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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3화 (13/119)

013화

* * *

―하아암… 주인님, 일어나세요.

“그래.”

네리아의 목소리에 필립은 잠에서 깨어났다.

왕족이 머무는 별장이라고 나름대로 최고급 침대를 놓아두었으나 아쉽게도 이 세상의 침대는 과학이 아니었다.

“주말인데 출근이라니, 이렇게 끔찍할 수가.”

―경력이 짧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네리아의 주인님들도 그랬어요. 특히 여섯 번째 그 아줌마는 용병단에 처음 입단했을 때 끔찍했다구요.

“…아. 그러셔.”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봄날 아침의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자 저절로 잠이 달아났다.

“이런 날엔 공원 같은 곳에서 멍하니 햇볕을 쬐어야 제맛인데.”

출근 같은 걸 하기에는 날이 너무 좋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교직원 기숙사에서 이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사는 곳이 바뀌면 기분도 바뀌기 마련이지.’

정신은 생각보다 육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울증 치료에 인테리어 변경을 권유하는 이유가 있었다.

문득 책상 옆에 세워 둔 레이피어 한 자루가 보였다.

‘…저걸 언제 줘야 하지?’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조금 아름답고 날카로운 검에 불과하겠지만 필립에게 있어 저건 그야말로 사기템이었다.

단지 그가 직접 사용할 수 없을 뿐.

적당한 시기에 펠리시아에게 넘겨야 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복도로 나선 필립은 바로 옆 루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교관님이세요?”

“그래. 들어가도 되니?”

“네!”

일주일 동안 루아의 목소리에 처음 만난 순간 느꼈던 활기와 발랄함이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문을 열자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진 루아의 방이 보였다. 커튼, 이불, 가구 등등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평생 자신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는 루아는 필립의 결정에 그대로 따랐다.

원래부터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필립은 열과 성을 다해 직접 발로 뛰어

‘…이 방을 꾸미는 데 금화 백 개는 들어야 했겠지.’

분홍색 염료는 가장 비싼 염료 중 하나였다.

필립이야 유세프 상회의 창고에서 적당한 것들을 꺼내 온 것이었지만, 돈을 주고 사려면 필립이 이십 년 동안 교관 생활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 들었을 터였다.

루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고, 필립이 왔는데도 침대에 엎드려 고개만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버릇없어 보일지도 몰랐으나 필립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정도는 지구의 중고등학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디 나가시는 거예요?”

루아가 물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잘 놀고 있으렴.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나 하녀에게 말하고.”

“….”

소녀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필립은 마치 동화 속 공주의 그것 같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왜 그러니?”

그의 질문에 루아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냥…제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궁금해서요. 저는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전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나무 타는 것뿐인데.”

“나무? 얼마나 잘 타길래?”

“다람쥐보다 빨리요.”

“그건… 정말 대단한데?”

필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력도 다룰 줄 모르는 여자애가 다람쥐보다 나무를 더 잘 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루아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필립은 별장을 나서 아카데미로 향했다. 자그마치 수석교수의 호출이었기에 늦기라도 했다간 곤란했다.

* * *

검술 학부에 배정된 유일한 강의실은 마법 학부의 그것보다는 작고 낡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필립은 의자에 대충 걸터앉아 시간을 죽였다.

‘….’

월광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꽤 빠르게 흘렀다. 필립은 그 비전서의 내용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파고든 결과 어느 정도 성과를 얻기는 했다. 어떤 방향으로 수련해야 하는지 대충 감을 잡은 것이었다.

‘결국 마력의 속성을 바꿔야 한다는 건데.’

마력이라는 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진 고민을 터무니없다고 평가할 터였다.

오러 마스터, 줄여서 마스터라 불리는 달인들도 마력을 그 자체로만 다룰 뿐 속성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립은 애초에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력에 접근했기에 이런 발상이 가능한 것이었다.

―네리아 심심해요. 주인님.

응석받이 에고 소드의 목소리에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하고 놀까? 숨바꼭질이라도 할래? 내가 잘 숨겨 놓을 테니 눈 감고 한 3천 정도만 세고 있으면 찾으러 갈게.”

―진짜 너무해.

토라진 네리아가 뾰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필립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3학년과 4학년을 담당하는 검술 학부의 교수, 프레이저 컴벨이었다.

“자네는?”

그는 40대 중후반의 중년 사내였는데,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오럼 나이트’ 출신의 실력자였다.

기본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마족과의 전투 탓인지 얼굴에 흉터가 많았기에 많은 학생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일찍 왔군.”

어색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둘 사이에서 맴돌았다.

필립은 강직한 성격인 그가 부담스러웠고, 컴벨 교수는 소문이 좋지 않은 필립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제가 따로 들은 게 없어서 그러는데, 수석교수님께서 왜 호출하셨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필립이 묻자 컴벨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모르네.”

그나마 대놓고 혐오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컴벨 교수는 적당히 빈 자리를 찾아 앉았고, 곧 강의실로 누군가 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컴벨 교수님. 그리고 필립 교관님.”

디아나 파렌할 교관이었다. 그녀는 파란 머리카락을 길게 묶은 채였다.

“그래. 교관. 일찍 왔군.”

그녀는 고맙게도 필립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필립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먹었습니다. 교관님께서는요?”

“저는 아침을 잘 먹지 않아서요.”

동료와 나누는 스몰 토크는 직장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필립은 그녀와 이렇게까지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입학식 이후 디아나 교관은 그에게 꽤 살갑게 굴었다.

그녀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컴벨 교수가 데리고 있는 교관 세 명,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가 자리를 채웠다.

컴벨 교수는 교관들이 자신보다 늦었음에도 별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딱히 권위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잘만 하면 그와 친해질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펠리시아는 필립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디아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언니는 왜 쟤랑 붙어 있는 거야?’

디아나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손을 흔들며 옆자리를 권했지만 펠리시아는 고개를 홱 돌리곤 떨어진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을 호출한 장본인인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섰다.

“아카데미 예산을 좀먹는 봉급 도둑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그의 농담에 컴벨과 펠리시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필립을 제외한 교관들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에밀 수석교수는 떨어져 앉은 필립과 펠리시아를 보더니 말했다.

“오스왈드 교수. 아직도 동생과 화해하지 않았나? 자네 나이가 몇인데 너무 유치한 것 아닌가?”

펠리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끄러워요. 교수님.”

“오늘따라 까칠하군. 어쨌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친하게 좀 지내도록. 핏줄이라는 건 생각보다 더 질긴 인연이거든. 그리고 컴벨 교수, 자네는 좀 웃고 다니게. 그렇지 않아도 험해 빠진 얼굴인데 왜 눈에 힘을 주고 다니나?”

컴벨 교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왜 애인과 침대에서 뒹굴어야 할 주말에 자네들을 불렀는지 궁금하겠군. 별 건 아니고, ‘실베르 나이트’ 기사단에서 대련 요청이 들어왔거든.”

‘실베르 나이트’가 언급되자 교수, 그리고 교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오럼 나이트’의 바로 다음가는 위상의 기사단이었다. 오럼 나이트처럼 마족과 직접 전투하는 부대였고, 그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곳에서 복무한 경력만으로도 중앙 귀족의 눈에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슬슬 때가 되긴 했군.’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베르 나이트’와 아카데미 검술 학부 교직원 간의 교류 대련 이벤트가 이 시기에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교직원들의 신경이 꽤 날카로워져 있기에 주인공으로 플레이할 때 이 시기에는 몸을 조금 사려야 했던 기억이 났다.

“컴벨 교수, 그리고 오스왈드 교수 자네들은 무조건 나서야 해. 그리고 교관 두 명을 내보낼 생각인데, 혹시 자원할 사람이 있나?”

수석교수의 질문에 필립과 디아나를 제외한 컴벨 교수 소속의 교관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파렌할 교관, 자네는 왜 손을 들지 않았나?”

“저는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수석교수님. 저학년 학생들은 몸이 만들어지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제가 대련을 신경 쓰게 되면 그만큼 수업에 소홀해질 게 분명합니다.”

디아나의 차분한 대답을 들은 수석교수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는 봉급 도둑 명단에서 제외하겠네. 그러면 오스왈드 교관, 자네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으나 필립은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못 이길 것 같은데.’

실베르 나이트 정도면 전원이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오러 유저였다. 게다가 북부 전선에서 마족들과 치열하게 다투던 이들이니 실전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 게 뻔했다.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검술 수준이 낮았다. 수 싸움으로 몰고 갈 수 있다면 승산이 있겠지만 뭘 해보기도 전에 말릴 것만 같았다.

“…그래?”

에밀 파노이 수석교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필립과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자네 두 사람이 나가게.”

그 말에 더 놀란 건 손을 들었던 세 명의 교관이었다.

“어, 어째서입니까? 수석교수님?”

“어째서냐고? 당연한 걸 묻는군. 손을 들 때 자네들 머릿속에 학생들에 대한 생각이 있기는 했나? 보나 마나 실베르 나이트 놈들 눈에 들어 출세할 생각으로 가득했겠지. 여기는 출세를 위한 발판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일세.”

수석교수는 컴벨 교수에게 짜증 섞인 시선을 보냈다.

“똑바로 좀 교육하게. 교수. 저따위 마음가짐으로 애들을 가르치겠다고?”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컴벨 교수가 고개를 숙였고, 교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스왈드 교수는 교관들을 데리고 날 따라오도록.”

“네.”

수석교수의 지시에 펠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그녀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나는?’

필립은 자신 또한 바라봐 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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