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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23화 (23/119)

023화

* * *

필립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저항했다.

여기서 저 드래곤의 말대로 외딴섬에 갇혔다간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월광검을 대성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야기 좀! 잠깐 이야기만 좀 들어보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드래곤 프리비아는 미간을 좁혔다.

“날 설득할 셈이냐?”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이해시키려는 겁니다. 이건 저와 당신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 잠깐 이야기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별난 놈이군.”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기보다 고작 몇 년의 격리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프리비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마법을 해제한 뒤 필립을 땅에 내려놓았다.

“앞으로 단 한 문장을 허락하마. 그 한 문장으로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기회는 없느니라.”

그 청천벽력 같은 통보에 필립의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데?’

살아난 건 기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월광검’을 익혔을 때 드래곤의 주목을 받게 될 줄 알았다면 필립은 망설임 없이 포기했을 터였다.

‘뭔가 정보를 내놓아야 하는데. 밝힌다고 해도 최대한 변수를 줄일 수 있으면서 저 드래곤이 날 가두지 않을 만한 정보를.’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답이 없군.’

그리고 필립은 깨달았다. 위험 부담을 아예 감당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결심을 마친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먼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제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드래곤이 인간에게 속겠느냐? 쓸데없는 걸 묻는구나.”

필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그러면 간단히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없으면 당신은 죽고, 세상은 망합니다.”

프리비아는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흠칫 놀란 그녀가 필립을 관찰했다. 그는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드래곤을 앞에 둔 것 치고는 매우 침착했다.

고등한 정신을 지닌 드래곤에게 인간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생체적인 반응은 물론이고 영혼의 울림마저 관찰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필립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일단 눈빛부터 불온하기 그지없었다.

경외나 두려움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고 오직 귀찮음과 짜증, 그리고 약간의 연민이 엿보일 뿐이었다.

‘연민? 날 불쌍히 여긴다고? 감히 인간이?’

이건 마치 그가 프리비아의 미래를 정말로 알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필립을 윽박지르길 포기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 드래곤은 속이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종족이었다.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지능을 지녔고, 기본적으로 마족을 제외한 지성체에게는 그리 공격적이지 않았기에 원작에서는 일반 NPC와 똑같이 취급되었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고, 정해진 대사만 내뱉는 종족.

먼저 둥지에 침입하거나, 선공을 가하지 않는 한 딱히 뭘 하려고 들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월광검을 익혔다고 이렇게 엮인다고?’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연결고리였다.

필립은 문득 만사가 귀찮아졌다.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온갖 변수가 튀어나와 그를 괴롭히는 상황.

곧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만 묻지. 너는 내가 죽는다고 했는데, 어떤 식으로 죽게 되나?”

생각을 마친 프리비아의 질문에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세상이 망하는데 당신이라고 살겠습니까? 뭐 어떻게든 죽겠죠. 사실 증거 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그저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뭐 어쩌실 겁니까?”

“….”

‘지혜의 은룡’이라 불리는 드래곤 프리비아는 천 년을 살아오며 깨달은 지혜를 보유한 존재였다.

비록 인간의 몸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지혜를 모두 이용할 수 없었으나, 사실 지금의 필립을 본다면 누구나 같은 판단을 내릴 터였다.

‘미친놈이군.’

그녀는 필립의 눈빛에서 묘한 광기를 읽어냈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그 어떤 광인보다도 더 끔찍한 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를 그런 기운.

머나먼 과거에 그녀는 그와 같은 눈을 본 일이 있었다.

‘검의 천재라는 것들은 다 비슷한 눈을 하고 있지. 이놈도 예외는 아니구나.’

“…네 마음대로 하라.”

프리비아는 일단 한 수 접어 주리라 결심했다.

월광검의 계승자에게 필요 이상의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인류의 광기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질리도록 겪었다.

“네가 데리고 있던 계집애들은 이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로 통하는 포탈을 열어줄 테니, 얌전히 기다리도록.”

그녀는 주문도 없이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고, 필립의 앞에 푸른 포탈이 생겼다.

‘갑자기 친절해졌는데.’

“감사합니다.”

필립은 고개를 갸웃하며 포탈을 통과했다.

그가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 곧 정신을 잃은 쟈니스와 셰릴이 갈대밭 위에 누워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더럽게 힘들군.”

정신적인 피로감이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 탓에 멘탈이 꽤 많이 흔들렸다는 걸 스스로 자각할 정도였다.

“으으음….”

쟈니스와 셰릴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던전 안에서 묻은 흙먼지와 눈물, 그리고 콧물이 그녀들의 예쁜 얼굴에 말라붙은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이 소녀들의 관계는 정신이 든 이후엔 조금 달라질 것이었다.

쟈니스는 온갖 부끄러운 모습을 셰릴에게 보였으니 그녀를 조금은 어려워할 터였고, 그에 따라 셰릴 또한 쟈니스를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필립은 희미하게 웃었다.

갑자기 루아가 보고 싶었다.

* * *

필립과 셰릴, 그리고 쟈니스는 아카데미에서 급히 파견된 구조대에 의해 고작 한 시간 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쟈니스는 정신적인 충격이 컸는지 무르엘라 가문에서 며칠 정도 쉬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놀랍게도 셰릴을 데려가고 싶다 말했다.

그들이 들어갔던 던전에는 마법 학부의 교수 두 명이 파견되었다.

교수들은 던전을 조사하며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려 할 테지만, 필립은 그 던전에 더 조사할 구석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인스턴트 던전일 텐데.’

다크 슬라임은 완전히 녹아 사라졌을 테고, 뱀파이어는 드래곤 프리비아의 용언 마법에 재가 되었으니 아무것도 나오는 건 없을 터였다.

한편 필립은 휴가를 신청하고 별장에 틀어박혔다.

이제 주말 동안은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었다.

이 황금 같은 주말을, 필립은 루아와 보낼 거라고 마음먹었다.

이틀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그는 루아의 방으로 향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거의 열흘 동안 루아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기에 단단히 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주처럼 꾸며진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루아가 보였다.

그녀는 이 커다란 저택에 완전히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자니?”

“네, 자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묻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히 완전히 삐지지는 않았군.’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가 들어왔을 때 급히 자는 척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잔다고? 정말? 주말에 숲으로 소풍을 나가자고 말할 참이었는데, 자고 있다면 없던 일로 해야겠는걸.”

필립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루아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정말요?”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니?”

“하지만… 교관님은 바쁘시잖아요.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는 없는데….”

잠깐 눈을 빛내던 루아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필립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곤 했다. 해가 완전히 진 한밤중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루아와 억지로라도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 걸 그녀가 모를 수는 없었다.

필립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보다 계획이나 짜보자꾸나.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질 무렵에 돌아오면 되겠지. 네가 원한다면 숲에서 하루 정도는 밤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고. 낚싯대도 들고 갈까? 낚시는 해 본 적 있니?”

루아는 그제야 필립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곤 환하게 웃었다.

좋은 집도, 맛있는 음식도 다 좋았으나 태어나 평생을 보냈던 자연보다는 편하지 않았다.

“정말 가는 거예요?”

“그럼.”

“정말 정말요?”

“그렇다니까.”

필립이 확답을 해 주자 루아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필립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나가는 건데.’

필립은 후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 한 달 동안에는 꽤 많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바빴기에 시간을 따로 뺄 수 없었다.

그는 하녀들에게 도시락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아암.

네리아의 손잡이를 잡자 잠들어 있던 에고 소드에게서 하품 소리가 들렸다.

―흐아아아암… 잘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두 번 정도 죽을 뻔했던 걸 빼면 잘 다녀왔지.”

―네에? 죽을 뻔했다고요? 세상에, 무슨 드래곤 레어라도 다녀오셨어요?

“드래곤 레어는 아니었지만, 드래곤을 만나기는 했어. 프리비아라고, 아카데미의 설립에 관여한 드래곤인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리아가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지금껏 주인님이랑 지내면서 느끼는 건데, 주인님은 네리아를 바보로 보는 것 같아요. 자꾸 그러시면 주인님이 아무리 잘생기셨어도 못 참을지도 모른다구요!

“아니, 정말이라니까? 일단 내 얘기나 좀 들어 봐.”

필립이 실습에서 일어난 사건을 시간순으로 모두 설명하자 네리아는 크게 감탄했다.

―어쩌면 운이 그렇게 없어요? 우연히 들어간 던전에서 뱀파이어를 만났다구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

―그래도 드래곤을 만났다는 건 아무래도 믿기 힘들어요. 그 게으른 족속들이 뭐가 아쉽다고 주인님 목숨을 구해 준대요?

“진짜라니까?”

필립은 침대에 누운 채 네리아와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튼, 앞으로는 꼭 네리아를 데리고 다니란 말이에요. 네리아였으면 그런 나약한 검처럼 녹아서 구부러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명심할게.”

그녀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잘 오는 기분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곧 잠이 몰려들었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마음마저 편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그래. 너도 잘 자렴.”

―…네리아는 주인님이 깨우기 전까지 잘 자고 있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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