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 * *
방금 목욕을 마친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흐흥, 흥흥흥~”
리즈리엘 유세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물로 젖은 몸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그녀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계승권 싸움에서 꼴찌로 밀려났던 그녀에게 찾아올 미래는 본래라면 매우 잔인한 것일 터였다.
운이 없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을 당했을지도 몰랐고, 운이 좀 좋으면 최고급 살롱에 접대부로 팔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손에 최강의 패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 사실만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언니, 오빠. 너넨 황금 인장 없잖아요. 그러면 뭐 지셔야지.’
그녀는 꼼꼼히 물기를 닦으며 손가락으로 몸에 붙은 군살을 확인했다. 너무 마르지도, 통통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을 딱 적당한 몸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만큼 완벽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꽤 노력하는 편이었다.
‘비록 이걸 써먹어야 할 사람은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이지만.’
필립 오스왈드.
황금 인장의 주인이자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
그를 잘 유혹한다면 리즈리엘은 훨씬 쉽고 빠르게 유세프 상회의 실권을 틀어쥘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립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에게 전혀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딱히 그런 관계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으나 이왕이면 조금 더 가까워지는 편이 좋았다.
아쉬운 쪽은 언제나 리즈리엘이었고, 필립은 그녀와 잡은 손을 놓고 다른 유세프에게 황금 인장을 위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를 조금 더 단단히 붙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사적인 감정을 위해서라도 관계의 진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어떻게 꼬시지?”
“네?”
마침 옷을 가져다주러 온 하녀가 되물었다. 리즈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네게 한 말은 아니야.”
“…그러세요?”
리즈리엘은 말없이 하녀가 내민 붉은색 나이트가운을 챙겨 입었다.
“응?”
그리고 그녀는 문득 옷에 뭔가 이상한 것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크게 박음질한 소매 사이에 얇은 종이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리즈리엘은 곧 소매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빼낸 뒤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손바닥 넓이의 종이를 몇 번 접은 것이었다.
비밀스러운 편지처럼 느껴졌기에 그녀는 그것을 펼쳤다.
“…이게 뭐야? 델린. 네가 이렇게 한 거니?”
하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아니에요. 제가 그런 장난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누구지? 내용이 좀 이상한데? 당신은 현재 우리 단체의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어 있으니…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세 번째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피하시오?”
편지의 가장 아래 부분에는 리즈리엘 또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문양이 있었다.
검은 초승달이 교차한 부분을 얇은 단검이 꿰뚫고 있는 형태였다.
그 문양을 본 순간 리즈리엘은 아직 몸에 남아 있던 열기가 단숨에 식는 것을 느꼈다.
“…델린. 정말, 정말 네가 한 거 아니지?”
하녀 델린은 리즈리엘의 안색이 창백해진 걸 확인하곤 울상을 지었다.
“정말 저는 아니에요. 아가씨.”
“차라리 너였으면 좋았을 텐데….”
리즈리엘 또한 울상을 지었다. 표정만이 아니라 정말로 울고 싶었다.
이 문양이 그녀가 아는 것과 같다면, 그녀는 지금부터 시한부 삶을 살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델린. 오늘 이후로 누군가 날 찾거든,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해 줘.”
리즈리엘은 망설임 없이 욕실을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나간 것이 아니라 창문을 뛰어넘었기에 하녀 델린은 비명을 삼켜야 했다.
“깜짝이야. 대체 왜 저러시지?”
* * *
필립은 자정을 조금 앞둔 시각 누군가의 방문을 받았다.
마치 귀신처럼 대문을 쿵쿵 두드려 대는 통에 하녀들이 전쟁이라도 일어난 줄 알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리즈리엘 유세프였다.
그녀는 얇은 나이트가운 한 장만 걸친 상태였는데,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온 것인지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나뭇가지나 이파리가 매달린 상태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그건 또 무슨 꼴이고?”
필립이 묻자 리즈리엘은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황금 인장에 내장된 문장은 어떤 모양이죠?”
필립은 그녀의 표정이 대단히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리곤 성실히 대답했다.
“푸른 용 모양이지.”
“저와 당신이 처음 만났을 때 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죠?”
“빨간 드레스에 모피 목도리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두 번째 대답까지 들은 리즈리엘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걸 봐 주세요.”
필립은 그녀가 웬 쪽지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당신은 현재 우리 단체의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어 있으니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세 번째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피하시오.
오래된 계약에 따라 당신을 향한 칼날을 최대한 막고자 노력하겠으나 그렇다고 당신이 안전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따로 연락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자중하시길.
“이건….”
필립은 익숙한 문양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센트의 문장’.
이 땅에서 가장 위험한 암살자들의 단체인 ‘크레센트’의 상징이었다.
“필립 당신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황금 인장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간 것 같아요. 당신에게서든, 혹은 제게서든지요. 이 상황까지 온 이상 정보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 형제나 자매 중 한 명이 내가 황금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게 중요하죠.”
필립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게? 크레센트의 암살 대상으로 지목됐으면 어디 갈 곳도 없을 텐데.”
암살자 집단 ‘크레센트’는 직접 대상으로 지목한 이를 반드시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 중에선 크레센트가 시가지를 행진하던 기사단장의 행렬 사이에서 귀족 한 명을 암살했다는 소문이나 추수절 행사가 한창이 가운데 행사를 주최하던 주교 한 명이 수많은 관중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거나 하는 것들도 있었다.
리즈리엘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필립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편지에서 지시하는 대로, 세 번째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에 몸을 숨겨야죠. 저 같은 경우에는 아카데미가 되겠네요. 저와 거래하는 그레이엄 학장님과 파노이 수석교수님께 보호를 요청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학장님이나 수석교수님을 만나는 순간까지는 내가 지키도록 하지. 급히 달린 모양인데, 조금 쉬도록 해.”
필립의 제안에 리즈리엘은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레센트의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필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물론 그는 당장 암살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답한 것이었다.
‘이 이벤트가 나왔다는 건, 아카데미 학생 중에 암살자가 있다는 건데.’
나름대로 무게 있는 서브 스토리 중 하나였기에 필립은 똑똑히 기억했다. 주인공의 시선이 닿는 범위 안, 그러니까 검술 수업을 듣는 1학년 중 크레센트 소속의 암살자가 있을 것이었다.
본격적인 암살 시도는 리즈리엘이 아카데미에서 학장 로셀로 그레이엄의 보호를 받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질 터였다.
“정말로, 진심으로 고마워요. 필립.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물론 리즈리엘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필립이 자신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려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해가 뜨는 대로 학장님과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해. 그때까지는 곁에 있어 줄 테니.”
“…네.”
리즈리엘은 홀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립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뒤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 *
“…뭐? 크레센트? 그 빌어쳐먹을 또라이 암살자 새끼들?”
이튿날 아침, 필립은 그녀와 함께 아카데미로 출근했다. 학장 로셀로 그레이엄은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그가 향할 곳이라곤 수석교수의 연구실뿐이었다.
에밀 파노이는 크레센트의 문양이 그려진 쪽지를 살피더니 혀를 찼다.
“아가씨도 참 고생이 많군. 하필 그런 미친놈들에게 걸리다니. 이유는 묻지 않겠지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구만.”
리즈리엘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프 상회 본점에는 이미 소식을 보냈습니다. 염치없지만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신변의 보호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수석교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장은 오후 늦게나 돌아올 테니 그전까지는 내 옆에 붙어 있도록.”
그만한 강자에게 있어 암살자의 습격은 그리 치명적인 위협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카데미 안은 생각보다 더 안전한 장소였다.
크레센트가 제아무리 막 나가는 암살자 집단이라도 권세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큰 사고를 칠 수는 없었으니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필립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은 리즈리엘에게 위로를 건넸다.
“생각보다 빨리 해결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나도 나름대로 힘을 써볼 테니까.”
그녀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석교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게 친해 보이는군. 무슨 사이지?”
필립은 곧바로 대답했다.
“친구입니다.”
“아, 그래? 뭐,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네는 그럼 수업 준비나 하러 가게.”
수석교수는 대충 알겠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필립은 리즈리엘과 눈인사를 나눈 뒤 수석교수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지금부터는 탐정 노릇을 할 시간이었다.
‘…그나마 맨땅에 머리를 박는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만약 아무런 정보도 없이 처음부터 암살자를 찾아내야 했다면 적어도 닷새는 투자해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필립은 이미 후보를 네 명 안쪽으로 특정한 뒤였다.
‘존재감이 없을 것. 말이 없는 성격일 것. 비교적 중성적인 체형일 것.’
학생으로 위장한 암살자는 보통 이 조건들에 해당했다.
게임 속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조사하려면 정해진 학사 일정에 따라 움직이면서 남는 시간에 탐색 활동을 해야만 했으나 필립은 현재 교관 신분이었다.
지금처럼 오전 수업이 없는 경우 몇 시간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오스왈드 교관. 여기 계셨습니까?”
“아. 교관님.”
그는 복도를 지나던 중 디아나 교관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펠리시아가 그를 호출했음을 알렸다.
“교수님께서 당신을 애타게 찾습니다. 정리할 서류가 책상 한가득 쌓여 있는 것 같던데, 처리를 좀 도와달라고 하시더군요.”
필립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은근한 목소리로 디아나에게 속삭였다.
“지금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절 못 봤다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디아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터였고, 펠리시아는 삐질 것이 분명했으나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 더 중요했다.
디아나는 별일이라는 듯 필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고생하십시오.”
필립은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첫 번째 후보의 자취를 따라 학생 기숙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