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 * *
“용맹에 자신 있다면 왼쪽으로, 지혜를 자랑하고 싶다면 가운데 문으로, 쌓은 지식을 활용하고 싶다면 오른쪽 문으로 가시면 됩니다.”
필립은 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일단 ‘지식’이라는 글자가 박힌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이밀자마자 어두운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도서관처럼 책장이 늘어선 방 가운데, 탐스러운 꼬리가 두 개 달린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첫 방문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앗!”
여우는 필립을 보자마자 신이 나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더니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영원히 썩어가다 미치는 줄만 알았는데!”
그러다 곧 필립에게 달려들어 앞발을 필립의 단전에 올린 뒤 머리를 비볐다. 필립은 그 격한 애정표현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이 ‘성취의 전당’에 존재하는 저 말하는 동물들은 대현자 아슬라의 마법으로 창조된 인공생명.
이곳에 대해 알고 있는 필립은 저들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우의 옆구리를 붙들고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여우가 혀를 내밀어 필립의 얼굴을 핥다가 문득 제정신이 들었는지 다리를 버둥거리며 쏘아붙였다.
“이거 놔요. 저는 대현자이신 아슬라 님을 대신해 시험을 주관하는 시험관이라고요.”
필립은 여우를 내려놓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먼저 앵겨 놓고선.’
그러나 필립은 저런 생떼 정도는 받아줄 수 있었다.
“이런 실례를. 미안합니다.”
필립이 사과하자 콧대가 높아진 여우가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조심해 주세요.”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에야 필립은 시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당신의 ‘지식’을 시험하는 공간이에요. 제가 내는 다섯 가지 문제 중 몇 개를 맞히느냐에 따라 더 좋은 보상을 가져갈 수 있어요.”
“그렇군요.”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우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다섯 문제를 다 맞히게 되면 아슬라 님께서 남기신 물건 중 가장 좋은 물건을 골라서 가져갈 수 있답니다. 저는 그중 아슬라 님의 열쇠를 추천하고요.”
여우의 얕은 수작에 필립은 피식 웃었다.
‘아슬라의 열쇠’는 이곳 성취의 전당의 소유권을 상징하는 열쇠였다.
물론 이곳의 보상에는 손댈 수 없고, 그걸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험에 도전할 사람을 선별하는 것과 인공생명들을 다룰 수 있는 것 정도.
여우는 필립이 그 열쇠를 선택해 자신을 이 장소에서 풀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물론 필립의 목표는 그 열쇠였다. 사실 다른 보상이라고 해 봤자 명검이나 마법 지팡이, 혹은 재료들로, 그런 것들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마법사가 직접 창조한 인공생명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필립은 저 정중한 곰이나 이 여우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려고 알트 탭을 눌렀는데, 갑자기 전투가 발생해서 깜짝 놀랐지.’
지식의 시험을 진행하는 도중 다른 창으로 넘어가면 부정행위로 간주되어 곧바로 전투가 일어났었는데, 중반까지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놨던 학생들이 저 여우의 몸통박치기 한 방에 모조리 빈사 상태가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면, 당신의 지식을 시험하겠습니다.”
여우가 선언하자 주변에 장식된 책장에서 수백 수천 권이 넘는 책들이 빠져나와 필립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중 한 권이 멈추었다.
[이 꽃은 안개 속에서만 자라며, 섭취 시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자백제와 최음제의 원료로 쓰이며 엘프들은 이 꽃을 마비약으로 쓴다. 이 꽃의 이름을 말하시오.]
갑자기 빛나는 문장이 허공에 떠오르자 필립은 이것이 첫 번째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쉽네.’
첫 번째 문제는 예상대로 쉬웠다. 필립은 몇 초도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말했다.
“루나리어스.”
이 정도는 마법사 캐릭터를 육성한 적이 있다면 누구나 맞힐 수 있는 수준의 문제였다. 필립은 자신이 겪었던 것과 달리 문제가 무작위로 출제되자 조금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답이에요. 그러면 두 번째 문제.”
여우가 정답을 확인하자 또다시 책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만티코어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괴수이다. 이것들은 대부분 오래된 유적이나 지하 던전에서 서식하며, 불청객들이 그곳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이 습성 때문에 고대인들은 만티코어를 #%@$라 불렀다.]
이번에는 빈칸을 채우는 형식의 문제였다.
고대 지식 같은 경우엔 접할 기회 자체가 한정되어 있어 꽤 난이도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었다.
“비밀 탐식자.”
그러나 필립은 망설임 없이 정답을 말했다. 여기까진 그래도 쉬웠다.
“정답이에요.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아, 그는 한때 정의와 심판의 상징이자 모든 기사의 섬김을 받는 이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선 그의 흔적을 찾기가 너무나도 어렵구나. $%^$%여, 잊힌 고대의 신이여. 언젠가 그대의 빛이 다시 우리를 비추기를 바라나이다.]
본래 이 시험은 연속으로 문제를 맞힐 시 난이도가 기하학적으로 상승했다. 이건 고인물인 필립에게도 조금은 까다로운 문제였다.
‘…뭐였더라? 루? 루 뭐시기였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기에 완전히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오래된 고대 신의 이름 같은 건 게임에서도 최종 아이템이 아닌 거쳐 가는 아이템 앞에 수식어로 붙곤 했다.
잠깐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필립은 조심스럽게 정답을 말했다.
“루베투스?”
그러자 여우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정답이에요!”
세 번째 문제까지 맞히자 필립을 바라보는 여우의 눈에 존경심이 깃들었다.
대현자 아슬라는 이 문제를 만들기 전 마법 학부와 인문학부의 교수들과 교관들에게 먼저 풀어 보게 했는데, 이 문제는 정답을 맞힌 이가 몇 명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한 번에 모든 문제를 맞힐지도 몰라.’
여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문제가 출제되었다.
[이 단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의 종속을 목적으로 설립되었….]
“아, 창성회.”
필립은 문제를 다 듣지도 않고 정답을 말했다. 이건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 나왔던 문제였다.
순식간에 5단계 중 4단계를 통과한 필립을 보며 여우는 꼬리털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답이에요. 저… 문자님? 아까 제가 말했던 아슬라 님의 열쇠는 잊으세요. 그건 사실… 문자님께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걸 가진다고 해서 이곳의 보물들을 얻을 수는 없거든요.”
아무래도 양심에 찔렸던 모양이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죠. 마지막 문제나 주세요.”
“…흥. 이건 정말로 어려울 거예요.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어도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맞히기 힘든 거니까요.”
여우는 뾰족한 말투로 필립을 겁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후, 필립은 한 손에 ‘아슬라의 열쇠’를, 다른 한 손으로는 여우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서 지식의 문을 나왔다.
“컁컁.”
수백 년 만에 ‘지식의 문’ 밖으로 나온 여우가 꼬리를 흔들며 자유를 만끽했다.
“방문자님, 그건?”
필립이 선택한 보상을 본 곰이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필립이 곰을 보며 통보했다.
“제가 이 전당의 소유권을 양도받았으니 이제 여러분은 제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나머지 시험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용맹의 시험과 지혜의 시험을 담당하는 시험관 두 마리 또한 곰의 호출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각각 커다란 호랑이와 안경을 쓴 원숭이였다.
“새 주인을 뵙습니다.”
인공생명체들은 필립이 들고 있는 아슬라의 열쇠를 보자마자 각자의 방식으로 복종을 표시했다. 필립은 그들을 보며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을 느꼈다.
“주인님이라 부르지 말고, 관리자라고 불러 주십시오. 여러분은 제 지시를 수행하거나, 학생들이 이 전당을 이용할 때를 제외하곤 자유를 누리게 될 겁니다. 기본 방침을 먼저 설명하자면…….”
필립은 동물들에게 자신이 생각해 둔 계획을 설명했다.
지금부터 이들은 루아와 루아의 동료가 될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육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내가 신경을 못 쓸 때도 이 동물들이 아이들의 향상심을 자극해야 해.’
말하자면 필립이 다른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이 동물들로 자동사냥을 돌려놓는 셈이었다.
“새 주인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이제 시험관이자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안경을 쓴 원숭이가 물었고,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빨리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요. 세상에,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가냘프고 조신한 목소리로 호랑이가 말했다.
‘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필립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음, 차라리 지금 몇 명을 데려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셰릴을 데려와야겠군.’
* * *
“부실이 될 곳이 여기예요?”
“여긴… 청소가 좀 필요해 보이는데요.”
셰릴은 먼지투성이 창고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도서관에서 그녀와 책을 함께 읽던 쟈니스 또한 얼떨결에 창고로 따라오게 되었다.
“청소는 나중에 해도 된다. 사실 내가 여기서 발견한 게 있는데, 너희들에게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서.”
“…?”
셰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먼지로 가득한 창고를 조심조심 걸었다. 그러다 쌓인 상자를 건드렸고, 거기서 퍼진 먼지가 쟈니스의 좁은 콧속으로 들어갔다.
“엣츄!”
반사적으로 재채기가 나왔다. 튀어나온 콧물과 침이 필립의 목 뒤편을 강타했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쟈니스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필립에게 내밀었다.
“괜찮단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쟈니스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필립처럼 잘생기고 친절한 청년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건 귀족 소녀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에게 목숨을 빚진 쟈니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저곳이다. 어두우니 내가 앞장서마.”
필립이 계단을 내려가자 두 소녀가 그를 뒤따랐다. 이제는 필립의 소유가 된 ‘성취의 전당’에 일행이 들어서자, 곰이 그들을 맞이했다.
“아, 관리자님. 말씀대로 총기 넘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과 돌아오셨군요.”
그 정중하고 사려 깊은 말투와 목소리에 셰릴과 쟈니스는 깜짝 놀라 서로를 붙들었다.
“엄마야!”
“곰이 말을…?”
곧 그녀들은 성취의 전당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었고,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도전 정신을 불태웠다. 한창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나이들이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는 지혜의 시험을 치르고 싶어요. 사실, 제가 도서관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책을 많이 읽을 시간은 없었거든요.”
셰릴은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저는 용맹의 시험을 치르겠어요.”
쟈니스가 당찬 목소리로 포부를 밝히자, 필립의 걱정 어린 시선이 그녀의 여린 심장을 쑤셨다.
“괜찮겠니?”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쟈니스의 귀에는 마치 너 같은 오줌싸개가 괜찮겠냐라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이익… 괜찮아요. 그땐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였어요. 저는 대현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무르엘라 가문의 직계 자손이니 고작 이런 시험 정도는…!”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쥔 뒤 셰릴보다 먼저 용맹의 문을 열어젖혔다. 곧 저절로 문이 닫혔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쟈니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용맹의 시험’의 1단계는 공포를 극복하는 것. 아마 쟈니스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의 모습을 보았을 터였다.
“꺄아아악!”
“어머어머! 얘, 아가야! 괜찮으니?”
호랑이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다정한 암컷 호랑이는 기절한 쟈니스의 옷을 부드럽게 물고 그녀를 필립에게 배달해 주었다.
“이렇게 무서워할 줄 알았으면 겁을 적당히 주는 건데, 제 잘못이에요. 저 아가가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좀 쳤거든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애가 좀 겁이 많아서요.”
필립은 호랑이를 위로한 뒤 쟈니스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도록 땅에 주저앉았다.
“……저, 저도 저렇게 되는 건가요?”
“지혜의 시험은 저렇게 치러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몇 단계만 통과해도 꽤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거란다.”
필립의 응원과 함께 셰릴이 지혜의 문을 열었다. 필립은 그녀가 다시 나올 때까지 쟈니스의 상태를 살피며 얌전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