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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35화 (35/119)
  • 035화

    * * *

    셰릴은 삼십 분이 지나자 문을 열고 나왔다.

    “으으으….”

    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어려움이었어요. 어떻게든 두 문제는 맞혔는데, 세 번째 문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지혜의 시험은 창의력과 논리적인 사고력을 시험하는 관문.

    필립이 미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인터넷이나 교육 잡지에 돌아다니는 창의력 퀴즈와 비슷한 난이도였다.

    성냥개비를 몇 번 안에 옮겨 뭘 만들라거나, 늑대 몇 마리와 양 몇 마리를 안전하게 옮기려면 최소한 몇 번 뗏목을 왕복해야 하는가 같은 익숙한 문제들.

    “처음부터 두 문제나 맞히다니, 대단하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드물 텐데.”

    그는 셰릴을 칭찬했다.

    주입식 교육만 받아 온 환경에선 그런 문제의 접근법조차 깨닫지 못하는 게 보통일 터.

    “네가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단다. 처음 널 봤을 때부터 그랬지.”

    “에헤헤, 감사합니다.”

    필립의 칭찬을 기분 좋게 듣던 셰릴이 문득 자신과 필립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소설 속 명대사를 따라 하며 심취해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은 어떤 분야에서건 도움이 되기 마련이지.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남들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단다.”

    셰릴의 마음을 읽은 필립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상한 분이셔.’

    셰릴은 필립의 손길에서 묘한 충족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게다가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지하 던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셰릴에게 필립이 질문했다.

    “두 문제를 맞혔다면 보상을 받았을 텐데, 뭘 받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안에 계신 원숭이… 아저씨께서 이걸 추천해 주셨어요.”

    셰릴은 대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까만 안대를 내밀었다. 필립은 그 아이템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걸 얻었구나. 제대로 추천해 준 게 분명하네.”

    “수면 효율을 높여 주고 조금만 자도… 어, 알고 계셨어요?”

    이름도 간단한 ‘수면 안대’.

    짧은 낮잠이든 숙면이든 수면에 관한 행위의 효율을 올려주는 아티팩트였다. 당장 큰 능력을 주지는 않으나 장기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아이템이었다.

    “그럼. 어쨌거나 다섯 문제를 전부 맞힐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 보렴. 아, 그리고 쟈니스 무르엘라를 좀 깨워 줄 수 있을까?”

    “네. 그럴게요.”

    셰릴은 기절한 쟈니스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두려운 표정으로 몸을 덜덜 떨더니 필립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달라붙었다.

    “아, 안에, 배, 뱀파이어가….”

    “그거 다 꿈이고, 환상이다. 네가 본 건 진짜가 아니야.”

    필립이 그녀를 안심시키자 이내 상황을 파악한 쟈니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필립에게서 떨어졌다.

    “흠, 크흠,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 알겠으니 이제 돌아가자. 시간이 늦었구나.”

    슬슬 해가 넘어갈 시간이었기에, 필립은 두 소녀를 데리고 성취의 전당을 빠져나왔다.

    대광장으로 돌아가는 길, 필립이 앞장서 걷는 사이 쟈니스가 셰릴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기숙사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자.”

    “왜?”

    “악몽 꿀 것 같단 말이야.”

    마법 학부인 그녀들은 필립의 청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잘 몰랐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부터 할 일이 꽤 많았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필립은 가장 먼저 루아를 찾았다.

    “먀아아옹.”

    루아는 침대에 누운 채 타니아와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고양이 장난감 대신 자기 손가락으로 타니아와 놀아주고 있던 것이었다.

    ‘저게 그 난폭한 고양이가 맞나.’

    그 상식을 벗어난 친화력에 필립은 조금 감탄하며 그녀를 불렀다.

    “루아.”

    “앗, 교관님.”

    “…침대에 타니아가 들어오도록 허락한 건 둘째치고, 너희 둘 다 목욕은 했는지 묻고 싶구나.”

    타니아와 신나게 노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필립이 내린 결론이었다. 본래 이 시간이면 막 목욕을 마치고 나와 뽀송뽀송해야 할 루아의 얼굴이 뭔가 조금 꼬질꼬질해 보였다.

    “잘못했어요….”

    루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필립은 고작 목욕을 잊은 것 정도로 그녀를 혼낼 생각은 없었기에 웃으며 손짓했다.

    “괜찮으니 앉아 보렴. 네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단다.”

    “네에.”

    루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필립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요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니?”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간 루아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으음, 재밌어요! 모르는 걸 배우는 것도 그렇고, 며칠 전에는 올리비아랑 아니스와 친구가 되기로 했거든요.”

    “검술 수업은 어때.”

    “…재미있는데, 조금 답답하기도 해요. 올리비아랑 아니스는 어렵다고 하는데… 저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애들이 싫어할 것 같아요.”

    “잘했다. 사람마다 잘하는 건 다르니까.”

    사실 루아의 습득 속도는 남달랐다. 검 같은 건 쥐어본 적도 없는 어린 소녀가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제법 검을 잡는 자세를 낼 줄 알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기본적인 육체의 스펙도 대단했다. 필립은 루아가 지친 모습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근력이나 탄력, 그리고 유연성도 또래 소녀와 비교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필립은 슬슬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이의 표정이나 편안한 분위기를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멘탈이 건강해진 것 같았다.

    “루아. 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널 가르치고 싶구나.”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루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그대로란다. 네게 검술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가르칠 생각이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고, 네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네가 지금처럼 아카데미에 잘 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이건 필립의 진심이었다.

    루아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언젠가는 검의 극의에 닿을 만한 재능을 가졌고, 필립은 그녀가 이대로 아카데미를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예쁜 옷이나 맛있는 간식에 푹 빠져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2년 정도는 그렇게 내버려 두어도 되었다.

    “…잘 모르겠지만, 교관님하고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럴래요.”

    잠깐 고민하던 루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응?”

    이유가 조금 이상했기에 필립은 눈을 크게 뜨며 루아를 바라보았다.

    루아는 조금 수줍은 듯 몸을 배배 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맨날 바쁘시잖아요. 메이드 언니들하고 집사 아저씨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시긴 하지만, 전 그래도 교관님이 좋아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루아는 생각했다.

    사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필립은 그녀가 웃으면 같이 웃었고, 슬퍼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린 루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일단 시작해 보자꾸나. 내일부터 수업이 끝난 뒤에 날 찾아오렴. 너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있지만, 그 애들은 착해서 너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네에!”

    루아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리곤 필립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면 언니들이에요, 오빠들이에요?”

    “여자애가 두 명이고, 남자애가 한 명이지.”

    “전 평민인데, 언니랑 오빠들이 절 좋아할까요? 교관님이 친하게 지내 달라고 말해 주시면 안 돼요?”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러겠지만,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셰릴이라는 아이도 평민 출신이거든. 도서관에 가면 만날 수 있으니 친하게 지내보렴.”

    그렇게 한밤중이 될 때까지 필립은 루아에게 붙들려 있었다.

    열네 살 소녀는 지치지 않고 온종일 떠들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걸 망각한 대가였다.

    * * *

    “난 동아리에 이름만 올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스테판 브레이는 셰릴의 손에 붙들려 뒷산 근처 창고에 끌려온 신세였다. 그는 자신과 남매처럼 자란 셰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만이야?”

    쟈니스가 그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스테판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이 3학년 학생들은 필립이 창고 건물을 청소하는 걸 도와주기로 막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필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담당 교관이 혼자 청소하게 두는 건 아무래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셰릴이랑 친구로 지내기로 했는데, 네가 그렇게 딱딱하게 굴면 셰릴이 부담스럽잖아.”

    쟈니스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스테판은 깜짝 놀라 셰릴과 쟈니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예? 아가씨께서, 셰릴하고요?”

    순식간에 개족보가 되어 버린 군신 관계에 당황하는 사이 셰릴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냥 그렇게 해요. 도련님.”

    “셰릴 너도 저 미련퉁이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앞으로 우리 셋은 아카데미에서만큼은 친구로 지내는… 꺅! 교관님! 놀랐잖아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셋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려던 쟈니스가 어느새 다가온 필립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미안하다. 보기 좋은데 계속하렴.”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거든요.”

    쟈니스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여행부 소속이 된 세 학생은 필립의 손을 잡고 온 한 소녀를 발견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젖살이 빠지지 않아 볼이 빵빵한,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한 달 뒤에 우리 여행부에 가입하게 될 신입생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학생이기도 하고.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테니 미리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단다.”

    학생들도 소문 정도는 들은 적이 있었다. 오스왈드 가문의 후원을 받는 신입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이지만 아카데미에서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었다.

    “인사하렴, 루아.”

    “…네.”

    루아는 필립이 재촉하자 앞으로 나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아라고 합니다. 검술 학부 1학년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셰릴이나 스테판은 별생각 없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 난 셰릴이고, 도서관에서 일해. 혹시 책 좋아하니?”

    “마법 학부 3학년 스테판 브레이다. 만나서 반갑다.”

    그러나 쟈니스는 말없이 루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쟈니스 무르엘라. 무르엘라 가문의 직계 중 넷째다.”

    그 모습을 보던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쟈니스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아는 그녀의 귀족적인 자세와 말투에 조금 압박감을 느낀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쟈니스는 단지 두 살이나 어린 후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을 뿐이었다.

    그녀는 위로 오빠만 셋이었고, 가장 나이 차가 적은 막내 오빠가 그녀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필립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다 같이 이곳을 치우고 꾸미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앞으로 너희가 쓸 공간이니 직접 치우면 더 애착이 가겠지. 원하는 가구나 물품이 있다면 내게 말하렴. 들어가는 만큼은 전부 마련해 줄 테니까.”

    ‘그냥 사람을 불렀으면 좋겠는데.’

    ‘진짜 우리가 치우나?’

    ‘난 이런 거 해본 적도 없는데. 하녀나 하인들이나 하는 거잖아.’

    세 학생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이 장갑과 빗자루, 입과 코를 가릴 천을 챙겨 먼지투성이 창고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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