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 * *
나흘 동안 쓸고 닦은 뒤 유세프 상회 측 인부를 통해 여러 집기나 가구가 들어오고, 필요한 시설을 설치하는 데 총 이 주가 소요되었다.
필립은 완성된 부실을 보며 조금 후회했다.
‘너무 돈을 많이 썼나?’
일단 필요해 보이는 건 전부 설치하고 때려 박았다.
애초에 창고로 만들어진 만큼 내부도 넓었고, 외부에 써먹을 만한 공터도 있었다. 아예 좁은 실내였다면 어느 정도 구색만 맞춰 놨을 테지만 또 들어갈 공간이 많다 보니 괜히 이것저것 집어넣게 되었다.
물론 전부 리즈리엘의 돈으로 해결했기에 필립은 책임 없는 쾌락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한 휴게실과, 검술 수업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탈의실까지 설치했고 스무 명이 모일 수 있을 만큼 넓은 회의실까지 만들어 두었다.
요즘 들어 부쩍 친해진 쟈니스와 스테판, 셰릴에겐 수업이 끝나고 모여서 수다를 떨 아지트가 생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부실이 완성되었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여행부는 설립 목적에 걸맞게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에서 평소에는 접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는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회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필립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주말, 여행부의 공식적인 첫 활동이 있을 예정이니 모두 준비했으면 좋겠구나.”
“공식적인 활동이라고 하시면….”
“여행부의 활동이니 여행이 되겠지. 장소는 셰릴에게 전달해 둘 테니 기대해도 된다. 그리고 성취의 전당에 대해선 저번에도 말했듯이 일단은 비밀로 했으면 좋겠구나.”
학생들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필립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무사히 동아리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건 나름대로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더 늦어졌다간 무슨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할 줄 아무도 몰랐다.
필립은 학생들을 데리고 다시 성취의 전당으로 내려왔다.
스테판과 루아에게도 도전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저는 지식의 시험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지식에 자신이 있던 스테판은 여우가 주관하는 지식의 시험을 선택했다. 물론 그는 한 문제를 겨우 맞히고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그만 헝겊 조각을 보상으로 받았다.
“…안경이 잘 닦이는 천이라더군요. 셰릴. 이건 네게 줄게.”
“앗. 감사합니… 아니, 고마워. 스테판.”
도련님이라고 부르려던 셰릴이 쟈니스의 눈초리를 느끼곤 금세 말을 바꿨다. 그녀는 시험 삼아 자신의 안경을 벗은 뒤 한 번 닦았는데, 마치 새 알처럼 자잘한 흠집까지 사라지는 걸 보곤 깜짝 놀라 안경을 떨어트릴 뻔했다.
“로흐나 산맥에서만 자라는 가을살이 풀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테판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지식의 문이 벌컥 열리고 여우가 뛰쳐나왔다.
―지금 내가 낸 문제가 이상하다는 이야긴가요? 네가 무식한 거예요. 저기 계신 관리자님은 다섯 문제를 다 맞혔다고요!
여우는 짜증이 치민 듯 스테판에게 달려들어 앞발로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악! 잠깐만요!”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나 스테판은 소녀들이 보는 앞에서 얻어맞고 싶지 않았다.
꼬리로 뺨까지 얻어맞은 스테판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필립은 루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아 너는 어떻게 할래?”
“저는… 저기요!”
루아가 가리킨 문은 용맹의 시험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필립은 조금 불안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쟈니스는 기절했지만, 루아는 기껏해야 울음을 터트리는 정도겠지.’
필립의 허락을 받은 루아는 용맹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로 사라졌던 루아는 이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나왔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호랑이의 등에 매달린 채 꺽꺽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너무 슬프게 우는 나머지 호랑이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려 루아의 뺨을 핥을 뿐이었다.
“에고고, 아가야. 네가 본 건 전부 환상이란다. 네가 거울을 통해 뭘 봤든 네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듯한 암컷 호랑이의 눈빛에 필립은 루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구리를 붙들고 호랑이의 등에서 내렸다.
“뭘 본 거니, 루아?”
필립이 묻자 루아는 훌쩍이며 대답했다.
“루엔을… 루엔을 봤어요. 교관님. 루엔이 절 보고 나쁜 계집애래요. 왜 자길 구해 주지 않았냐면서, 이젠 가족도 아니라면서….”
“음….”
작게 신음을 뱉으며 필립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용맹의 시험’은 잘못 만들어진 시험처럼 보였다.
‘무슨 메커니즘인지 대충 알 것 같군.’
아무래도 대현자 아슬라가 생각하는 용기란 자신의 약함과 마주하는 것일 터였다. 1단계부터 저런 에누리 없는 난이도였으니 저 시험을 통과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역시 한동안은 비밀로 해야겠어.’
성취의 전당이 공개됐다간 아무래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젊은 소년들은 언제나 자신이 또래보다 더 낫다는 걸 자랑하고 싶기 마련이니까.
“흐이잉….”
필립은 루아를 끌어당겨 등을 쓰다듬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필립은 곧바로 루아를 뒷마당으로 불렀다.
루아는 다행히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용맹의 시험에서 자신이 본 게 환영이라는 걸 확실히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가장 먼저 마력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오러라는 게 무엇인지 직접 느껴 보는 편이 편하겠지.”
“…네. 교관님.”
아직 풀죽은 듯한 표정을 보니 필립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필립의 육체적인 나이는 스물둘이었지만, 그의 정신연령은 30대 중반의 그것이었다.
첫사랑이 조금 치명적으로 성공했더라면 루아보다 고작 몇 살 어린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이리 와서 손을 내게 주렴.”
루아가 손을 내밀자 필립은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고 오러를 움직였다. 이전에 펠리시아와 디아나에게 회전검의 운용법을 알려 주던 방식과 같았다.
“눈을 감고, 네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느껴 봐.”
아직 마력에 눈뜨지 못한 루아는 몸에 오러를 쌓지 않았기에 필립의 오러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본래 이런 식으로 마력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시점에선 오직 필립만 가능한 일이었고, 루아는 그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아!”
루아는 평생 처음 느끼는 기묘한 감각에 탄성을 뱉었다.
따뜻하고 활동적인 뭔가가 몸속을 흐르는 느낌. 마치 피가 흐르는 걸 감각으로 느끼는 듯한 기분이었다.
“알겠니?”
루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설명을 더 덧붙였겠으나 필립은 루아의 재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기에 간단히 물었다.
“…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단지 계기일 뿐이었다.
본래라면 검을 휘두르는 도중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을 힘.
루아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는 걸 느꼈다. 방금 필립이 불어넣은 뭔가가 온 세상에 가득했다.
뒷마당에 자란 풀에도, 저 높은 하늘에도,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도 그것들이 느껴졌다.
“이게 마력이에요?”
필립은 루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네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일차적으로 가공한 게 마력이지. 마력을 다시 가공하면 그게 오러가 되는 거고, 네가 느끼고 있는 것들은 마나라고 부른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는 루아를 보며 필립은 루아가 이 세상의 원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재능이었다.
이미 오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펠리시아보다 월등히 예민한 기감, 그리고 마력 친화도.
‘…이거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만약 루아가 필립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해 받는다면 원작보다 훨씬 강해지리라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먼 미래에 과연 필립이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발 착하고 올바르게 자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필립은 루아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위치였다.
“이제 마력을 느꼈으니 네가 따로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네 몸에 자연스럽게 마력이 쌓일 거다. 충분히 쌓인 뒤에 그 힘을 다루는 걸 배워 보자.”
“네에.”
“그러면 이제 목검을 챙겨 오렴.”
루아가 뒷마당에 비치된 목검을 두 자루 들고 오자 필립은 한 자루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매일 하던 걸 하자. 오늘은 자신이 있나 모르겠네.”
부실이 꾸며지는 동안 매일 하던 훈련법.
그것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필립을 상대로 루아가 마음대로 공격하는 것.
사실 놀이나 다름없는 훈련이었다. 필립도, 루아도 진지한 훈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필립은 루아와 놀아준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루아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주 동안 단 한 번도 필립의 옷깃도 스치지 못한 루아는 새삼 승부욕이 불타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선언했다.
“오늘은 꼭 성공할래요.”
“…그래? 성공하면 네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준다는 건 아직 유효하니까 열심히 해 봐.”
필립이 내건 성공 보수는 루아의 의욕을 불살랐다.
루아는 목검을 양손으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필립의 자세 또한 굉장히 낮았는데 그건 루아의 덩치가 필립보다 한참 작기 때문이었다.
체력 하나만큼은 교관보다도 뛰어난 루아는 호흡의 틈이 굉장히 짧았다. 이건 검사에게 있어 대단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검이 필립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필립은 십 분 동안 루아의 공격을 모두 받아쳤고, 결국 그날도 루아는 볼을 부풀리며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아직도 속임수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못 하는군.’
루아의 정직한 공격에 필립이 당할 리가 없었다. 평생 누군가를 속여본 일이 없는 루아는 속임수라는 걸 써 보지도, 겪어 보지도 못했다.
필립은 루아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헥…헥….”
땀범벅이 된 루아를 보며 필립이 키득댔다. 그는 루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닦아 주었다. 눈에 들어갈 것 같아서였다.
“이제 들어가자. 슬슬 해가 지려고 하잖니.”
“…네에.”
시무룩해진 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계속 나아지고 있으니 실망할 필요 없단다.”
루아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법은 간단했다. 필립은 그녀를 목욕탕으로 보내고 메이드를 불러 간식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 주 주말에 가게 될 여행지에서 조금이라도 편하려면 루아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었다.
‘…애들 굴리는 데 그만한 곳이 없기는 하지.’
필립은 학생들을 아카데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호수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신기루 호수’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호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