의 요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말 걸지 마세요.”
서로 존대하는 20대 청년과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를 보며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둘 사이에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곤 끼어들지는 않았다.
‘수석교수님께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펠리시아는 두통이 엄습하는 걸 느끼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 * *
필립은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요정을 데리고 프리실라를 찾았다.
주말이었으나 다행히도 친구가 없었던 프리실라는 외출하지 않았고, 교직원 기숙사에서 뒹굴고 있던 그녀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어머! 필립. 갑자기 무슨……요정을 데리고 오다니? 네놈, 무슨 짓을 한 게냐?”
프리실라는 필립의 손을 붙들고 온 물빛 머리칼의 소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프리실라에서 프리비아로 바뀐 것이었다.
“…사실 프리실라는 프리비아 님의 다른 인격이 아닙니까? 이젠 아예 말을 하다가도 확 바뀌는 것 같습니다?”
필립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던졌으나, 의외로 프리비아의 반응은 신선했다.
“다 아는 척 굴지 마라. 혼나기 싫으면. 그보다 네년은 나도 아는 얼굴이구나, ‘신기루 호수’에 살고 있던 그 건방진 요정이 아니냐? 무슨 연유로 인간 손에 붙들려 날 찾아온 게냐?”
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그녀의 모습에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게…….”
필립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프리비아는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꺄하하핫! 머저리 같은 요정 계집이 분수에 맞지 않은 걸 탐내다가 배가 찢어졌구나. 이 멍청한 요정아, 격을 올리는 게 그리 쉬워 보였느냐? 어느 정도 수준이 맞는 인간에게 이름을 받았어야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월광검의 계승자에게 이름을 청했으니 그 대가를 받은 거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호수의 요정은 크게 당황하며 되물었다. 프리비아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남은 웃음을 마저 토해낸 뒤 요정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졌다.
“그 연못처럼 좁아터진 호수에서 천삼백 년을 살았으니 세상 물정을 모를 만도 하지. 네가 천 년 동안 쌓았고, 앞으로 쌓을 세월보다 저 애송이가 고작 백여 년을 살면서 쌓을 ‘업’이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크다는 거다. 바다에 양동이 가득 민물을 부은 셈이지.”
“…그러니까, 제 본질이 지금 저 청년에게 귀속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잘 아는구나. 네년은 저 애송이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계집애야, 네가 교감해야 할 대상은 이제 그 좁아터진 연못이 아니라 저 애송이니라.”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필립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저, 죄송한데 조금 쉽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됩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프리비아는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은 구경을 시켜 줬으니 그 정도는 알려주도록 하지. 인간이 요정에게 이름을 주는 행위는 일종의 언약이다. 저 요정 계집에게 무슨 이름을 주었느냐?”
“유나요.”
“그래.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인 약속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니 설명하지 않겠다. 네놈이 저년을 ‘유나’라고 부르기로 약속을 제안한 거고, 저년은 동의했겠지. 그건 네게 이름을 받는 대신 그만큼의 도움을 제공하기로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로 약속을 했다고 해서 꼭 두 객체가 동등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아하.”
필립은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이해했느냐? 그 언약의 중재자는 인과율 그 자체이기에 결코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저 요정 계집은 네가 볼 손해만큼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게다.”
프리비아는 요정이 귀엽다는 듯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충격에 빠진 요정은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네가 짊어진 업에 이 요정 계집이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네가 월광검의 계승자로서 짊어진 무게는 그 정도라는 거다.”
잠깐 요정을 가지고 놀던 프리비아가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필립은 그렇게 대답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설정을 어느 정도 아는 그에게도 프리비아의 말은 어려웠다.
이 순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지혜를 가졌는지 대충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