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 * *
3월 7일.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신입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학생들은 하루 전에만 도착해도 되었으나 쓰던 물건이나 짐을 미리 옮겨야 하는 신입생들은 며칠 전부터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마치 풍경화처럼 멈춰 있던 아카데미 또한 오늘을 기점으로 바쁘게 변할 터였다.
그러나 필립의 일상은 나흘째 그대로였다.
* * *
끝없이 이어진 흙바닥 위에서 필립은 네리아의 세 번째 주인과 마주 섰다.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빛나는 갑주를 입은 기사였다.
―…네리아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가지고 놀다 죽이는 걸 즐겼거든요. 특히 재능 있고 잘생긴 오빠들을 제일 싫어했어요. 국왕의 사냥개로 활동하면서 왕권에 위협이 될 만큼 재능이 출중한 기사들을 몰래 죽이곤 했죠. 진짜 천재를 만나서 죽긴 했지만요.
네리아의 목소리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필립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체간이 단단했고, 자세가 공격적이었다.
몸에 밴 자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젠 필립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그는 자신보다 약한 먹잇감을 사냥하는 일에 능숙한 검사일 터였다.
필립은 몸의 중심을 낮췄다.
상대가 자신을 잡아먹으려 든다면 그 아가리 속에서 입천장을 뚫으면 될 일이었다.
곧 상대가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력이 담긴 한 걸음은 인간의 운동 능력을 우습게 초월해 몇 미터나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리고 검격이 날아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정석적인 공격.
필립은 상대의 바스타드 소드에 검기가 솟아 있는 걸 알아차리곤 급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필립의 검에서도 검기가 솟았다.
곧 일어난 충돌. 필립의 한손검과 상대의 바스타드 소드가 맞물리는 순간 필립은 자신의 마력이 열세라는 걸 실감했다.
적어도 두 배 차이.
그는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충격을 해소했다.
그런데도 남은 충격이 아주 잠깐 팔을 마비시킬 정도로 상대는 강했다.
‘할 만한데.’
그러나 필립은 씩 웃었다.
다시 벌어진 거리.
필립은 확신을 얻었고 상대는 불안을 얻었다.
필립은 상대의 수가 그리 깊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몸에 좋다는 건 다 먹고, 온갖 아티팩트로 얻은 힘이에요. 주인님이 저 나쁜 아저씨만큼 마력이 뛰어났다면 아마 주인님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걸요.
확실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네리아의 여섯 번째 주인이라던 용병 여인이 몇 배는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필립은 나흘 동안 적어도 수십 번의 실전을 치렀다.
네리아의 여섯 번째 주인과 일곱 번, 다섯 번째 주인이라는 방랑 검사와 열두 번, 네 번째 주인인 기사와 스무 번 정도.
게다가 눈앞의 상대와는 이미 세 번 맞붙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필립은 전신의 힘과 마력을 모아 앞으로 쇄도했다.
“….”
기사는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필립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렀다.
순간 필립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도약은 일대일 전투에서 금기나 다름없는 행위.
검사의 모든 동작은 하체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땅에 발을 붙이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엔 좋았다.
자신의 일격이 필립이 사라지고 없는 허공을 가르자 기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필립은 골반을 크게 틀며 몸 전체를 공중에서 회전시켰다. 모자란 힘과 절삭력은 마력과 검기가 해결해 줄 터였다.
그리고 필립의 검이 상대의 머리통을 쪼개려는 순간, 필립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번엔 네 번 만에 이기셨네요? 축하드려요!
“고맙다.”
―고작 나흘 만에 이렇게까지 성장하실 거라곤 네리아도 전혀 몰랐어요!
“딱히 내가 잘난 게 아니야.”
필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본래의 필립은 이것보단 조금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터였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을 지닌 ‘주인공’이 파티를 짜서 덤벼야 할 만큼,
그의 몸이 지닌 재능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줄거리 상 패배하기는 하지만.
‘대체 필립은 이런 재능을 가지고 왜 그렇게 산 거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만도 그 정도면 병이에요. 마력 차이가 얼만데 그걸 튕겨내고 수 싸움까지 몰고 간 시점에서 주인님은 그냥 재능으로 그 아저씨를 찍어 누른 거라고요.
네리아가 투덜거렸다. 필립은 그 귀여운 투정에 피식 웃음이 새는 걸 느꼈다.
그는 이 말 많은 에고 소드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강해지는 게 아니지. 이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냐가 문제다.”
―…대체 뭘 얼마나 잘 가르치시려고 그러는지 네리아는 모르겠네요. 주인님은 어느 기사단에 가셔도 실력자 취급을 받으실 텐데.
“넌 아무것도 몰라. 네리아.”
‘주인공’이 얼마나 괴물 같은 재능을 가졌는지 필립은 잘 알았다. 그, 혹은 그녀를 가르치기 위해선 적어도 한 발자국은 앞서 있어야 했다.
지금의 주인공은 고일 대로 고인 필립이 조종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언제든 실수해서 고꾸라질 수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당장 아카데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는 필립이 해결할 수 있었으나, 미래에 일어날 거대한 사건들은 주인공이 성장하지 못하면 손도 못 댈지도 몰랐다.
“…나는 살려고 이러는 거야.”
―아, 그러세요?
“개인적으로 네 말투가 조금 더 예뻤으면 좋겠…누구지?”
네리아와 투닥거리던 필립은 문득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오스왈드 교관님. 파노이 수석교수님께서 호출하셨어요. 검술 교장에서 기다리신다고….”
“네. 고마워요.”
하녀의 목소리였다. 필립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직속 상관이 부르니 가야겠군.”
―네리아도 데려가세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단 말이에요.
“음….”
필립은 잠깐 고민하다 그녀를 허리에 찼다.
* * *
수석교수 에밀 파노이는 필립의 기준에서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었다.
8년째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고는 있으나, 정작 아카데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네가 그 유명한 개망나니군. 만나서 반갑네.”
신입 교관을 학기 시작 사흘 남기고 처음 부르는 것도 그렇고 필립을 바라보는 시선만 봐도 뻔했다.
정상적인 교수라면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에 미쳐 살던 망나니 한량이 자기 밑으로 들어온다는데 저렇게 무심할 수는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수석교수님. 필립 오스왈드입니다.”
“그래. 펠리시아 교수의 동생이라고? 그 애는 기회만 있다면 자네를 죽일 기세던데. 남매 사이가 좀 안 좋은 편인가?”
“뭐, 그런 편입니다. 이번 기회에 잘 회복해 보려고요.”
―무슨 오랜 친구처럼 얘기하시네요. 주인님.
필립과 에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네리아가 중얼거렸다. 필립 또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대사도 몇 줄 안 되는 양반이 아랫사람들한테는 제법 친하게 구는군.’
학생 시점에서 플레이할 때는 존재감이 없던 인물의 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나?”
수석교수의 질문에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업 때문에 부르신 것 아닙니까? 저는 신입 교관이니까요.”
“아니. 그건 다른 교수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감 넘치는 꼬맹이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벽을 보여주는 게 내 역할이라네. 어린애들이란 참 단순해서, 자기가 약하다는 걸 꾸준히 알려 주지 않으면 자기 실력과 위치에 만족하거든. 고작 또래들 사이에서 힘 좀 주고 다닐 수준인데 말일세.”
“아, 그렇습니까?”
필립은 에밀 수석교수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에는 교관이나 교수도 마찬가지라네. 프리비아 아카데미에서 교육자로 일한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지. 그런 명예로운 일을 몇 년 하다 보면,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거든.”
에밀 수석교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석에 굴러다니던 목검 한 자루가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흐엑. 저게 뭐야.
네리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자네도 일단 벽부터 마주하게.”
곧 수석교수가 든 목검에서 거친 해일과도 같은 마력이 솟구쳤다. 그 마력은 곧 형체를 이루어 이글거리는 불꽃의 형상을 취했다.
그리고 필립은 순식간에 물러나 네리아를 뽑았다.
―주인님, 검강이에요! 검강! 어서 도망치세요! 저건 못 이겨요! 상대는 마스터라고요!
네리아가 호들갑을 떨었으나 필립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드넓은 왕국 땅에서도 오직 몇 명에게만 허락된 검술의 정화가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에밀의 검 위에서 넘실대었다.
현재 수준으로는 정확히 측정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폭풍과 마주하면서도 그는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검강이라는 높은 벽을 마주한 순간 필립은 그 막대한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에밀 수석교수의 자세와 시선에서 정보를 캐냈고,
손에 든 검은 아주 작은 원을 그리며 에밀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마치 며칠과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필립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에밀 수석교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필립의 시선이 자신의 급소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헛웃음을 흘렸다.
“하, 이것 보게. 내가 이래서 선생 노릇을 못 그만둔단 말이야. 대충 시간 좀 죽이고 있다 보면 어디서 괴물딱지 같은 것들이 하나씩 나타나거든. 세상에, 벽을 보라고 했더니 계단을 보는 놈은 네가 처음이군.”
먼저 자세를 푼 건 에밀이었다.
목검에 어린 검강 또한 본래 없던 것처럼 사그라졌다.
그는 목검을 대충 근처에 던진 뒤 천천히 다가와 아직도 굳어 있는 필립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밀 하나 알려주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곤 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네는 들어도 될 것 같아서.”
“….”
대체 무슨 비밀을 말하려는 건지 필립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펠리시아, 그 애는 내가 검강을 뽑자마자 눈물을 찔끔 흘렸어. 나름대로 티를 안 내려곤 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나중에 이걸로 잘 놀려먹게.”
곧 필립의 귓가에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렸다.
하지만 필립은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 뭣도 아닌 놈들이 망나니니 쓰레기니 쫑알대는 게 말일세. 등 따시고 배부른 병신들이 아무렇게나 주절대는 꼴이 웃기기도 했겠지.”
에밀 수석교수는 필립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뒤 혼자 킥킥대며 검술 교장을 떠났다.
―…방금 뭐였죠?
네리아가 속삭이는 소리에 필립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점수를 딴 것 같은데.”
―좋은 건가요?
“모르겠군. 그래도 덕분에 대충 알 것 같다.”
―뭘요?
“마력이란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필립은 눈을 감고 방금 상황을 회상했다.
‘마력이라는 게 저렇게 유동성이 큰 에너지라면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겠는데….’
그는 새로 눈뜬 마력이라는 힘에 대해 점점 파악해가고 있었다.
에고 소드 네리아는 그녀로선 드물게도 말을 아꼈다. 백 년 동안 주인이 여섯 번 바뀐 그녀였으나 이 일곱 번째 주인을 파악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잘생겼으니 됐어.
“응? 뭐라고?”
―아니에요. 그럼 이제 뭐 하실 거에요?
필립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책 읽으러 도서관에 갈 건데, 너도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