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 * *
마차를 타고 이동한 필립 일행은 상점가에서 조금 떨어진 저택으로 향했다.
“여기예요. 필립. 인근 국가의 왕족분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녀나 친척을 만나러 올 때 잠깐 머무시는 별장인데, 어차피 상회에는 이런 건물이 세 채 정도 더 있거든요.”
필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리즈리엘이 안내한 별장을 둘러보았다. 2층 규모에 방이 여섯 개나 되고, 온갖 비싼 가구나 장식품이 가득했다.
“여길 빌려준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드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해서요.”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지. 다른 건 준비가 됐고?”
“물론이죠. 집사, 하녀장, 주방장, 정원사는 이미 구했고, 다른 인부들은 집사가 알아서 고용할 거예요. 필립은 그저 여기서 편히 지내기만 하세요.”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예상한 결과였으나 리즈리엘은 필립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호의적이었다.
어쩌면 ‘유세프의 황금 인장’의 진위를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진품을 알아볼 수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은 어디에요?”
얌전히 서 있던 루아가 문득 말했다. 그녀의 직설적인 표현에 귀족 영애 출신인 펠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너는 열네 살 여자아이고, 여긴 남자가 있잖니.”
“…?”
루아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펠리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 또한 루아가 자란 환경을 알고 있었다.
“화장실은 복도 끝이에요.”
리즈리엘이 대답했다.
“고마워요. 잠깐 같이 다녀올게요.”
펠리시아는 루아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오라고는 했지만, 쟤는 대체 왜 온 거지?’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펠리시아가 따라온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응접실에 둘만 남게 되자 필립이 질문했다.
“‘황금 인장’은 언제쯤 공개할 생각인데?”
필립이 묻자 리즈리엘은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보다 사실 아직 믿기지 않네요. 그 인장은 제게 있어 최고의 무기거든요.”
“날 완전히 믿는 건가?”
리즈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묻는 것 자체가 저를 속일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속일 땐 말이죠, 목적이란 게 있어요. 특히 저처럼 자신을 속인 사람을 파멸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을 속이려 들 땐 나름대로 거창한 목적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당신은 제게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았죠. 저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사람은 보통 터무니없는 사기꾼이거나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둘 다 아니죠.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가요.”
“…내가 사기꾼일 수도 있잖아?”
“어차피 제겐 남은 선택지가 없어요. 이대로 후계 경쟁을 계속해 봤자 승산이 없거든요. 말하자면 필립 당신은 제겐 도박에 쓰일 주사위인 셈이죠. 절 괜히 떠보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절 배신하기 전까진 당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테니까요.”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즈리엘 유세프는 뛰어난 상인이었기에 자신을 이렇게 쉽게 믿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저런 이유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이 시점부터 꽤 내몰려 있었군.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믿고 싶어서 믿는 거잖아.’
본래 주인공 일행과 엮이지 않는다면 리즈리엘의 운명은 꽤 잔인할 터였다. 물론 이제는 아니게 되겠지만.
“아, 저기 꽃 따러 다녀온 아가씨들이 오네요.”
1층으로 내려갔던 펠리시아와 루아가 서로 손을 잡은 채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여자들은 빨리도 친해지는군.’
필립은 루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루아, 어떠니? 여기가 마음에 드니?”
“네? 으음, 정말 좋은 집 같아요.”
루아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이렇게 큰 집을 처음 보았다. 산 아랫마을 촌장의 집보다도 열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다행이구나. 이제부터 네가 살 집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되지.”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제가… 왜요?”
루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야 지금부터 내가 너를 정식으로 후원할 생각이고, 나는 내 후원을 받는 소녀가 기숙사에서 살길 바라지 않으니까.”
후원이라는 말에 루아는 눈을 깜빡였다.
“후원…이 뭐예요?”
입학식에서 들어본 기억이 있는 단어였으나 그녀는 그 뜻을 잘 몰랐다.
“쉽고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네 보호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네가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 자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책임지겠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왜요?”
루아는 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필립은 그녀를 설득할 필요성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필립은 그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왜, 싫으니?”
루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울 뿐.
‘왜 나한테 저렇게 잘해 주실까? 아저씨가 계신다면 물어보고 싶어.’
그녀의 짧은 삶에서 조건 없는 호의는 오직 아저씨와 루엔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었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부모 없이 자란 자신과 루엔을 꺼렸고, 마을 아이들은 그녀와 놀아주지 않았다.
가끔 사춘기에 진입한 소년들이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선물 공세를 펼치기는 했으나 루아의 눈에는 그들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필립의 경우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불쌍한 걸까.’
그녀는 기숙사에서 자신을 업고 나오던 필립의 표정을 기억했다.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시선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고, 그녀를 다루는 손길은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모르겠어. 그런데 싫지는 않아.’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단지 갑작스러울 뿐. 하지만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루엔과 억지로 헤어지고 며칠 동안 그녀는 무관심과 냉대 속에 살았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아이들은 착했지만, 처음 보는 평민 소녀의 울음소리를 며칠이나 참아낼 만큼 착하지는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지?’
‘네가 슬픈 건 이해하지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무관심. 차라리 차가운 냉대였다면 루아는 슬픔을 어느 정도 잊었을지도 몰랐다.
진심이 아닌 학습으로부터 비롯된 친절과 배려가 오히려 더 아팠다.
‘나도 울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결심을 마친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아요.”
필립은 손을 뻗어 루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잘 생각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펠리시아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말려야 하나?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해?’
겉보기에는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훈훈하고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다만 주인공이 자신의 학생과 필립 오스왈드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저 애, 정말로 바뀐 걸까?’
문제는 필립이었다. 펠리시아는 필립의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비록 그녀에게 그 화가 직접 미치지는 않았으나 쉽게 바뀔 만한 성질머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필립이 예전 그대로의 성격이었다면 그녀는 지금 당장 앞으로 나서서 필립의 행동을 막았을 터였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바로 어제, 디아난 파렌할에게서 필립 고학년 교관들과 말싸움을 했다고 들었을 때 펠리시아는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싸움? 필립이?’
‘응. 하론 베이브 교관과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칼… 칼은 안 뽑았지? 베이브 교관은 어떻게 됐는데?’
‘…펠리시아. 네 동생은 그냥 조금 말다툼을 했을 뿐이야. 그것도 하론 베이브가 먼저 선을 넘었다던데.’
‘뭐? 말다툼? 그럴 리가 없는데?’
필립은 말다툼이라는 걸 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말보다는 주먹이나 검이 먼저 나가는 편이었으니까.
그녀가 생각하기에 말다툼 정도는 사고도 아니었다.
애초에 필립이 잘못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검술 교관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필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실패한 마법과도 같은 존재이니 절대 시비를 걸지 말라고.
그가 문제를 일으키면 자신이 책임지고 벌할 테니 그냥 피하라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건드린 건 하론 베이브라는 교관의 잘못이었다.
“…너, 잠깐 이야기 좀 해.”
“어? 아니, 왜?”
펠리시아는 필립의 손목을 붙들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리즈리엘이 루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루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리즈리엘은 그런 루아가 귀엽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달콤한 크림을 마법으로 얼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빛보다 빠른 호감작이었다.
* * *
“…너, 하론 베이브 교관하고 싸웠다며.”
2층 테라스로 필립을 끌고 온 펠리시아가 입술을 떼었다.
필립은 몸을 흠칫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론 교관이 칼까지 뽑으려 들었던 일인데 펠리시아가 모르는 게 이상했다.
“어, 그랬지.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미안해.”
필립의 사과에 펠리시아는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왜 사과하는 거야? 하론 베이브 교관이 먼저 선을 넘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참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
“참아? 네가?”
“…참으면 안 되나?”
“아니, 잘 참았는데…그게, 그러니까.”
필립은 허둥지둥 말을 바꾸는 펠리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본인조차 잘 모르는 듯했다.
‘사춘기인가?’
“그,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시 돌아가도 되나? 지금부터 할 게 좀 많아서.”
‘빨리 현질하러 가야 하는데.’
그러자 펠리시아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네 마음대로 해.”
토라진 것처럼 보였기에 필립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펠리시아의 입이 열릴 것 같진 않았기에 그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펠리시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 오스왈드.”
“왜?”
“저 아이, 왜 후원하려고 하는 거야?”
필립은 눈을 깜빡였다. 저 조그만 소녀가 5년 후쯤엔 검성의 후예로 각성하게 된다는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른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누나도 기숙사 침대에서 울고 있는 루아를 봤다면 내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거야.”
펠리시아는 설득력을 느꼈다. 그녀 또한 울다 지쳐 잠든 루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필립을 방해할 명분도, 이유도 찾지 못했다.
아직도 필립이 불안하기는 했으나 겨우 그 정도로 루아에게 찾아온 행운을 앗아간다는 건 너무 불합리한 일이었다.
“…한 번 후원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만 해. 네가 저 아이를 후원하기로 한 건 꽤…훌륭한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네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펠리시아는 얼버무리듯 말했다.
지금껏 무시하고 증오했던 동생에게 다시 이런 식으로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꽤 부끄러웠다.
“알겠고, 루아 옷 사러 갈 건데 누나도 갈 거야?”
“뭐?”
“곧 주말이니 외출복은 하나 있어야지. 검을 수련해야 하니 쓸만한 검도 하나 있어야 할 테고, 용돈도 필요하겠지? 그리고 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도 어떻게 좀 해야겠어.”
아무래도 걱정할 필요까진 없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오래전 한 가지 흥미로운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한도 무한의 신용카드를 아무렇게나 긁고 다니는, 대단히 서민적이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은 상상이었다.
‘이게 바로 책임 없는 쾌락이지.’
그는 루아와 함께 아카데미 근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부티크에 들어와 있었다.
“어, 어서 오세요!”
점장으로 보이는 30대 여인이 필립을 보곤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저 청년이 리즈리엘 유세프의 연인인가?’
터무니없는 오해였으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즈리엘 유세프가 직접 저 청년이 고르는 모든 옷을 계산하겠다고 나설 리가 없었다.
이 부티크의 상품 중에는 귀족마저도 부담스러울 만큼 비싼 것들이 많았으니까.
필립은 여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여기 이 여자애가 입을 옷을 살 건데, 코르셋이 들어간 건 제외하고 활동하기 편한 옷 몇 벌만 좀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여주인이 최근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마터면 표정이 풀릴 뻔한 그녀는 다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잘못해서 이상한 말이라곤 했다간 유세프 상회 지부장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루아는 온갖 화려한 옷이 진열된 부티크 내부를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니?”
“제가 입을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는데요?”
그녀처럼 아직 덜 자란 소녀가 아닌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드레스들이 많았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고르렴. 어차피 일단 사서 네 몸에 맞추면 그만이니까.”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점포 안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주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뭐라고?’
패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기성복을 잘라서 고친다니? 그렇게 따지면 아동복은 왜 존재한단 말인가. 그녀는 전문가로의 자존심과 생계의 위협 사이에서 갈등하다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공주님이 입는 옷 같아.’
루아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나 귀여운 프릴과 리본이 달린 원피스를 구경하며 작게 입을 벌렸다.
“…내가 몇 벌 골라줘야겠군.”
필립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리번거리는 루아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난 뒤 진열된 옷들을 둘러보았다.
‘머리카락이 갈색이니 베이지색이나 흰색으로 코디하면 되겠지. 분홍색도 괜찮아 보이고.’
루아는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나이였다.
따라서 어른스러운 옷보다는 귀여운 옷이 더 잘 어울렸다.
“몇 벌 입혀보고 싶은데, 탈의실 같은 게 있습니까?”
“저쪽에 커튼을 설치해 뒀습니다. 혹시 하녀는…?”
이런 곳에 오는 영애들은 보통 하녀, 혹은 유모와 함께 오기 마련이었다.
“….”
필립은 말없이 여주인을 바라보았다. 하녀 같은 건 없는데 내가 갈아입혀야 하냐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 아가씨. 잠시 이쪽으로….”
루아는 여주인을 따라 안 쪽에 마련된 커튼 너머로 들어갔다.
그녀가 몇 번인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물방울무늬 원피스와 프릴과 숄이 달린 원피스 한 벌, 편한 잠옷이 선택되었다.
필립은 원피스를 입고 나온 루아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머리를 묶는 게 더 귀여울 것 같은데.’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여성스러워지며 아기자기한 취미나 물품에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뜨개질, 원예, 혹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 등등.
물론 필립 또한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조카를 데리고 쇼핑을 나온 기분이 들었기에 그는 기분을 조금 더 내기로 했다.
“잠깐 이리 와보렴.”
“네에.”
필립은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 어울릴 만한 하늘색 리본을 하나 고른 뒤 루아의 머리카락을 한데 그러모아 맵시 있게 묶었다.
“으음.”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루아 또한 자기 모습이 궁금했는지 한쪽에 놓인 거울로 다가갔다가 헤, 하고 입을 벌렸다.
그 속에는 처음 보는 소녀가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하늘색 리본을 맨 여자아이.
“내가 아닌 것 같아.”
루아가 중얼거리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이고 잘 재운 아이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게다가 원래 예쁜 외모에 잘 입히기까지 해 놨으니 정말이지 잘 만든 인형처럼 사랑스러웠다.
“이거 전부 배송 좀 부탁드립니다.”
필립이 말하자 여주인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필립의 눈에 파란색 드레스가 들어왔다. 보석과 레이스가 달린 고급품이었다.
“아, 저것도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꽤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남의 돈으로 하는 쇼핑이라 더욱 그랬다.
“이제 나가자.”
필립은 루아를 데리고 부티크를 나섰다. 아직도 살 게 너무 많았다.
* * *
다음으로 들린 곳은 대장간과 무구점을 겸하는 상점이었다.
뒷골목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일종의 비밀상점이었는데 게임에서 필립이 가장 많이 방문한 상점이기도 했다.
“여긴 어디예요?”
“칼과 방패, 갑옷 같은 걸 파는 곳이란다. 들어가서는 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주인장 성격이 좀 더럽거든.”
“네.”
“착하구나.”
필립은 괜히 루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상점으로 들어섰다.
“…뭐요? 누구 소개로 온 거요?”
쇳물 냄새와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곳.
셔츠도 없이 멜빵 바지만 입은 근육질 사내가 망치를 든 채 필립과 루아를 맞이했다.
“소개 없이 왔다고 하면 물건 안 파실 겁니까?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왔습니다.”
필립이 되묻자 사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도 먹고는 살아야겠지. 하지만 자격 없는 이에게 과분한 물건을 팔지는 않을 테요.”
‘역시 까다롭구만.’
이 상점의 이름은 ‘욘슨의 무구점.’ 저 근육질 사내의 이름은 욘슨으로 황색 마탑에서 정식으로 마법을 공부한 마법사 출신 대장장이였다.
설정상 대륙에서 제련 기술과 마법을 융합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
다른 상인들은 무시하더라도 욘슨과는 반드시 친해져야 나중이 편했다.
“그래서 뭘 살 거요?”
“이 애가 쓸 만한 검, 그리고 아대를 사고 싶습니다.”
“돈 내는 사람은 그쪽이요?”
“예.”
“그럼 그쪽이 가진 재주를 봐야겠군. 가진 재주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걸 내게 보여주면 그 가치에 맞는 상품을 팔아주지.”
올슨은 대단한 장인이었고, 합당한 자부심의 소유자였다.
원작 게임에서도 그에게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선 일정 등급 이상의 스킬이나 비전을 익혀야 했다.
필립은 잠깐 고민했다.
‘마력을 다루는 걸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이왕이면 올슨이 놀라 나자빠질 수준의 기술을 보여주고 싶었다.
“검 한 자루만 잠깐 빌려주시죠.”
네리아를 저택에 놔두고 왔기에 그의 허리춤은 비어 있었다. 필립이 요구하자 상점 주인 올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검도 되나?”
“충분합니다.”
필립은 올슨이 건넨 단검을 받아 손에 쥐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곧 단검에 푸른 검기가 솟았다. 그 모습을 본 올슨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오러 다룰 줄 아는 놈은 세상에 널렸지. 고작 그게 전부인가?”
“그럴 리가요.”
씨익 웃어 보인 필립이 단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필립이 뽑아낸 검기가 채찍처럼 갑자기 쭉 늘어나더니 몇 미터나 떨어진 반대편 벽에 충돌했다.
단단한 벽돌에 남은 상흔을 보며 올슨은 입을 떡 벌렸다.
“…이런 씨발! 지금 대체 뭘 한 거야?”
필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애가 듣는데 왜 욕을 합니까?”
“내 알 바요? 방금 뭘 한 건지나 설명하쇼. 아니, 외부에 형성한 오러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변형시킨 건데? 그건 마법으로나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요. 게다가 마력의 총량이 변하지도 않았잖소?”
“하지만 됐잖습니까?”
필립의 대답에 올슨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 일어난 셈이었다.
검사가 다루는 마력은 ‘오러’라는 형태로 정제되어 외부에 영향을 미치고, 마법사들은 마력 그 자체를 다룬다.
주문과 술식으로 일정한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에 따라 마력이 움직임과 성질이 바뀌는 현상이 바로 ‘마법’이었다.
검사로 보이는 필립이 주문도, 술식도 없이 ‘오러’라는 정제된 형태의 마력에 ‘신축성’이라는 성질을 불어넣었다.
마력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필립이 한 일을 직접 보지 않고선 결코 믿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역시 마법사 출신이라 한 번에 내가 뭘 한 건지 알아보는군.’
조금이지만 자존감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필립은 만족스럽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래서 어떻게 한 건데?”
“안 알려주면 물건 안 파실 겁니까?”
“씨발! 그건 아닌데!”
올슨은 몸이 달아오른 듯 발로 땅을 툭툭 걷어찼다. 그 반응이 썩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데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 물건부터 좀 봐도 될까요?”
필립이 은근한 목소리로 권하자 올슨은 그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그래. 이 새끼야. 자주 들릴 테니 잘 봐달라는 말이렷다.’
“잠깐 기다리쇼.”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제법 굴러먹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창고로 향했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새까만 검신의 롱소드 한 자루와 가죽제 아대 한 쌍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이걸 팔게 될 줄은 몰랐군. 이 새까만 놈은 ‘구도자’라는 이름의 검인데, 입문검으로는 이것보다 좋은 게 없지. 자주 들고 휘두르다 보면 주인의 몸에 가장 어울리는 길이와 무게로 알아서 변하는 놈이요.”
올슨은 새카만 검을 멀뚱히 서 있던 루아에게 내밀었다. 다음은 가죽 아대였다.
“이 아대는 와이번 가죽에 만티코어 피로 주문을 새긴 물건이고, 손목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 검을 떨어트릴 상황이 오면 몇 번은 막아 줄 거요.”
설명만으로도 그것들이 얼마나 좋은 아이템인지 알 수 있었다.
필립은 아대와 검을 받아 검은 허리에 찼고, 아대는 루아의 손목에 끼워 주려다 루아가 원피스 차림이라는 걸 떠올리곤 자신이 찼다.
돌아가서 줄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아대는 몰라도 저 검은 이미 노리던 놈이 있었는데, 또 와서 온갖 지랄 염병을 떨겠군.”
“아, 그리고 하나 더 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또 뭐요?”
“팔고 계신 검 중 혹시 미스릴이 섞인 게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쇼?”
기가 찬다는 듯 올슨은 다시 혀를 찼다. 분명히 그런 물건이 있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걸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올슨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는 곧 은색 검 한 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필립은 그 검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 이 시점에선 아직 안 팔렸군.’
검신이 얇고 길쭉해 레이피어에 가까웠고, 실전에서 사용한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검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이 검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지 알았다.
‘그 미친 하프엘프의 손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것도 사겠습니다.”
“이걸? 이건 실패작이요. 내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놈이지. 그 어떤 마법적 기능도 없는 물건인데. 사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안에 들어간 미스릴 값만 받도록 하지.”
‘저 개사기 아이템을 싸게 판다고?’
필립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함을 표시했다.
“아, 누나한테 선물하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필립은 올슨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일종의 어음이었는데, 이 청년이 구매하는 모든 물건의 대금을 유세프 상회에서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세프 상회? 대체 뭘 하는 놈이지? 어디 왕족이라도 되는 건가? 생긴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쪽, 대체 뭐 하는 양반이요?”
잠깐 고민하던 올슨이 물었다. 어느 마탑의 비밀 병기든, 그 유명한 ‘검신전’의 일원이든 놀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말입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카데미 검술 교관입니다. 자주 들릴 테니 박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올슨의 무구점을 나섰다.
“…교관이라고? 지랄하네.”
혼자 남겨진 올슨이 중얼거렸다.
필립이 그에게 보여준 재주는 검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고도 혁신적인 마력의 운용이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인맥을 통해 어떻게든 필립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올슨은 필립의 정체를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