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 * *
필립이 건넨 검은 레이피어처럼 얇았고, 의장에 쓰이는 물건처럼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건 왜?”
“그 검에는 정령이 깃들 수 있습니다. 아직 이름은 없으니 교수님께서 지으시던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검에서 자연력이 느껴집니다.”
멀리서 검을 살피던 에포넬이 말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검은 원래 메인 빌런 중 하나인 ‘정령공주 사피나’의 손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녀는 불과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마음대로 부릴 만큼 뛰어난 정령사였고,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검사이기도 했다.
후반부에는 주인공 또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동료들 또한 그 언저리까지는 도달하기 때문에 최상급 정령사든 오러 마스터든 그리 어렵지 않게 격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펠리시아가 들고 있는 저 검이 사피나를 끔찍한 괴물로 만들게 된다.
정령의 힘과 오러를 융합해 새로운 힘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걸 올슨이 팔고 있었다니. 이만한 행운도 드물지.’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용법을 설명했다.
“정령에게 부탁해 그 검에 깃들도록 한 뒤 마력을 불어 넣어 보십시오.”
지금의 필립에게선 거역하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게 느껴졌기에 펠리시아는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어……응. 여기 잠깐만 들어가 줄래?”
―시 러
그리고 곧바로 거절당했다.
“하하, 정령들은 계약했다고 해서 곧바로 힘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서로 친해지고,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기꺼이 도움을 줄 겁니다.”
정령사 에포넬이 웃으며 설명했다. 필립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 혹시 보통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필립의 질문에 에포넬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시큐론은 5년이 지나서야 제게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2년에서 3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도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엘프처럼 친화력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당장은 힘들 겁니다.”
‘아니, 그걸 진작 말했어야지.’
어이가 없어진 필립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령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 됐어.’
그는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필립이 선물한 검을 어색하게 든 채 이그니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수한 정령답게 늑대의 모습이라고 해도 눈매가 선하고 순해 보였고, 펠리시아는 그 복슬복슬한 불꽃 늑대에게 푹 빠진 듯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 어때.’
필립은 손을 떨며 웃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령사님.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지 저쪽 지부장을 통해 연락해 주십시오.”
“별말씀을.”
에포넬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떠나간 별장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도 상단 일이 바빠서 이만….”
침묵을 견디다 못한 리즈리엘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 * *
필립은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올려 두었던 네리아를 집었다.
―잘 자고 있었는데….
“있다가 더 푹 자고, 잠깐 이것 좀 봐라.”
―…뭔데 그러세요?
“내가 좀 깨달은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필립은 네리아의 손잡이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평소 오러를 형성할 때와 과정은 비슷했으나 본질적인 뭔가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앗, 차가워요!
‘성공이군.’
―…응? 어어? 왜, 이게 왜 차갑지? 주, 주인님 대체 뭘 하신 거예요?
네리아의 목소리에선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필립은 즉시 마력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마력의 성질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 같은데?”
―네에? 왜요? 아니, 어떻게요? 그게 되는 거예요?
“아까 정령을 보고 왔는데 걔들이 다루는 자연력도 근본적으로는 마력하고 다를 게 없더라고. 예를 들면 빛 같은 거지. 햇빛과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에너지에 속하거든.”
―…지금 일부러 제가 못 알아듣게 말하는 거 맞죠?
“너 말고 대마법사를 데려와도 이해 못 할걸. 어쨌든, 마력도 결국 실존하는 에너지인 이상 파장이라는 게 결국 존재하는데…….”
―꺄아아아아아악! 끼야아악! 에베베베벱!
네리아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필립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설명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 조금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네리아는 차라리 음담패설을 듣고 말겠어요.
“너 진짜 너무하다.”
잡담을 나누던 필립은 곧 복도를 걷는 인기척을 느꼈다.
‘올 것이 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이 별장에 있는 사람 중에서 노크 없이 문을 열 만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안녕, 누나?”
“….”
펠리시아 오스왈드의 방문이었다.
그녀는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필립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뭔가 단단히 각오한 듯 입술을 깨물며 결국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결국엔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니…?”
그녀는 말을 내뱉는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필립은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
그러자 펠리시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미안해할 거면서, 그땐 왜 그랬는데.”
펠리시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필립이 집보다도 더 오래 머무르던 살롱에 더는 가지 않는다는 것도, 학생들을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의 혐오 섞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을 만큼 바뀌었다는 것 또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정령 계약과 미스릴 검을 준비했는지 펠리시아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야.’
필립은 펠리시아가 실베르 나이트와의 대련에서 질 거라고 여긴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펠리시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긴 방황이 어쩌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필립에게 다가가 마치 관절기를 거는 것처럼 그의 목을 감으며 끌어안았다. 필립은 적잖이 당황하며 그녀와 포옹했다.
필립은 곧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변하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7년이나 이어져 온 남매 싸움이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 * *
펠리시아와 극적인 화해의 포옹을 나눈 뒤 필립은 먼저 뒷마당으로 돌아왔다.
실체화한 상급 정령을 유지하기엔 펠리시아의 친화력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기에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는 진작 역소환이 된 후였다.
‘…난 절대 포기 못 해. 그 녀석이 얼마짜린데?’
필립은 이를 악물며 최단기간에 이그니스를 써먹을 방법을 생각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대련에서 이길 다른 수를 내어야 했다.
“교수님과는 잘 화해하셨습니까?”
어느새 디아나 교관이 다가와 물었다. 필립은 그녀가 펠리시아의 등을 떠밀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예. 덕분에요. 언젠가 보답하겠습니다. 교관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기 불편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
잠깐 고민하던 필립이 디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련 한 판 어떠십니까?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필립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교관이 원한다면.”
둘은 곧 목검을 들고 마주 섰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필립 교관의 실력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어.’
디아나 파렌할은 자세를 잡은 필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롱소드 길이의 목검을 두 손으로 잡고 상대방의 중앙선을 노리는 자세였다.
특별할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관 수업 때 그가 보여준 기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디아나 또한 그걸 흉내 내 보려고 시도했으나 보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비슷한 현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기대되네. 뭘 보여줄까.’
“보여줄 게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먼저 들어오십시오.”
디아나가 목검을 까딱거렸다.
“잘 보십시오. 교관님.”
필립은 사양하지 않고 선공을 취했다. 검기를 덧씌운 목검이 천천히 움직였고, 디아나 또한 오러를 끌어올렸다.
“흡!”
기합과 함께 필립이 목검으로 디아나의 옆구리를 노렸다.
평범한 횡베기였기에 디아나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반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참격에 완전히 힘이 실리기 전에 방어하는 건 검술의 기초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방어를 해냈으나 뭔가 이상했다. 손목과 팔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이 느껴졌다.
“…어?”
저절로 시선이 움직였고, 그녀는 곧 확인할 수 있었다.
필립이 일으킨 검기가 맹렬히 회전하며 자신의 오러를 순식간에 깎아내는 모습을.
힘으로 버티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기에 그녀는 결국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
완벽한 패배였으나 그녀는 패배감이나 열등감 같은 건 느끼지도 못했다.
열 살부터 검을 잡아 올해로 17년.
그 긴 시간 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공격을 당한 그녀는 그야말로 얼이 빠져 있었다.
“어떻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방금 그것 말입니다. 원리가 어렵지는 않으니 이 정도는 교관님도 쉽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필립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손목을 붙들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아나가 정신을 차린 건 잠시 후였다. 그녀는 아직도 멍한 듯 초점이 조금 흐려진 눈으로 필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게 이걸 가르쳐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런… 대단한 비기를…?”
“오러를 회전시켜서 절삭력과 충격을 높였을 뿐입니다. 이건 비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죠.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제 누나 친구인데 못 가르쳐 드릴 건 또 뭡니까?”
디아나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비기가 아니면 내 건 뭔데?’
그녀에게도 물론 파렌할 가문에서 전해진 비기가 있었다.
그 이름은 ‘마엘스트롬’. 순식간에 여섯 번의 공격을 몰아치는 기술이었다.
물론 그 마엘스트롬과 같은 비기 스무 개가 있어도 방금 필립이 보여준 기술 하나와 바꿀 수 없을 터였다.
“설마, 직접 창안한 기술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창안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기술은 아니고, 제가 만든 건 맞습니다. 이름은… 대충 회전검이라고 하면 되겠죠. 혹시 이걸 할 수 있으면 실베르 나이트와의 대결에서 승산이 있겠습니까? 잡기술이긴 하지만 도움이 되긴 하겠죠?”
그의 말에 디아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뭐? 잡기술?’
필립이 나쁜 의도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건 느낌상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배알이 꼴렸다.
‘…재수 없어.’
자기도 모르는 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디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왜 저러지?’
필립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