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 * *
검기.
강철마저도 벨 수 있는 검술의 오의.
그 강력한 기술을 펼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카데미 히어로즈’에서는 강자 취급을 받는다.
명문 중의 명문인 프리비아 아카데미에서도 주인공과 재능이 극히 뛰어난 몇 명 외에는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닿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필립은 아카데미 교관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건 내 것이 아니지.’
그는 단지 몸이 기억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뿌리부터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과연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필립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어떻게든 속여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같은 교관이나 더 높은 경지의 교수들은 절대 속일 수 없었다.
물론 그에게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일주일.
그 안에 몸이 이룬 경지만큼 머리가 따라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게 필요하겠군.’
필립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어쩌면 최악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최고의 해결책이 될지도 모를 물건.
계획대로만 된다면 필립은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 * *
필립은 ‘아카데미 히어로즈’를 플레이한 지 꽤 오래됐다.
비록 모든 도전과제를 완수할 만큼 골수 유저였다고 해도 기억의 누수는 어쩔 수 없는 법.
그러나 때론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존재했다.
필립은 그 기억 중 하나가 어쩌면 자신을 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디냐.”
아카데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야산,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봉우리 기슭에서 필립은 어떤 물건을 찾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 안에는 찾아내야 하는데. 진짜 시간이 없는데.’
거친 나뭇가지가 소매를 긁고 뺨과 드러난 손에 생채기가 났으나 필립은 멈추지 않고 수풀을 헤집었다.
다행히 필립의 몸뚱이는 튼튼했다.
나름대로 어린 시절부터 검을 수련해 온 그의 몸은 방탕한 생활로 조금 망가졌다 해도 평범한 사람의 신체보다는 월등한 수준이었다.
‘스토리 상, 무조건 내가 담당할 반에 그들이 온다.’
‘그들’은 이 세상의 주인공을 의미했다. 필립식으로 말하자면 플레이어블 캐릭터 정도.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한 필립은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오늘은 3월 4일. 사흘 후인 3월 7일이면 도착할 신입생 중에 갈색 머리칼의 쌍둥이 남매가 온다.
그들 중 한 명은 무조건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유저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둘 중 하나를 주인공으로 선택할 수 있고, 선택받지 못한 한 명은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장인 헬버른의 친우, 대현자 일록시나의 제자로 간택되어 아카데미를 떠난다.
그에 비해 플레이어에게 선택된 주인공은 한 학기 동안 ‘필립’의 패악질과 혼자 남은 외로움을 견디며 친구를 만들고 강해지다가 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필립을 두드려 패서 쫓아내게 된다.
정상적이라면 필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
그러나 필립은 절대 일찍 실업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패악질 안 부리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애들을 가르칠 능력부터 얻어야지. 짤리기 싫으면.’
교관의 역할은 가르침이었다. 학생 문제가 아닌, 선생의 가르침이 시원찮으면 쫓겨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이 바로 지금 필립이 찾고 있는 ‘수다쟁이 검 네리아’였다.
본래 정상적인 유저라면 절대로 쓸 일이 없는 아이템. ‘검술 숙련도’의 증가 속도를 상승시키는 대신 가장 중요한 파라미터인 ‘스트레스’를 극도로 상승시키는 쓰레기 아이템.
게임에선 얻을 때마다 분해소에서 갈아 버렸던 아이템이었으나 지금의 필립에겐 그게 간절했다.
그건 지금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에고 소드’였다.
그 검은 이 산 어딘가에 박혀 있을 터였다.
“오. 오오!”
필립은 오래지 않아 수다쟁이 검 네리아의 단서를 찾아내었다.
본래는 무작위로 위치가 정해지지만, 게임에 완벽한 무작위는 없는 법.
스폰 장소에도 일정한 법칙이 존재했다.
고인물인 필립에겐 그 법칙은 도로교통법보다도 친숙한 것이었다.
“다람쥐 모양 바위 근처랬나.”
게임 속 캐릭터가 지나가면서 흘린 대사를 기억해 낸 필립이 근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근처의 얕은 개천 밑바닥에서 물이끼 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처참한 상태의 검을 한 자루 발견했다.
“이게 그 전설의….”
필립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는 이 검을 뽑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대략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만일 주인이 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주인의 스트레스 수치가 순식간에 차오른다는 것.
스트레스 수치가 게임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필립은 그 정보를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각오를 마친 필립이 눈을 질끈 감으며 검을 뽑자, 곧 그의 머릿속에 앳된 목소리가 울렸다.
―앗, 잘생긴 오빠다. 오빠가 네리아의 새로운 주인이에요??
발랄하고 깜찍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필립은 잠깐 생각했다. 생각보다 별 것 없는데, 하고.
오히려 귀여운 목소리라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음을 그는 곧 알게 되었다.
―와세상에믿을수가없어오랜세월을기다리고기다리고또기다렸더니드디어네리아의마음에쏙드는주인님을만났어요지금까지주인들은죄다우락부락못생기고험악한아줌마아조시들이어서네리아는너무괴롭고힘들었단말이에요이렇게잘생긴오빠가네리아의주인이라니도저히믿을수가없어요고마워요사랑해요네리아는지금부터착한아이가되어서오빠랑오래오래함께할래요네리아를버리지않는다고꼭약속해줘요알겠죠??
“으악 시발!”
필립은 경기를 일으키며 다급히 검을 내던져야만 했다.
―빼애애애앵!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주인님! 오빠!
내팽개쳐진 검이 귀신 들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펄떡거렸다.
‘애들은 대체 저런 걸 들고 어떻게 버텼지?’
수다쟁이 네리아를 버텨낸 아이들에게 존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필립은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에고 소드를 집었다.
검신이 부르르 떨리는 게 마치 우는 것만 같았다.
―왜! 왜 갑자기 던지고 그래요!
“미…안하다. 조금 당황스러워서.”
필립이 사과하자 에고 소드 네리아는 기분이 조금 풀린 듯했다. 검의 떨림이 멈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사람이 당황하면 뭐 그럴 수도 있죠. 네리아는 마음이 넓으니까 이해할게요. 대신 다시는 네리아를 그렇게 던지지 말아요.
“그래. 약속할게.”
―으음, 아무튼 오빠는 합격이에요. 네리아를 다룰 자격이 충분해요. 재능도 그렇고, 얼굴도 잘생겼잖아요. 마지막으로 버려진 장소가 하필 아카데미 근처라서 혹시 어린애 손에 들어갈까 봐 불안했거든요.
“…왜?”
―그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크흠! 아가들은 네리아 취향이 아니니까요. 네리아는 잘생기고 아름다운 언니 오빠들이 좋아요.
필립은 이제야 이 쓰레기나 다름없었던 에고 소드의 비밀을 알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이 검을 들면 스트레스 수치가 오르는 이유.
그건 단순히 이 검의 취향이 까다로워서였다.
다행히 필립은 이 검의 취향 안쪽인 듯했다.
“내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내겐 네 도움이 필요했거든.”
―도움이요?
“그러니까….”
필립은 자신의 상황을 조금 각색해서 설명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탓에 검술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당장 일주일 후부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끝나자 네리아는 이해한 듯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무슨 조건?”
필립은 잠깐 고민했다.
어쩌면 이 버르장머리라곤 없는 에고 소드를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처박은 뒤 일주일 내내 수련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일단 네리아를 깨끗이 씻겨 주세요. 그리고 주무실 때 꼭 네리아를 옆에 두셔야 해요.
정말로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기에 필립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네리아를 손에 든 채 터덜터덜 하산하기 시작했다.
* * *
필립은 깨끗하게 씻은 뒤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아직 오전 열한 시. 낮잠을 즐기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이게 맞나.’
필립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에고 소드의 말을 듣는 길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수다쟁이 네리아’. 그녀는 필립에게 자신의 본체인 검을 가슴 위에 놓고 잠들 것을 요구했다.
―주인님은 혼자서 검을 아무리 휘둘러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예요.
“…대체 왜지?”
―혼자 수련하는 건 자세를 몸에 익히기 위해서인데, 주인님은 그 반대잖아요. 몸에 익힌 검술을 머리가 못 따라가는 건데. 그냥 네리아를 믿고 몸을 맡기세요. 자,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드세요. 어서요.
마치 최면술사처럼 무의식에 스며드는 목소리였다.
필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뭐가 보이세요?
멍한 채 필립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그게 주인님 미래에요.
“뭐라고?”
―네리아의 귀여운 장난이었답니다! 자, 이제 뭐가 보이실걸요.
그녀의 말대로 어두워야 할 시야가 조금씩 흐릿해지며 빛을 찾아갔다.
곧 하얀 배경에, 끝없이 이어진 흙바닥이 보였다.
그리고 그림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아지랑이처럼 제멋대로 일렁거리더니 이윽고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천천히 본래 가졌던 형체를 되찾아가는 듯 보였다.
―이젠 뭐가 보이세요?
“…용병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군.”
그림자는 색채를 되찾고 부피를 되찾은 뒤 곧 구릿빛 피부의 용병 여인이 되어 나타났다. 사람 팔보다 조금 짧은 숏소드를 들었고 가죽 갑옷을 입었다.
―예쁜가요?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은데.”
선이 굵고 거친 인상의 여자였다. 네리아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 멧돼지 같은 아줌마한테 매력 같은 건 없어요. 아무튼, 주인님 손에는 제가 있어요. 그리고 저 아줌마는 주인님을 가족과 친구의 안전,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할 거예요. 곧 죽일 기세로 덤벼들겠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싸워야겠군.”
필립이 중얼거리는 즉시 용병 여인이 숏소드를 거세게 휘둘렀다. 용병 특유의 거친 살기가 필립의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찰나, 필립은 여인의 무게 중심을 파악했다.
‘베는 기세와 달리 앞쪽 발에 지나치게 무게가 실렸어. 이러면 내가 이겼지.’
다음 순간 필립이 든 네리아가 움직였다. 그는 손쉽게 여인의 숏소드를 튕겨내었다.
이제 훤히 드러난 여인의 급소 중 하나만 노리고 검을 휘둘러도 싸움은 끝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검을 움직일 수 없었다.
“……흡.”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고통이라는 단어를 조금 초월한 충격이 그의 육체와 정신을 뒤흔들었다.
용병 여인의 오른발이 그의 사타구니를 정확히 가격한 것이었다.
필립은 그 순간 짧았던 꿈에서 깨어났다.
“…….”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견딜 뿐이었다.
그 초인적인 의지력에 네리아는 감탄했다.
―괜찮으세요?
그 물음에 필립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여는 순간 겨우 억누르고 있던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멧돼지 아줌마는 네리아의 여섯 번째 주인이에요. 네리아를 가졌던 사람 중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성질이 더러운 주인님이었답니다. 마흔 살까지 노처녀로 살다가 데리고 놀던 술집 남자한테 배신당해서 죽고 말았죠.
“그런 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겨우 고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필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네 주인이었던 이들을 내 꿈속에 소환해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이니.”
―그렇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이렇게 훈련하시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고통은 줄일 수 없는 거고?”
―네리아는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에고 소드의 뻔뻔한 목소리를 들으며 필립은 직감했다.
분명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주일이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