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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41화 (41/119)

041화

* * *

‘필립은 대체 어딜 간 거야?’

펠리시아 오스왈드는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만티코어와의 대결은 성가시면서도 많은 집중력을 요구했다.

기본적으로 항마력을 지녀 가죽에는 검기가 잘 박히지도 않았고, 꼬리의 독침엔 오우거도 한 방에 마비시킬 만큼 강력한 독이 발려 있었기에 두껍고 커다란 앞발보다 몇 배는 위협적이었다.

‘회전검을 쓰면 될 것 같은데….’

필립이 알려준 회전검을 이용한다면 만티코어의 가죽을 어떻게든 뚫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아직 필립만큼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었다.

조금 큰 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틈을 벌어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선 쟈니스가 전부였다.

‘루아는 아직 이 싸움에 도움이 될 수준이 아니야. 필립만 나타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대체 어딜 간 거야?’

낮잠을 즐기다 갑자기 괴수의 기운을 느껴져 머리도 묶지 못하고 튀어나온 참이었다. 그녀는 남동생을 원망하며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독침을 피해냈다.

“이 빌어먹을 계집들이 끝까지 성가시게 하는군.”

만티코어의 머리에 달린 노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곧 만티코어의 입에서 저주의 낱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교수님!”

본래라면 시력이나 청각을 빼앗고 몸을 느리게 했을 저주들은 쟈니스의 화염구 마법이 날아들자 중간에 취소되었다.

제아무리 고대부터 먹이사슬의 위쪽에 자리했던 괴수라도 자기 자신이 마법을 시전할 때만큼은 오러와 마법에 무방비했다.

한편 루아는 검을 뽑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분명히 찬란히 빛날 것이 분명했으나, 안타깝게도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초보자에 불과했다.

도무지 뭘 해야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돕고 싶어.’

그녀는 만티코어가 두려웠다. 사자의 몸에 달린 노인의 얼굴은 징그러웠고, 꼬리에 달린 날카로운 독침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절로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선 쟈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고, 루아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잠깐씩 돌릴 때마다 공포가 가득한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 것이 보였다.

당장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무서운데도 쟈니스는 루아를 지키려고 드는 것이었다.

필립이 선물해 준 ‘구도자의 검’을 불끈 쥔 루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검술은 결국 검을 다루는 기술이야. 루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검으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기술이지. 그러려면 검이 상대의 몸에 닿아야겠지? 베고, 찌르고, 상대방의 공격을 흘리고, 속임수로 속이건 결국에는 목적은 하나뿐이라는 이야기야.’

곧 필립의 가르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검이 상대의 몸에 닿으면 그걸로 끝이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루아는 홀린 듯 검을 들고, 몸을 뒤로 당겼다. 최근에 마력이라는 힘을 제대로 인식한 그녀는 신체를 오러로 강화하는 법 같은 건 몰랐다.

그저 손에 든 검을 있는 힘을 다해 만티코어에게 던질 뿐.

본래라면 단지 날붙이를 던지는 것 따위는 만티코어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가벼운 나뭇가지가 날아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구도자의 검’이 누가 봐도 마법검처럼 고급스럽게 생겼다는 것.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합금 아티레움으로 만들어진 검신은 은은한 묵빛을 머금었고, 검받이와 폼멜은 섬세하고 예술적인 올슨의 감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만티코어는 감히 그 검을 무시하지 못했다.

‘구도자의 검’에서는 분명히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그 내용물은 사용자의 체형에 맞게 검의 길이와 무게가 알아서 조정되는 기능이었으나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만티코어의 동체가 루아의 검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크게 움직였다.

펠리시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정신을 완전히 집중해 검기를 회전시킬 만큼의 여유를 얻은 것이었다.

“하아압!”

오러로 강화된 펠리시아의 속도는 만티코어와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았다. 펠리시아의 검이 만티코어의 옆구리를 길게 갈랐다.

그 질기고 단단한 가죽이 완전히 갈라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유효한 일격이었다.

“끄아아아악!”

만티코어의 비명이 호수를 쩌렁쩌렁 울렸다. 벌어진 상처에서 시꺼먼 피가 흘러내려 땅을 적셨다. 뒤로 크게 물러난 만티코어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감히 날 속여?”

상처 입은 괴수의 날카로운 분노가 검을 던진 루아를 향했다. 루아는 날것 그대로의 살기와 적의에 하마터면 오줌을 쌀 뻔했다.

“으우우….”

다리에 힘이 풀린 루아가 주저앉자마자 쟈니스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정신력을 대부분 소모한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루아를 향해 쏘아진 저주 마법의 검은 투사체가 쟈니스가 시전한 방어막과 충돌했다.

쟈니스는 만티코어의 전력이 담긴 저주를 완전히 방어해내지 못했다. 방어막이 깨져 나가자 그녀의 입에서 죽은 피가 솟았다.

“커흑!”

현역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도 견디지 못할 위력이었다.

펠리시아는 물론 구경만 하지 않았다. 만티코어의 두꺼운 목을 노리기 위해 빈틈을 노렸으나 괴수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게 더 빨랐다.

“언젠가는 네년들의 고기를 꼭 씹고야 말리라!”

만티코어는 도주를 결심한 듯했다. 애초에 놈은 쟈니스와 루아를 잡아먹을 생각으로 전투를 벌인 것이었기에, 목숨의 위협이 느껴지자 미련 없이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겠네요.”

그러나 어디선가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곧 호수의 수면에서 파문이 일어나더니 거대한 소용돌이가 솟구쳤다.

“감히 내 호수에 역겨운 냄새를 풍긴 죄로, 당신을 죽이겠어요.”

호수의 요정이 서늘한 눈으로 만티코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만티코어를 가리키자, 집 한 채 정도는 우습게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가 만티코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제기랄.”

만티코어는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저건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 빌어쳐먹을 주문쟁이가 날 속였군.’

요정이 사는 호수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수백 년 정도 묵은 요정일 줄만 알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여행자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숲의 짐승들을 악의 없이 괴롭히는 것 정도인 요정을 상상했던 만티코어는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곤 이를 악물었다.

저건 이미 요정이라고 할 수 없을 수준의 힘을 지닌 존재였다.

곧 날카로운 칼날처럼 연마된 물의 소용돌이가 공중에 뜬 만티코어를 집어삼켰다. 살가죽과 검은 혈액이 터져 나오려다 소용돌이의 원심력으로 인해 모습을 감추었다.

“…당신은 누구죠?”

당황한 펠리시아가 나타난 여인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녀가 적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교수님. 적이 아닙니다. 검을 거두세요.”

그러자 필립의 목소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필립?”

그는 한 손에 정신을 잃은 로브 차림의 사내를 들고 있었다.

“쟈니스부터 챙기세요. 교수님.”

필립의 말에 펠리시아는 쟈니스를 바라보았다. 코피를 흘리며 피를 토해낸 쟈니스의 상태는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꽤 나빠 보였다.

“으으….”

펠리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괴로워했다. 저 소녀는 자신을 돕다가 저렇게 된 것이었다.

본래라면 오롯이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싸움이었고, 쟈니스는 도움이 될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렇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냥 준비도 없이 마법을 너무 많이 쓴 것뿐이에요. 이런 건 조금만 쉬면 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펠리시아의 표정을 본 쟈니스가 손을 내저었다. 마법을 무리하게 쓴 대가치고는 꽤 싼 편이었다.

심한 경우 머릿속에 출혈이 일어나거나, 심정지가 오는 수도 있었기에 쟈니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엇보다 루아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펠리시아는 품에서 땀에 젖은 손수건을 꺼냈다. 쟈니스는 잠깐 망설이다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코와 입에 흐른 피를 닦았다.

생각보다 땀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예쁘셔서 그런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쟈니스는 피식 웃었다.

“고생 많았다. 쟈니스.”

필립이 그녀를 칭찬했다.

“…천만에요. 저번에 교관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잖…아…요.”

말을 이어가던 쟈니스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졌다. 깜짝 놀란 펠리시아가 몸을 숙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가 그저 잠든 것뿐이란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음으로 필립을 향했다.

“…그래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볼래? 저 여자는 누구고, 너는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그녀는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 자다 일어나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필립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루아. 괜찮니? 이리 오렴.”

그는 애꿎은 루아를 불렀다. 루아는 필립이 자신을 부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필립은 그녀를 감싸고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무서웠겠지. 하지만 이젠 괜찮다. 다 끝났어.”

“흐윽…훌쩍.”

루아는 훌쩍이며 필립을 세게 끌어안았다. 펠리시아는 차마 거기에 끼어들 순 없었기에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알몸이었고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보여선 안 될 곳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귀족 영애로 평생을 살아온 펠리시아에겐 정도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그 아이군요. 내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아이가. 확실히 느낄 수 있어요. 이 아이가 위대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호수의 요정은 펠리시아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루아에게 꽂혀 있었다.

“그렇습니다.”

필립은 과거에 원작 게임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지독히도 어려웠던 한 시나리오의 종장.

마족에게 당해 죽어가는 요정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성장한 루아의 모습을.

요정의 이름을 짓는 건 오직 전설이나 신화에 나올 만큼 거대한 운명을 타고난 인간만이 가능했다. 건국신화나 전설 속 기사들의 무용담 속에는 항상 요정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나올 정도.

그리고 루아는 그게 가능한 소녀였다.

“…하지만 아직 자격이 부족해요. 저는 천삼백 년을 살아온 요정, 저 아이는 어린 요정의 이름을 지을 수는 있겠지만 내 이름을 지으려면 어림없어요.”

“예?”

요정의 반응이 시큰둥했기에 필립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저 아이는 제 이름을 지을 만큼 충분한 업을 쌓지 못했어요.”

‘무슨 말이야?’

펠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뭐 어떻게 된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수의 요정은 미간을 좁혔다.

“…당신은 당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해요. 동의하나요?”

“아이가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요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약 없는 약속을 듣는 건 이제 지쳤어요. 제가 몇 년을 산 것 같아요? 거짓말쟁이가 되기 싫은가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침을 꿀꺽 삼키며 필립은 요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차하면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요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필립을 째려보며 입술을 떼었다.

“당신이 내게 이름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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