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 * *
필립은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그가 당당히 걸어 올라가자 네리아가 물었다.
―주인님. 변장 같은 건 안 해요?
“내가 변장을 왜 해?”
―그거야 이런 걸 몰래 조사하려면 당연한 거….
“몰래? 누가 몰래 조사한대? 그냥 들어가서 보면 그만이잖아.”
―…뭔가 재미없네요.
아카데미에서 교관의 권한은 생각보다 더 컸다. 금지 물품 수색을 명분으로 기숙사를 수색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비록 허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필립은 선조치 후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 조사 대상은 1학년 남학생 킬리안 발비온.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형.
말수도 없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수업 내용은 착실히 따라오고 있는 학생이었다.
‘의심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양심에 걸리는 것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빠르게 결백을 증명해 주는 편이 킬리안에게도, 필립에게도 훨씬 나았다.
킬리안의 방은 506호였다.
문 앞에 선 필립은 안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어흑… 으흐흑… 올리비아….”
그러자 한 소년이 책상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오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소년은 분명히 킬리안 발비온이었다.
당황한 필립이 물었다.
“…저기, 너 뭘 하고 있니?”
“으악! 누구세요?”
킬리안 발비온은 그제야 필립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교, 교관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학생들이 지내는 공간이 안전한지 수시로 확인하는 건 교관에게 당연한 일이지. 그보다 왜 울고 있었니? 내가 도울 일이 있나?”
필립의 질문에 킬리안은 고개를 급히 저었다.
“아니요… 크흑…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러면 이만.”
“잠시만요, 교관님! 사실 있습니다!”
필립이 떠나려 하자 킬리안이 재빨리 달라붙었다. 필립은 그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뭘 도와주면 되겠니?”
킬리안은 큰 결심을 마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교관님… 사실 제가 어제 누에스 양에게 고백했거든요.”
“누에스? 올리비아 누에스?”
필립은 킬리안이 말한 소녀를 떠올렸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남작 가문의 영애.
분명히 소년들의 환심을 살 만큼 예쁜 아이이긴 했지만 지금 시점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학기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넘었는데 벌써 고백을 박는다고?’
어린 학생들의 행동력은 때때로 어른의 상식을 벗어나곤 했다. 필립은 감탄이 어린 시선으로 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저 소심한 학생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화끈할 줄은 몰랐다.
“…네. 그 누에스 양이요. 교관님께선 참관 수업 때 말씀하셨죠. 연애 상담의 전문가시라고요.”
‘그건 그냥 한 말인데.’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랬지.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너는 이미 실패한 모양이구나.”
“그,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벌써 소문이 난 건가요?”
“성공했다면 내 도움이 필요할 리가 있나.”
“그건 그렇네요.”
킬리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코를 훌쩍였다.
“…준비한 말을 모두 할 기회도 없었어요. 그녀는 제가 뭘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을 끊고 ‘미안한데, 아직 연애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서.’라고 말하곤 그냥 가 버렸죠.”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올리비아 누에스는 나이답지 않게 똑 부러지고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할 줄 아는 소녀였기에 그런 반응이 돌아왔다고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왜 암살자 찾으러 와서 연애 상담을 하고 계세요?
네리아가 물었다. 필립은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그녀의 손잡이에 딱밤을 한 대 먹였다.
―아얏! 너무해요!
“먼저 물으마. 올리비아 누에스와 단둘이 대화한 적이 있었니?”
필립이 묻자 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가 보기엔 너는 그 애와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던데, 첫눈에 반해서 고백한 건가?”
깜짝 놀랐다는 듯 헉, 하고 숨을 삼키며 킬리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거절당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잘 생각해 보렴.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그 애가 너와 사귈 이유가 없지 않을까?”
“…왜죠?”
“너는 그 애를 왜 좋아하는데?”
“지난주에 있었던 인문학 수업에서…….”
킬리안은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인문학 교수가 아파서 숙제를 못 낸 학생을 혼내는 도중, 올리비아 누에스가 대신 나서서 그 학생을 두둔해 줬다는 이야기였다.
“…그 당차고 똑똑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래서 고백했고?”
“네. 용기를 내서 고백하면 제 용기를 알아줄 것만 같았죠.”
설명을 모두 들은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일단 얘는 암살자가 아니군.’
학생으로 변장한 암살자가 의심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라 보기엔 너무도 멍청했다.
“그건 용기를 보여준 게 아니라, 네가 경솔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네 장점을 그 애 앞에서 드러내다 보면, 그 아이도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네가 생각하는 네 장점은 뭔데?”
그래도 필립은 성의 있게 상담에 응하려고 했다. 킬리안은 잠시 곰곰이 생각한 뒤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제 장점… 말인가요? 딱히 생각이 안 나요.”
“넌 그냥 져라.”
“네?”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일단 네 장점부터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올리비아 누에스, 그 애가 네 장점을 보고 널 좋아할 수 있도록.”
필립의 마지막 말에 킬리안은 뭔가 크게 깨달은 듯 표정이 환해졌다.
“…교관님 말이 맞아요.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아카데미 생활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열심히 노력해 보렴.”
필립은 그렇게 말하곤 방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의심을 쉽게 거두어도 되는 거예요?
네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연기력이 저 정도라면 아카데미에 파견될 게 아니라 제국의 궁전으로 파견됐겠지. 그리고 딱히 이상한 기색은 못 느꼈어. 가진 마력도 평범한 것 같았고. 만약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면 한 번 더 살피긴 해야겠지만.”
―하여간 요즘 애들은 진짜 발랑 까졌다니까요. 아카데미에 왔으면 공부를 할 생각을 해야지, 벌써 연애질이나 할 생각을 하니 지금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인 거예요.
“아, 그래. 그렇겠지.”
필립은 대충 대답하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두 번째 후보 학생인 ‘콜린스 체임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504호에 들어간 필립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콜린스 체임버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착실하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짐이 무슨 책하고 옷밖에 없대요? 쟤는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나 몰라요.
네리아의 감상을 들으며 필립은 다음 장소로 향했다.
‘느낌이 쎄한데.’
이 암살자 이벤트는 원래 게임의 난이도에 따라 내용이 바뀌었다.
쉬움에서 어려움 난이도까지는 암살자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암살자 또한 수준이 낮았으나 진정한 고인물의 난이도인 ‘리얼리티’부터는 주인공의 무력 수준으로는 이길 수 없는 암살자가 등장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여자 기숙사까지 돌아본 필립은 곧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일이 좀 꼬였는데.”
―…이러면 어떻게 해요? 암살자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건 아니야. 암살자는 무조건 있어.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
필립은 곧바로 아카데미 외부, 상점가로 향했다. 새 계획을 실행하려면 검은색 옷이 필요했다.
* * *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필립은 네리아를 챙겨 아카데미 대광장에 자리한 높은 시계탑으로 향했다.
시계탑은 기숙사 건물을 기준으로 6층 높이였고, 어지간한 농장 정도의 넓이였다.
‘내가 아는 게 맞다면, 분명히 여기가 은신처겠지.’
이곳은 본래 학생의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었다. 이 세계의 시계는 고도의 마법이 축약된 그야말로 초고가품이었기에 잘못 건드렸다간 금화 수천 개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주인공으로 플레이한다면 온갖 사전 작업을 거쳐 순찰을 도는 경비병의 시선을 돌린 후에야 들어올 수 있었으나, 교관인 필립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 교관님. 꼭 시계탑에 들어가셔야만 합니까…?”
아카데미의 야간 경비를 책임지는 경비병, 소론은 불안한 눈빛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아니, 검술 교관이 왜 여기 들어오겠다는 거야?’
아카데미에 근무한 지 3년이 된 그는 시계탑에 들어가겠다는 검술 교관을 처음 겪었다.
“문제가 생기면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만일 절 들여보냈다고 해서 불이익이 생기게 된다면 그 또한 책임을 지고 당신을 유세프 상회에 추천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필립이 자신 있게 장담하자 경비병 소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시계탑 입구를 열었다. 애초에 그에겐 교직원의 출입을 말릴 권한이 없었다.
시계탑에 들어선 필립은 내부를 살폈다.
알 수 없는 기계장치와 마법적인 장치가 가득했다.
이런 시계탑은 어지간한 마탑에서도 가지기 힘든 시설이었으나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장은 대대로 대현자라 불리는 인물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일 터.
―이제 여기서 그 암살자라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 그게 꼭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필립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 시계탑 꼭대기에 도달했다.
아마도 마법사들만이 그 용도를 알 수 있을 법한 계기판이나 장치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한데.’
인기척을 최대한 숨길 수 있을 만큼 조용하고 구석진 장소를 찾던 필립은 곧 완전히 그림자로 가려진 기둥을 발견했다.
“여기가 좋겠군.”
필립은 그 기둥의 뒤편으로 이동해 미리 챙겨 온 침묵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페렉 교관을 방문해서 얻어낸 스크롤이었다.
―그런데 주인님, 만약 그 암살자가 오늘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네리아의 질문에 필립은 떫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하기는? 내일도 여기서 밤새 이러고 있어야지.”
―그게 맞아요?
“원래 잠복근무라는 게 다 이런 식이야. 나올 때까지 버티는 거지. 제발 빨리 나타나기를 너도 함께 빌어 주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필립은 크레센트의 암살자가 오늘 등장할 거라고 확신했다.
리즈리엘이 아카데미에 보호를 요청한 사실을 지금쯤이면 알아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은신처로 쓰고 있는 이곳에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타날지 모르니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앉을 수도 없었고, 코가 간질거려도 재채기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뒤, 날벌레조차 찾지 않는 시계탑 꼭대기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오옹~”
그 누군가의 정체는 까만 고양이였다.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 고양이는 필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야옹이다. 주인님. 저기 봐요. 고양이에요. 귀엽기도 해라.
네리아가 꺄르륵 웃으며 좋아했지만 필립은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침을 삼켰다.
저 고양이야말로 필립이 기다리던 암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