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 * *
학기 초의 검술 수업은 대부분 체력과 근력 단련 위주로 이루어졌다.
검이라는 무기는 생각보다 무게가 꽤 나가고, 고작 열네 살에 불과한 1학년생,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은 검을 들 근력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가문에서 이미 검을 배운 아이들은 좀 달랐으나 교육이란 건 본래 평균을 기준으로 잡아야 했다.
필립이 맡은 일은 대광장 주변을 달리는 1학년 학생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아니, 다짜고짜 나한테 마법을 쓸 줄 내가 알았느냐고.’
대현자 일록시나가 주인공 쌍둥이 중 남자아이 루엔을 데려가고서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이러면 내가 거기 끼어든 이유가 없는데.’
필립이 일명 ‘주인공 간택’에 끼어든 이유는 혼자 남은 주인공의 정신적 충격을 최소화하고, 일록시나와의 대화로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면 마법에 당하는 바람에 원하던 목표를 거의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억지로 저항한 탓에 코피를 흘리며 기절하고 말았다.
“흐엑…헉…헉….”
그때 검술 수업용으로 지급된 운동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필립을 지나쳐 가려 했다.
“몇 바퀴?”
필립이 묻자 학생은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손가락 네 개를 들어 보였다.
“세 바퀴 돈 거 내가 모를 것 같나? 다 세고 있다. 지스칼드.”
“쳇.”
아이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차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약아빠져선.”
저 나이의 아이들이 어른을 속여먹으려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창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할 때였으니까.
그저 안 당해주면 그만이었다.
곧 다른 아이들이 필립을 지나쳤다. 이번 신입생은 63명, 그중 루엔이 일록시나에게 붙들려 갔으니 예순둘이었다.
그중 검술 수업을 신청한 학생은 서른두 명이었다.
“…다 돌았어요. 교관님.”
주인공으로 선택된 여자아이, 루아는 마흔 명 중에서 발군의 체력을 자랑했다.
거의 평생을 산에서 동물들과 뛰어놀며 보낸 덕분인지 가문에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아이들보다도 체력만큼은 뛰어났다.
남매와 헤어져 어두워진 표정은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 같다. 누구도 이 아이에게 평생을 함께한 남동생과 갈라져야 할 마땅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걸 필립은 잘 알고 있었다.
필립은 루아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었다.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진심으로, 필립은 루아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하고자 한다면 루엔과 루아를 빼돌려 다른 곳에 숨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본래 이야기대로도 둘은 헤어지겠지만, 필립은 지금 느끼는 죄책감과 책임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는 두 남매의 운명을 알았으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눈물을 글썽거리는 루아를 보자 필립은 열흘 동안 세웠던 계획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뒤섞이는 걸 느꼈다.
“저도 들었어요. 루엔을 데려간 그 나쁜 아줌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라고… 저는… 이해가 안 돼요. 그렇게 강하고 유명한 마법사가 왜 루엔을 데려간 걸까요? 아무도 알려주질 않아요….”
물론 필립은 이유를 알았다.
글록시나와 사라진 루엔은 글록시나가 소속된 단체 ‘창성회’의 일원으로 키워져 게임의 후반부에 조력자로 등장하게 된다.
주인공 남매에게 부여된 운명은 두 가지. ‘별의 계약자’와 ‘검성’.
남매 중 한 명은 성좌의 힘을 다루는 마법, ‘성류 마법’의 계승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다른 한 명은 ‘검성’의 운명을 부여받아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잠든 최초의 검성 ‘솔베인’의 검법을 이어받는다.
“…나중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
루아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약속한다. 그리고 힘든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라.”
루아는 필립의 어설픈 위로에 억지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필립은 루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녀는 시련을 겪고, 강해져야 했다.
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필립을 위해서.
* * *
그날 저녁이었다.
필립은 학부실에서 디아나 프렌할 교관에게 기숙사 순찰에 관한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다.
검술 학부나 마법 학부처럼 전투력을 가진 학부의 교관들은 기숙사를 이용하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일주일에 이 주에 세 번 정도 숙직을 해야 했다.
“한 시간마다 순찰을 돌며 인원을 파악해야 합니다. 안 자고 떠들거나, 몰래 간식 같은 걸 먹는 기척이 느껴지면 직접 들어가서 제지하고, 혹시 교관님 선에서 판단하기 힘든 일이라면 당직 교수님께 보고하시면 됩니다.”
지침서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디아나에게 필립이 질문했다.
“여자애들 자는 곳에 그냥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디아나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뭐 이상한 일입니까?”
“그거야… 한창 예민할 나이인데, 가족도 아닌 남자가 자는 곳에 들락거리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걸 걱정할 만한 아이들은 전부 개인실을 쓰거나 아카데미 밖에 지낼 곳을 구합니다. 애초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겁니까.”
필립은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버시 같은 건 없는 세상이군.’
생각해 보니 게임으로 이 세상을 즐길 때도 여주인공의 숙소에 남자 교관이 몇 번 들어왔던 기억이 있었다.
“여자 교관이 드물기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나저나, 교관님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디아나 프렌할은 필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말입니까?”
필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고생하시길. 해가 지기 전까지 조금 쉬어 두십시오.”
“아, 예.”
디아나 프렌할이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필립은 지침서를 다시 읽었다. 별 내용은 없었고, 아무래도 교관의 임기응변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보니 주요 비품의 위치가 내용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검술 학부의 다른 교관들이 필립을 두고 속닥거렸다.
“…여기서 사고를 치면 북부 전선으로 쫓겨난답니까?”
“아주 고생이겠습니다. 술이나 빨고 접대부들 엉덩이나 두드리던 양반이.”
“하긴, 저 같아도 그 빌어먹을 전쟁터로 끌려간다면….”
필립은 그 험담과 뒷담화 사이 어딘가에 속하는 대화를 모두 들었다. 당사자가 듣는 자리에서도 이런 수위의 대화가 오고 가는데,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오죽할까 싶었다.
‘한심한 인생들 같으니.’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따지고 보면 본래 필립이 살던 곳에서도 저런 경우가 많았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이가 드문 건 어느 세상이든 비슷한 모양이었다.
“병신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뭐라고?”
속닥거리던 교관 중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아까 접대부 어쩌고 하던 교관이었다.
필립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하론 베이브. 4학년 수업에 들어가는 평민 출신 교관이었다. 필립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어떤 병신이 생각나서요. 글쎄, 평민 출신에 뚜렷한 배경도 없는 주제에 겁대가리 없이 귀족을 모욕하지 뭡니까.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교관끼리는 상호 존칭을 한다지만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이….”
하론 베이브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콧김을 뿜었다. 그러나 차마 욕을 내뱉거나 칼을 뽑지는 못했다.
필립이 말한 것처럼 아무리 아카데미 내부라도 신분의 차이는 존재했다. 학장은 귀족에게 먼저 칼을 뽑은 자신을 감싸지 않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필립이 하론 베이브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혹시 내가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았습니까?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전 망나니지 병신이 아니거든요.”
하론의 손이 허리에 찬 칼 손잡이와 가슴 사이에서 벌벌 떨렸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뽑아봐. 병신아. 지금 안 뽑을 거면 앞으로 눈 착하게 뜨고 다니고.”
빠드득, 하고 치아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론의 심장 소리가 필립의 귀에 들릴 정도였다.
하론 베이브는 결국 검을 뽑지 못했다. 필립은 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근무 투입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교관님들.”
그리곤 학부실을 나섰다.
―…방금 좀 멋있었어요. 주인님.
방으로 돌아오자 네리아가 몽롱한 목소리로 필립을 칭찬했다.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멋있기는. 유치했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나더군.”
아무래도 루아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예상보다도 더 컸던 모양이었다. 필립은 멘탈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네리아는 잘생기면 뭘 해도 다 멋있어 보여요.
낯뜨거운 소리를 못 견딘 필립이 중얼거렸다.
“…월광검 수련이나 해야겠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좀 불러 줘.”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뒤 눈을 감고 몇 분 정도 마음을 가다듬자 필립의 머릿속에 여러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승받은 월광검의 내용에는 ‘형’도, ‘식’도 없었다.
그런 틀에 갇힌 사람은 입문할 자격조차도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달빛을 상징하는 검.’
떠오른 이미지들은 어그러지고, 무너졌다 재생성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도 필립은 뭔가를 얻어냈다.
‘달빛. 달빛은 사실 햇빛이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거니까. 내가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는 건가? 하지만 이 모든 이미지는 모두 달을 은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뒤 네리아가 필립을 불렀다.
―주인님, 슬슬 해가 지고 있어요.
“고맙다.”
필립은 네리아를 반쯤 뽑아 검신에 파인 혈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앗! 좋아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네리아는 혈조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그녀를 허리에 찬 필립은 방을 나선 뒤 근무 장소로 향했다.
교직원 기숙사를 나서 조금 걸으면 언덕 위에 학생 기숙사 두 채가 보였다.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 사이의 공터에 작은 관리실 느낌의 건축물이 하나 있었는데, 당직 근무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아, 오스왈드 교관님.”
안경을 쓴 마법 학부 교관이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필립을 반겼다. 그리 못난 인상은 아니었으나 안경테가 두껍고 뺨에 여드름 자국이 있어서 내향적인 성격처럼 보이는 외모였다.
“안녕하십니까. 페렉 교관님.”
필립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페렉 교관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같이 근무할 교관님이신데, 그 정도는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가 봅니다. 이렇게 친절한 분이신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필립이 조심스럽게 묻자 페렉 교관은 겁먹은 표정으로 필립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물보다 술을 더 자주 마시고, 가문 소속 기사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누님 되시는 펠리시아 교수님의 정혼자를 반쯤 죽여 놓은 다음 정원의 연못에 수십 번 담갔다 빼셨다고….”
깜짝 놀란 필립이 되물었다.
“아니, 제가 그런 짓도 했답니까?”
“네?”
“아, 아닙니다. 저, 그, 러니까. 어릴 적엔 누구나 이유 없이 화가 치밀고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 지금은 어린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게 뉘우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맞…는 말입니다. 뉘우친 만큼 노력해야죠.”
필립은 웃는 채로 얼굴을 굳혔다.
‘근데 이 새끼가….’
페렉 교수는 소심한 척, 겁먹은 척을 하면서도 은근히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뒤 페렉 교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저희가 네 시간마다 남자 기숙사에서 여자 기숙사로 이동해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괜찮으시면 계속 여자 기숙사에서 근무를 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왜입니까?”
“…순찰을 하고 있으면 가끔 화장실에 가는 아이들과 마주치는데, 아직 어린 1학년 2학년은 괜찮지만 4학년부터는 저를 좀…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순진한 남자 선생과 되바라진 여학생의 역학관계에 대해선 필립 또한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특히 페렉 교관처럼 소심한 성격이라면 여학생들의 악의 없는 장난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페렉 교관은 화색을 띤 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제 생각인데 교관님께는 아이들도 장난을 못 칠 겁니다.”
“왜입니까?”
“그거야 괜히 까불었다 처맞을까 봐…가 아니라, 함부로 장난을 걸기엔 교관님께선 너무 잘생기셨잖습니까. 괜히 점수 잃을 짓은 안 할 겁니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진짜.’
필립이 이를 살짝 물었다. 선을 간당간당 넘나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솔직히 조금은 웃겼다. 필립은 치밀어 오르는 헛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고생하시고, 오전 여섯 시에 뵙겠습니다.”
페렉 교관은 책 한 권과 짧은 지팡이를 챙겨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예. 고생하십시오.”
그렇게 필립의 첫 숙직 근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