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 * *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수석교수에게 불려갔다 돌아온 필립은 단단히 결심했다.
‘무조건 이겨야겠어.’
다른 이들은 패배하더라도 그만큼은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실베르 나이트 소속의 기사를 이긴다면 학장이나 수석교수는 그가 뭘 하던 내버려 둘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호감작도 좀 해야겠고.’
그는 펠리시아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이 두 명 모두 뭘 해볼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참담히 패배하게 된다. 그나마 오럼 나이트 출신인 컴벨 교수만이 접전을 펼친 끝에 패배할 뿐.
필립은 이들도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펠리시아는 그의 상관이었고 디아나는 그의 직장 동료이자 사수나 다름없었으니 이들에게 빚을 지워 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게 뻔했다.
“다들 제 집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게 어떻습니까?”
필립의 제안에 디아나 파렌할은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의논할 게 있습니까? 각자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수밖에…저희는 수업만으로도 바쁘지 않습니까.”
‘저러니 발리지.’
“실베르 나이트 기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들끼리 검을 섞으며 대련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쪽에서 제안한 대련이니만큼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단단히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펠리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과연 그녀가 동의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일이 개인의 감정을 개입시킬 만큼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 준비들 하시고 넘어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펠리시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겠어?”
디아나의 물음에 펠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펠리시아의 표정이 토라진 강아지처럼 바뀌었기에 디아나 파렌할은 시선을 회피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필립은 곧바로 리즈리엘을 호출했다.
그녀는 고작 이십 분만에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최고 등급의 정령석과 정령 계약을 주선할 수 있을 만한 정령사를 준비해 줄 수 있겠어? 이왕이면 지금 당장.”
그야말로 뜬금없는, 그리고 무리한 요청이었다.
최고 등급의 정령석은 그녀에게도 적잖이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정령 계약을 주선할 수 있는 정령사란 검사로 치면 오러 마스터 수준의 달인이었다.
‘…나를 무슨 마법 주머니쯤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이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
부아가 치민 리즈리엘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안….”
거절의 말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리즈리엘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될 것도 같았다.
“…되는 일이라도 되게 만들어야죠. 누구 부탁인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리즈리엘은 즉시 마차를 타고 돌아가 이번에는 삼십 분 뒤에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최고 등급의 정령석이 들린 채였고, 그녀의 옆에는 녹색 로브를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이게 왜 되는 걸까?’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정령석과 상급 정령사 에포넬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마침 최고 등급의 정령석이 지부 창고에 있었고, 친분이 있는 상급 정령사가 이 근처에 머무는 중이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리즈.”
진심으로 감탄한 필립이 그녀를 칭찬했다. 리즈리엘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정도는 별것도 아니에요.”
“아니, 정말 대단해. 이렇게까지 빠르게 준비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필립은 그녀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리즈리엘에게 큰 도움이 될 정보를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소개할게요. 상급 정령과 계약하신 에포넬 님이세요.”
상급 정령사 에포넬은 유약하고 선량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입에 건 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령과 계약하시려는 겁니까?”
목소리 또한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아니고, 제 가족의 계약을 부탁드리려고 모시게 되었습니다. 필립 오스왈드라고 합니다.”
필립은 정령과 계약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월광검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고, 말 많은 정령들의 수다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네리아의 수다에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가 더해지는 상상만으로도 정신력이 갈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습니까?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이런 뜻깊은 일에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립은 에포넬의 인성에 감탄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령사님.”
“별말씀을요. 실피드가 말하기를 당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당신도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겠죠.”
에포넬은 그렇게 말하곤 필립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펠리시아와 디아나가 필립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녀들은 응접실로 안내되었고, 하녀가 필립은 뭘 준비하느라 조금 늦는다고 설명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응접실을 구경하며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집이… 많이 좋은데. 펠? 네 동생과 빨리 화해하는 게 어때? 방도 많아 보이는데 너도 여기서 살면 되잖니.”
“언니는 요즘 왜 자꾸 걔 편을 드는 거야? 걔한테 빚이라도 졌어?”
“말을 왜 그렇게 하니? 난 그저 좀 답답했을 뿐이야.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필립 교관의 기분이 어떻겠어? 아무리 바뀌어도 너랑 화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하려고?”
그 말에 펠리시아는 흠칫했다.
아무래도 필립이 과거의 개망나니로 돌아가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슬슬 얌전해진 필립에게 적응이 되어 가려는 참이었다.
“필립 교관이 노력하는 만큼 너도 노력해야 해. 펠리시아. 지금부터라도 잘 대해 주려고 해보렴. 애초에, 넌 진심으로 화나지도 않았잖니.”
“….”
잠깐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어색한 공기가 맴도는 응접실에 루아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관님.”
펠리시아가 방긋 웃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 잘 지냈니?”
“네.”
“…너는 루아 아니니?”
디아나 파렌할은 저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상할 정도로 체력이 좋은 학생.
어쩌면 지구력만큼은 교관인 그녀보다도 훨씬 더 좋을지도 몰랐다.
슬퍼서 죽을 것 같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광장을 달리던 아이의 모습을 디아나는 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애가 됐잖아?’
뭘 어떻게 했는지 아이의 피부는 반질반질했고, 인상이 확 밝아졌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모습이 무슨 인형처럼 귀여웠다.
‘어떻게 한 걸까?’
물론 돈과 애정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필립이 그녀를 잘 대해 주냐고 물어보려던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표정과 안색을 보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교관님이 두 분 다 뒷마당으로 오시래요. 제가 안내할게요.”
그녀들은 루아를 뒤따라 별장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웬 녹색 로브를 입은 청년과 필립, 그리고 이전에 보았던 유세프 상회의 지부장 리즈리엘 유세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두 분 다 오셨습니까.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다니? 뭘?”
펠리시아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잘 가꾸어진 마당 한가운데 영롱한 빛을 내뿜는 돌 같은 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정령에 대해 무지한 펠리시아와 디아나는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아.’
리즈리엘은 속이 쓰렸다.
저 최고급 정령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잘 훈련된 군마 이백 필을 살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여유 자금의 2할은 넘는 돈이었다. 언젠가는 수십 수백 배로 돌려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일단 해보면 압니다. 교수님, 잠깐 이리로 와 보시겠습니까? 이거 좋은 겁니다.”
필립은 손자에게 보약을 먹이려는 할머니처럼 그녀를 꼬드겼다. 펠리시아는 당황해서 뒷걸음질했다.
“아…아니, 뭘 할 건지 이야기는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너, 갑자기 왜 이래?”
답답해진 디아나 프렌할이 펠리시아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필립을 향해 그녀를 끌어당겼다.
“교수님. 제 말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알았어! 잠깐만, 내 발로 갈게.”
그 모습을 보던 필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떠먹여 준대도 난리야. 하긴 처음보다는 많이 순해지긴 했지만.’
고작 며칠 전의 그녀였더라면 아예 이 별장에 찾아올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감동적인 발전이었다.
“시작하시죠. 정령사님.”
‘정령사?’
펠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겠습니다. 정령계로 통하는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실라이론, 시큐엘. 날 도와주렴.”
정령사 에포넬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그와 계약한 바람과 물의 상급 정령들이 곧바로 실체화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독수리와 물처럼 투명한 소녀가 정령석으로 날아가자 곧 폭발적인 자연력이 터져 나왔다.
‘어…이거?’
그때 필립의 뇌리에 뭔가가 번득였다. 자연력이라는 힘이 마력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식이었군.’
이제 월광검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에포넬이 정령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었다.
거대한 자연력에 이끌린 정령들이 통로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것을 필립은 볼 수 있었다.
“통로 너머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서열 싸움에서 이긴 정령이 계약하게 되겠죠. 아, 저기 보입니다.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군요.”
에포넬의 설명과 함께 온몸이 타오르는 불꽃에 휘감긴 늑대 한 마리가 통로를 비집고 나타났다.
“자, 아가씨. 당신의 동생이 아가씨에게 선사하는 인연입니다. 계약은 제가 도울 테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이그니스에게 다가가십시오.”
펠리시아는 평생 본 적 없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다가 에포넬의 말에 번득 정신을 차렸다.
“…네? 제가요?”
“빨리 가보십시오. 교수님. 저러다 정령 떠나면 유세프 지부장이 교수님에게 화가 많이 날 것 같습니다. 저게 한두 푼짜리가 아니라.”
필립이 그녀를 재촉했다.
펠리시아는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마치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갔다.
“다행히 친화력이 있으시니 제 중재가 있다면 쉽게 계약할 수 있을 겁니다. 정령석에 깃든 자연력을 갖고 싶을 테니 말입니다.”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는 정령석 앞에 배를 깔고 앉았다가 펠리시아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고 있는데 하나도 뜨겁지 않아.’
정령을 휘감은 불꽃이 전혀 뜨겁지 않았다. 펠리시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자 이그니스가 혀를 내밀어 핥았다.
그리고 그녀는 정령과 자신이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
―안 녕.
머릿속에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어…안녕.”
―반 가 워.
“어… 나도.”
필립은 정령과 교감하는 펠리시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새로 탄생한 정령검사가 자신의 편이 되었다. 설마하니 저걸 날름 받아먹고도 그에게 차갑게 대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어차피 못 먹는 감이었다.
정령을 활용한 검술과 월광검을 동시에 연구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으니까.
그는 허리에 찬 미스릴 검을 펠리시아에게 내밀었다.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