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 * *
교류 대련이 끝나고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었기에 필립은 출근하자마자 학부실에 틀어박혔다. 적당히 업무를 처리한 뒤 퇴근할 생각이었다.
교수도 아니고 고작 교관 업무는 필립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업무라고 해 봤자 훈련 교재 상태를 확인하는 것, 혹은 학생들에 관한 특이사항을 정리하는 것 정도.
집중하면 두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평소 들고 다니던 수첩을 펼쳐 그곳에 메모한 것들을 서류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오스왈드 교관.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연구실로 오라는 말 못 들었어?”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였다. 그녀는 학부실에 필립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교관한테 널 좀 호출해 달라고 했는데, 혹시 안 왔니?”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안 왔는데?”
“정말?”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 어차피 할 일도 별로 없었고, 누나가 날 부르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라도 곧바로 갔을 텐데.”
필립의 말을 듣던 펠리시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그래?”
“하론 베이브. 그 사람 정말 안 되겠어. 분명히 널 불러달라고 지시했는데….”
하론 베이브 교관은 일전에 필립과 시비를 붙었던 교관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이런 일을 벌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펠리시아는 손가락을 세워 필립의 어깨를 콕 찔렀다.
“네 잘못이야. 필립. 그때 나한테 혼날 각오를 하고서라도 몇 대 때렸어야지. 괜히 봐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그렇게 말하니 정말 내 잘못 같잖아. 그런데 왜 날 찾은 거야?”
“3학년 야외실습에 따라갈 검술 교관이 필요한데, 학부에서 오늘 수업이 없는 학년은 우리뿐이잖아.”
“야외실습? 아, 이번에 발견된 던전을 말하는 건가.”
연구와 이론 공부가 대부분인 마법 학부의 수업에서 말하는 야외실습이라면 던전 탐사밖에 없었다.
“응. 호수 너머에서 새로 발견된 곳 말하는 거야. 마법 학부의 이벨린 교수님이 지난주에 답사를 다녀오셨거든? 별로 위험한 건 없고, 간단한 함정 몇 개하고 고블린이나 스켈레톤 같은 가디언 몬스터 몇 마리만 있는 모양이야.”
“내가 거길 따라가면 되는 건가?”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쪽 교관들이 잘 알려주겠지만, 그냥 애들 하는 걸 지켜보다가 위험할 것 같을 때만 나서면 돼.”
“별 건 아니네. 어디로 가면 되나?”
“마법 학부실에 가면 지금쯤 다들 준비하고 있을 거야.”
“그래. 갔다 올게.”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했다. 펠리시아가 말한 만큼 낮은 수준의 던전이라면 갑옷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학부실을 나서려 하자 펠리시아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왜?”
“…그냥, 잘 다녀오라구. 사고 치지 말고. 알았지?”
‘하여간 귀엽단 말이지.’
“고작 고작 하급 던전 하나 다녀오는 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러면 다녀올게.”
필립은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학부실을 나섰다.
마법 학부는 한창 실습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정갈하고 미니멀한 검술 학부실의 내부와 달리 마법 학부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어지러웠다.
온갖 마법 도구와 읽다 만 책 따위가 책상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 필립 교관님… 교관님께서 실습에 함께하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필립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그와 함께 당직 근무를 섰던 페렉 교관이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잠깐만, 프리실라 교관. 던전 실습에 백열탄 주문서는 왜 챙기는 겁니까? 던전 안에서 그거 터트리면 학생들 다 죽어요! 당장 그거 치우세요!”
“아… 죄송합니다!”
페렉 교관의 일갈에 로브를 입은 여자 교관이 울상이 된 채 허둥거렸다. 예쁜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맹한 기운이 엿보이는 외모였다.
‘뭔가 이미지가 다른데?’
필립이 아는 페렉 교관은 조금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후배 교관을 혼내는 모습을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 보였다.
“소리를 질러서 죄송합니다. 교관님. 프리실라 교관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분인데,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 정말이지 눈을 뗄 수가……아니, 제발 필요한 걸 챙기세요. 함정류 마법은 던전에서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부탁인데 제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페렉 교관은 두통이 이는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정말 죄송해요. 교관님. 그, 금방 준비할게요!”
필립은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저건 페렉 교관의 성격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의 후배 교관이 지나치게 서툴 뿐이었다.
“안 되겠군요. 저도 붙어서 빨리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교관님.”
필립은 그러라고 말한 뒤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 * *
마법 학부의 야외실습은 보통 대여섯 명 정도 묶어서 차례대로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협소한 던전이나 이동이 편하지 않은 유적 같은 경우 서른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마법 도구가 담긴 배낭을 대광장에 도착한 마차에 실었다. 페렉 교관은 드디어 한숨 돌리겠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관님.”
“뭘 이런 것 가지고요. 그보다 아이들은 언제 도착합니까?”
“프리실라 교관에게 데리고 오라 했으니 아마 금방 올 겁니다.”
페렉 교관은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정말이지, 저는 절대 누군가에게 짜증을 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에는 절대라는 게 없더군요. 저도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걸 압니다. 그녀를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프리실라 교관은 점점 더 움츠러들 겁니다.”
“처음부터 뭐든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프리실라 교관님도 점점 익숙해질 겁니다.”
필립은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페렉 교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제 몸에 먼저 병이 생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중풍이든, 간질이든…어쨌든 끔찍한 병 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 멀리서 학생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학생 세 명에 여학생이 둘이었다.
마법 학부, 그것도 3학년생들은 필립과 직접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중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저건… 셰릴인데?’
동그란 안경을 쓴 곱슬머리 소녀는 필립을 발견하자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페렉 교관은 학생들에게 문제가 없는지 눈으로 확인한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프리실라 교관은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대답한 건 한 남학생이었다.
“두고 온 게 있으시다고, 저희끼리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잠깐 기다리도록 하죠. 아, 마차를 타고 한 시간은 넘게 움직여야 하니 다들 멀미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마치 고장이 난 인형처럼 미소를 억지로 입에 건 채 페렉 교관은 학생들이 대광장 벤치에 앉아 기다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능숙하고 깔끔한 대처였다. 여기서 그가 짜증이라도 냈다면 프리실라는 교관으로서의 권위를 꽤 잃었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프리실라 교관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대광장에 도착했다.
“자, 여러분. 이제 출발합시다.”
페렉 교관이 출발을 선언했다. 그는 학생들을 마차에 태운 뒤 필립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학생들과 같은 마차에 탈 테니, 교관님께서 짐을 실은 마차를 프리실라 교관과 같이 타고 와 주십시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간 또 화를 낼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교관님께선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필립은 어쨌든 상관없었다. 프리실라 교관은 페렉 교관의 후배이지 자신의 후배가 아니었으니까.
그와 프리실라 교관이 탈 마차는 여객용이 아닌 짐마차였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어차피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이니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먼저 마차에 오른 필립이 프리실라 교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올라오십시오.”
“아… 으… 그게, 감사합니다.”
프리실라 교관은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곧 학생들과 페렉 교관이 먼저 탄 마차가 출발했고, 필립이 탄 마차도 그 뒤를 따랐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딱히 의자 같은 것도 없었기에 필립과 프리실라는 상자 위에 걸터앉아야 했는데 마차가 크게 덜컹거릴 때마다 필립은 프리실라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아윽!”
“…괜찮으십니까?”
“아… 네, 저는… 괜찮아요.”
그녀의 말문이 열린 김에 필립은 대화를 조금 더 길게 이어갈 생각이었다. 한 시간을 멍하니 앉아만 있기엔 너무 지루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교관님의 나이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저와 비슷한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두 살이에요.”
“저와 나이가 같으시군요.”
“교관님도… 스물두 살이신가요?”
그녀의 말투는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충분히 답답할 수도 있었으나 필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저와 친하게 지내시죠. 마침 저도 교관님처럼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니 저희는 통하는 게 많을 겁니다.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부터 친구로 지내죠? 서로 고민도 나누고 힘든 일이 있으면 의지도 하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네에… 네?”
‘마침 잘됐군.’
어차피 마법 학부 쪽에도 정보통이 하나 있어야 했으니 그녀와 친해진다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잘만 꼬드기면 뭐든 말해 줄 것 같은 인상이지 않은가.
프리실라와 같은 사람에겐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걸 필립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가 우물쭈물 망설이자 서운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싫으십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프리실라는 결국 필립의 손을 잡았다. 필립은 그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고, 위화감은 금방 사라졌으나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기, 교관님?”
프리실라가 부르는 소리에 필립은 정신을 차리곤 그녀의 손을 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뭐였지?’
필립은 그녀를 다시 살폈으나 별다른 기색은 느끼지 못했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오물거리는 입술은 아무리 봐도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그녀에게 뭔가 숨겨진 게 있다면 필립이 모를 확률은 낮았다. 애초에 프리실라 교관은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은 말을 놓아도 되느냐고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된다면….”
그는 친밀도를 올리기 위해 대화를 이어 가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용의 뿔피리’를 가장 먼저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혹시 모를 일이기는 해. 솔직히, 아카데미의 교관인데 게임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건 좀 수상하기도 하지.’
‘용의 뿔피리’는 모든 물건과 사람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아티팩트였다. 만일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정체 그 자체일 확률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