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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27화 (27/119)
  • 027화

    * * *

    흑묘족 케인은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필립의 별장 지하실에 감금된 그는 필립이 웬 암청색 머리카락의 어린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 계집은…… 분명히 마법 학부의 교관일 텐데……?’

    암살자로 단련된 직감은 비록 필립의 기습을 막아 주지는 못했으나 저 여인이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놈은 무어냐? 타락하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짓눌러 죽이고 싶어지는구나.”

    드래곤 프리비아는 케인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이놈은 죽이면 안 됩니다. 프리비아 님. 흑묘족의 족장인 스텔라라는 여자가 네펜의 위치를 알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필립이 그녀를 만류했으나 프리비아는 코웃음을 쳤다.

    “하! 네놈은 그 말을 믿느냐?”

    “설마 곧이곧대로 믿었겠습니까? 뭐, 족장이 네펜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겠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갔다간 살아서 나오긴 어려웠겠죠.”

    “…그래서 날 찾은 게로군.”

    프리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를 돕기로 한 마당에 화를 내기도 했고, 필립의 대담성이 꽤 기꺼웠다.

    고작 이런 규모의 일에 드래곤의 도움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발상이었다.

    “…저 여자는 누구냐?”

    잔뜩 움츠러든 케인이 잔뜩 겁먹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꼬리를 말았다.

    “그녀의 정체를 알면 너는 죽어야 한다. 알고 싶나?”

    “그럴 리가….”

    필립의 질문에 케인은 급히 부정했다.

    “그러면 얌전히 네 족장에게 우리를 안내하도록.”

    * * *

    ‘너무 편한데.’

    프리비아의 포탈을 다시 한번 이용한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보느냐?”

    “아닙니다.”

    프리비아는 주변을 잠시 관찰하더니 필립의 시선을 느끼곤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표정이 매우 귀찮아 보였기에 필립은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포탈을 타고 이동한 곳은 아카데미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맥이었다.

    “이쪽입니다.”

    흑묘족 케인은 마치 미라처럼 묶인 채 꼬리로 방향을 안내했다. 꽤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듯 조금만 이동하자 짙은 안개가 그들을 맞이했다.

    아직 한밤중이었기에 거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저급한 결계로군. 단숨에 해제할 수는 있지만, 뭔가 이유가 있어서 쳐 놓은 것이겠지.”

    프리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안개가 갈라지며 그들에게 길을 내보였다. 그 말도 안 되는 능력에 필립은 감탄했다.

    저 안개는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필립의 감각을 속이려 들었고, 방향감각과 원근감, 공간 지각 능력에 혼선을 주는 종류의 결계였던 것 같았다.

    안개를 지나자 작은 마을이 보였다.

    딱히 특산품 같은 게 없는 시골 영지의 마을처럼 보이는, 매우 평범한 곳이었다.

    “미야아아옹.”

    “웨에에에옹.”

    단지 까만 고양이가 좀 많았을 뿐이었다. 새끼고양이부터 다 큰 고양이들이 취향에 따라 담장 위나 풀밭에서 늘어져 있었다.

    고양이들은 필립과 프리비아가 마을에 들어서자 튕기듯이 일어나 그들을 경계했다.

    “하아악!”

    “하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프리비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하찮아서 화도 나지 않는구나.”

    필립은 그 말에 동의했다.

    “날 풀어줘. 내가 안내하겠다.”

    묶여 있던 케인이 제안했다. 필립은 잠깐 망설였다. 이 시꺼먼 고양이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풀거라.”

    그러나 프리비아의 지시에 그는 단검으로 케인을 묶은 로프를 끊었다. 고작 이런 일로 그녀와 마찰을 빚고 싶지는 않았다.

    프리비아는 손가락으로 케인의 미간을 찍었다. 곧 풀려난 케인은 곧바로 자신의 몸을 그림자로 휘감더니 이내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가 나타나자 네리아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에에엑! 너무해!

    “동족이여, 너희의 일원인 나 케인이 돌아왔다. 족장님은 어디 계신가?”

    “케인?”

    그의 등장에 고양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 그들 또한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순식간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들의 옷차림은 남루하고 더러웠다.

    천이나 가죽을 기워 만든 셔츠나 바지.

    여자들은 엉덩이를 겨우 가릴 만큼 짧은 치마를 입었다.

    아름다움이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원단이 모자라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중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케인. 네가 기억나는군. 너는 분명히 족장님의 임무를 받아 마을을 떠났었는데…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가 이제 나타난 이유가 뭐지?”

    사내의 말에 케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나도 당신을 기억한다. 쿨루인.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암살자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났을 텐데?”

    사내는 잠깐 케인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족장님의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군. 저들을 제압하라. 아무래도 그 저주받을 인큐버스가 우리 동족에게 끔찍한 짓을 한 것 같으니.”

    사내의 지시에 주변을 둘러싼 흑묘족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나는 너희 동족이다. 비록 사정이 있어서 떠났으나, 내 몸에는 흑묘족의 피가 흐른다. 너희가 내게 이럴 수는 없다.”

    크게 당황한 케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필립은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필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건방진 미물들아.”

    그녀는 결국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했다.

    프리비아가 손을 들어 올리자 필립은 머리 위로부터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 갑자기 중력이 몇 배가 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으악!”

    “아아아악!”

    흑묘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마치 거인이 손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땅에 납작 엎드렸다.

    공포에 사로잡힌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곧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필립과 프리비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필이 프리비아가 펼친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힘을 분산시켜 버텨낼 수는 있었다.

    “….”

    프리비아는 잠시 흥미롭다는 듯 필립을 응시하다가 흑묘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을 이대로 눌러 죽이면 족장이라는 놈이 나오려느냐?”

    그야말로 폭력적이고도 확실한 일 처리였다. 필립은 딱히 그녀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혼자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지만 버티기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태가 몇 분만 더 이어졌다간 그 또한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이건 중력 마법이잖아.’

    대현자라 불리는 이들이 전황을 뒤집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 중 하나였다.

    “크으윽…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가 바닥을 기며 힘겹게 프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너 같은 미물이 알 바 아니다.”

    사내를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필립은 자신이 말도 안 되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무가치하다 느끼는 상대에겐 호의를 보이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타고난 성격이 잔인하지 않아 생명 자체를 경시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하지는 않는 것이다.

    곧 골목과 울타리 사이를 헤집으며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다른 고양이에 비해 조금 더 털에 윤기가 있었고, 날씬한 몸매에 얼굴이 조금 더 예뻤다.

    그 고양이는 순식간에 그림자에 휩싸여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었다.

    “제가! 제가 흑묘족의 족장 스텔라입니다. 귀인께선 제발 멈추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눈치가 꽤 빠른 듯 중력 마법의 범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멈춘 뒤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프리비아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몸을 내리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흑묘족들이 공포와 경외가 섞인 시선으로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네년이 흑묘족의 족장이냐? 네 얼굴이 낯이 익구나. 너와 닮은 계집아이가 언젠가 나를 찾아온 일이 있었지. 테루인, 그런 이름이었어.”

    프리비아는 흑묘족의 족장, 스텔라의 얼굴을 보더니 뭔가가 기억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루인이라면, 제 조모님 되십니다. 그렇다는 건, 당신께선 드래곤이시겠군요. 미천한 피조물이 인계의 조율자를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지극히 저자세인 스텔라를 보며 프리비아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필립을 향했다.

    “보았느냐? 이게 위대한 드래곤을 대하는 미물의 자세이니라.”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의 반응에 프리비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물론 필립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극진히 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조금 버릇없이 굴어도 용서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저희 마을을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씀만 하시면 신명을 다해 돕겠습니다. 편한 자리로 모실 테니 부디….”

    “그러도록.”

    프리비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스텔라가 필립과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 * *

    “우리가 여기에 온 건, 크레센트의 수장 네펜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이 흑묘족이 당신이라면 그 위치를 알 거라고 말하더군요.”

    따뜻한 벽난로 앞으로 안내된 필립은 스텔라가 내어 온 차를 마시며 그녀에게 용건을 설명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포박된 케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케인. 날 보면 뭔가 생각나지 않나요?”

    “족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케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스텔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역시 세뇌되었군요. 케인, 십 년 전, 당신은 내 부탁을 받고 크레센트에 잠입했습니다. 인질로 붙잡힌 타니아를 구하기 위해서요. 기억나지 않나요?”

    “예? 그게 무슨… 저는 크레센트와 흑묘족 사이의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말을 이어가던 케인은 갑자기 끔찍한 두통을 느끼며 몸부림쳤다.

    “머리, 머리가! 아아아악!”

    “시끄럽구나.”

    프리비아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자 그는 몸부림을 치던 자세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잠해진 그의 코에서 두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흑마법으로 엮은 금제에 걸렸군. 저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족장 스텔라는 슬픈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어릴 때부터 부족의 안전을 책임지던 긍지 높은 전사였습니다. 십 년 전 저를 이어 족장이 될 제 조카, 타니아가 크레센트에 의해 납치되었을 때 그 아이를 구하겠다 자원한 사람이었어요.”

    뭔가 기구한 사연이 나올 것 같자 프리비아가 귀찮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래서 네년은 네펜이라는 놈의 위치를 아느냐, 아니면 모르느냐?”

    ‘아니, 그거 듣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은근히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던 필립은 조금 실망하며 스텔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펜. 그의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은신처가 있고, 저는 그중 세 곳만을 겨우 알아냈으니까요.”

    족장 스텔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필립은 프리비아의 짜증이 임계점을 돌파하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결국, 이놈은 네게 거짓을 말했구나.”

    그녀가 케인을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이자 스텔라가 급히 끼어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방법은 있습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네펜은 항상 저를 노렸습니다. 그 저주받을 마족은 저를 자기 하녀로 부리기 위해 이십 년 동안 흑묘족을 노렸습니다. 제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는 분명 나타날 겁니다.”

    필립은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묘한 의지로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세우던 계획이 있었는데, 우리가 나타난 김에 도박수를 던질 생각인가?’

    그녀에게도 사연이 있던 만큼, 지금껏 계획해 온 일이 있을 것이었다.

    ‘다음 대 족장이 납치를 당했고, 부족 전체가 크레센트의 시선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피해 있는 상황이라.’

    필립이 만일 족장이었다면 모조리 때려치우고 싶었을 터였다.

    “…이놈이고, 저년이고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기에 그저 이용할 생각뿐이군.”

    프리비아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필립은 다급히 그녀를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어차피 저를 돕기로 하신 것 아닙니까?”

    “내 목적은 네놈을 돕는 게 아니라 그 네펜이라는 추잡한 인큐버스를 먼지로 만드는 것뿐이다. 네 방식에 내가 따라주는 건 단순한 호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내 호의를 너무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필립은 그녀의 경고가 의미하는 걸 알아차렸다.

    ‘귀여워서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라는 말이군.’

    자신을 단순한 도우미로 여기지 말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필립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제가 당신을 도울 날이 올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날이 온다면 저도 대가 없이 프리비아 님을 돕겠습니다.”

    그 말에 프리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 네가 월광검을 대성한다면 그럴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래서 흑묘족의 족장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스텔라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대답했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모아 크레센트의 본거지를 습격하겠습니다. 그러면 네펜은 분명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어택땅을 찍겠다는 그녀의 계획에 필립은 생각했다.

    ‘이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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