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 * *
오후 10시. 어두운 밤이었다.
필립은 여자 기숙사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
달빛이 밝은 탓에 딱히 발광 아티팩트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필립의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조금만 감각을 일깨우면 방 안에서 학생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여자 기숙사의 1층과 2층은 고학년들, 4학년과 5학년이 쓰는 층이었다.
디아나 교관도 고학년은 조금 풀어줘도 된다 말하기도 했고, 열일곱 열여덟이면 거의 다 큰 아이들이었기에 필립은 어지간해선 방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1층 오른쪽 복도 끝인 112호까지 돌아본 필립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다.
그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110호에서였다.
“…오늘 당직 누구인지 아는 사람?”
“페렉 교관님이실 걸? 왜?”
“잠이 안 와서 와인이나 한 잔 마시게.”
“우리도 주나?”
“공짜는 안 되고, 간식 내놔.”
필립은 잠시 고민했다. 1층이면 열여덟 살인 5학년. 이 세상에서 열여덟이면 어느 정도 성인 취급을 받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 정도는 괜찮다.
졸업 학년이니 어느 정도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필립은 기척을 최대한 줄였다. 마력을 이용해 발소리를 죽였고, 숨소리마저도 거의 들리지 않도록 조절했기에 그가 다가오는 걸 알아차릴 염려는 없었다.
속으로 셋을 센 다음 문을 벌컥 열자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들이 보였다. 잠옷 차림으로 방 중간에 놓인 탁자에 모여 앉아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교관님.”
막 마개를 따려던 학생은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히끅!”
“…전부 벌점을 제출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따기 전에 들켰으니 한 번은 봐주마.”
“앗, 감사합니다.”
“정 마시고 싶으면 한 잔씩만 돌리렴. 잠이 안 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필립은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곤 일부러 멀어지는 발소리를 낸 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 나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릴리.”
“저 교관님 그 사람 아니야? 필립 오스왈드?”
“난 어릴 때 파티장에서 한 번 봤는데, 뛰어다니다가 저 사람이랑 부딪힌 적 있어. 그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완전 다른 사람 같아.”
필립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필립아, 넌 대체 어떻게 산 거냐?’
그는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갔다.
4학년들은 별 움직임 없이 전부 자리에 누운 듯했다. 3층, 3학년들이 쓰는 층으로 올라가자 필립은 잠이 덜 깬 누군가가 복도를 걷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하암.”
곱슬머리에 뿔테 안경. 필립의 기억에 있는 소녀였다.
“셰릴이구나. 어딜 가니? 지금은 취침 시간인데.”
“하암…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엇.”
잠결에 아무 말이나 내뱉던 셰릴은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눈앞에 자신의 흑역사를 목격했던 미남 교관이 있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죽어야 안 아플까?’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연장 근무를 하다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진 게 화근이었다. 필립은 어색하게 웃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어서 다녀와서 푹 쉬렴.”
“…네.”
필립은 그녀를 배려해 바로 4층으로 올라갔다. 등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필립은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2학년들은 몇몇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는 걸 제외하면 별일이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친구들과 속닥거리는 건 기숙사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나 다름없었기에, 필립은 특히 시끄러운 방을 제외하곤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필립은 위층에서 누군가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필립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루아가 어느 호실에 배정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아.’
507호실. 그 아이의 방이 맞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문 너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좀 울어. 너 힘들고 슬픈 거 알겠는데, 그만 좀 울라고. 너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너 산에서 자랐다며? 그래서 민폐라는 말을 모르니?”
“미안. 미안해…하지만….”
“미안하면 조용히 하라고. 미안하기만 하면 다야?”
“저기, 지금 네가 더 시끄러운데. 저 애 울음소리 정도는 참고 잘 수 있어. 그런데 네 목소리는 좀 짜증 나거든? 지금 귀족이라고 유세 부리는 거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분위기를 살피던 필립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교관의 존재에 아이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뭘 하고 있니. 너희들.”
필립이 엄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비단 잠옷을 입은 소녀가 억울하다는 듯 나섰다. 그녀 또한 검술 수업을 듣는 아이였다.
이름은 올리비아 누에스, 남작 가문의 영애.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다니는 소녀였기에 필립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교관님. 저 애, 벌써 며칠이나 밤새 울어요. 처음에는 저러다 좀 나아질 것 같아서 얌전히 참았는데 사흘 내내 그러는 건 좀 심하잖아요. 저는 그래서….”
“그래. 안다. 네 잘못이 아니고, 널 탓할 생각도 없어. 단지 문제를 대하는 네 태도가 친구들에게 조금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지.”
필립의 말을 듣던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필립에게 혼이 날 줄만 알았다.
“그리고 애니스 프랄린, 너도 마찬가지다. 너희 둘은 성격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데, 나는 너희들의 관계가 이것보단 더 좋은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나간 뒤 누구든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프랄린 상회의 외동딸 애니스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네… 교관님.”
“그래. 내일 아침 식사 시간에 너희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상점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거든.”
필립은 그렇게 두 소녀의 다툼을 일단락시킨 뒤 루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널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좀 고민을 해 봤다. 그리고 결정했지.”
루아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했고, 입술은 말라서 갈라졌다. 필립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 게임 속 루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활발하고, 심지 굳고, 친화력이 뛰어난 소녀.
저 아이가 그 모습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더 지나야 했다.
‘나는 못 해.’
‘아카데미 히어로즈’ 속 세상에 들어온 이후 수백 번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으나, 언제나 계획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어린 여자아이를 고난과 시련 속으로 밀어 넣을 자신이 없었다.
그건 학대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젠, 뭐 어쩔 수 없지.’
결심을 마친 필립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루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며칠이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팔뚝에 닿는 머리카락이 다 갈라져 있었다.
“아앗.”
루아는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보였지만 필립을 밀치려고 들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필립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애초에 반항할 힘도 없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따뜻해.’
그리고 누군가의 체온이 그립기도 했다.
“일단 나가자꾸나. 너희도 취침 시간이니 어서 자리에 누워라.”
“아, 네.”
“네에.”
필립은 아이들이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한 뒤 방을 나섰다.
* * *
필립은 루아를 업고 자신의 방에 데려다 놓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당직을 서는 하녀에게 루아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는 근무를 마저 서기 위해 복귀해야 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와, 울다 지쳐 잠들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 건가 봐요. 주인님.
자신의 방에 돌아온 필립은 루아를 보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게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략되었던 루아의 상실감이 이렇게 심각한 수준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입가에는 우유가 말라붙은 자국이 있었다. 아무래도 하녀가 아이를 재우면서 따뜻한 우유를 먹인 듯했다.
―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기는. 난 이미 노선을 정했어.”
―…?
“아예 처음부터 내가 직접 관리해야지.”
‘애초에 내가 멍청했어. 내가 필립에 빙의한 것 자체가 거대한 변수인데, 이야기가 원작대로 흘러갈 리가 없지.’
필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정말로 원작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었다면 필립은 2학기 중반에 루아와 싸워야만 했다. 그리곤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어딘지 모를 곳을 방황해야 했는데, 그 내용은 필립이 아는 정보 중엔 없었다.
이미 시작부터 꼬인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가까운 곳에 두고 직접 성장시키는 수밖에.’
루아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검성 솔베인’의 후계자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게 확실한 이상 변수투성이가 된 원작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필립이 떠먹이는 대로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떠먹이는 과정에도 빌드업은 필요했다. 필립은 지금부터 그 첫 번째 과정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일단 금융치료부터 시작해 볼까.”
―금융치료가 뭔데요?
“보면 알게 될 거다.”
필립은 다시 방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 외부의 상점가였다.
외부에 저택을 임대한 귀족 학생들의 수행원이나, 교직원들의 가족, 혹은 아카데미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권이 발달했고, 게임에서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맵 중 하나인 만큼 숨겨진 이스터에그, 혹은 히든 피스가 많았다.
―주인님. 여기 사람들 장사하기 싫은가 봐요. 문이 다 닫혀 있어요!
오전 8시, 거리는 아직 조용했다.
연금술 공방, 무구점, 부띠끄, 아틀리에 같은 일반 상점은 아직 개시 전이었고 그나마 식당 같은 곳 또한 이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필립의 목적지는 상점이 아니었다.
그는 상점가를 가로질러 외곽에 있는 수로로 향했다.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알데아 호수와 연결된 수로였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이 근처에서 주울 게 있어서…… 아, 여기군.”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 둔 댐 근처, 유난히 풀이 낮게 자란 어느 땅 밑이 그의 목표였다.
필립은 목적했던 땅 위에 올라 발을 몇 번 굴렀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이 땅의 몇 미터 아래에 공간이 있다고 속삭였다.
“확실히 여기야. 그러면…‘미래를 위한 불확실한 투자.’.”
그가 암호를 말하자 발밑의 지반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흐이익! 이게 뭐람?
필립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자 땅이 쩍 갈라지더니 정사각형의 통로가 생겨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주인님. 설마 여기로 내려갈 건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내려갈 건데?”
―히이잉… 어두우면 무섭단 말이에요.
“…내려가면 밝아지니까 걱정하지 마라.”
필립의 말대로 어두운 계단을 2층 정도 내려가니 눈앞이 밝아졌다. 땅을 파서 돌벽을 세운 지하실이었다.
‘저것들도 떼어가야겠군.’
천장에 박힌 수십 개의 발광석을 바라보며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그가 기억하기로 발광석은 개당 금화 열 개의 가치가 있는 초고가 잡템이었다.
석실 한가운데엔 낡은 책상이 하나 있을 뿐 다른 구조물은 없었다. 책상 위에는 사람 머리통을 두 개 합한 크기의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유세프의 황금 인장’. 저 안에 그 물건이 있을 터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상회의 특별 회원권을 구매하기 위한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