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2화 (2/119)
  • 002화

    * * *

    결론적으로, 그에겐 정말로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실력이 필요했다.

    최소한 게임 속의 원본 ‘필립’이 이르렀던 경지에 그 또한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짧은 시일 내에.

    원본 필립은 그나마 검술 실력이라도 좋았으니 아카데미에서 버틸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되겠냐고.”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 필립은 개망나니였으나 나름대로 고급 교육을 받은 검사였다.

    게다가 검술 재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라는 설정 때문에 원작에서 주인공 일행과 전투가 일어났을 땐 검기까지 능숙히 다뤘던 것으로 기억했다.

    ‘생각해 보니 더럽게 잘난 놈이었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살았지? 성질을 조금만 죽이고 살았으면 됐을 텐데.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아.’

    필립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잠깐 고민했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한 게 뭔가 계기만 있으면 떠오를 것도 같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오스왈드 교관님.”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학장님께서 교관님을 호출하셔서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지금 학장실로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무래도 호출을 전하러 온 하녀인 모양이었다.

    “바로 준비하고 올라가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네. 알겠어요.”

    필립이 대답하자 하녀의 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군.’

    필립은 침착하려고 노력했으나 관자놀이 아래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필립의…그러니까 이젠 내 어머니와 학장은 가까운 관계였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명예로운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관 자리까지 청탁할 정도라면 보통 관계는 아닐 터.

    아마 예전의 애제자거나, 혹은 아래 두고 부리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사실 그건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야.’

    문제는 학장 그 자체였다.

    대현자 로셀로 그레이엄.

    그는 프리비아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자,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이 중 한 명이었고, 현재 필립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결정권자이기도 했다.

    “하아….”

    필립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채비를 갖춰 자신의 방을 나섰다.

    * * *

    교직원용 기숙사 건물을 나오자 본관까지는 금방이었다.

    학기 시작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라 본관은 한산했다. 기껏해야 청소하는 하녀 몇 명과 사무를 돕는 직원 한두 명을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들 중 필립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를 외면했다.

    ‘소문이 벌써 퍼진 건가.’

    그러나 필립은 걱정하지 않았다. 저런 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학장실 앞에 도착한 필립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그를 맞았다.

    “들어오게, 필립 오스왈드 군.”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필립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학장님.”

    문을 열 필요는 없었다. 저절로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필립이 안에 들어서자 간소한 학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장식품도 없이 몇 가지 마법 도구나 책장, 그리고 책상뿐인 내부였다.

    대현자 로셀로 그레이엄은 마치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느낌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가 얼마나 괴물인지 아주 잘 알았다.

    ‘…마법 실력이 드래곤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지. 그리고 손을 쓸 때는 망설임이 없어.’

    그는 손가락 하나로도 지금의 필립을 눌러 죽일 수 있는 강자였다.

    “앉게. 필립 군.”

    “예.”

    필립이 의자를 당겨 앉자 학장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라는 인간 그 자체를 읽히는 듯한 기분에 필립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그동안 자네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익히 들은 참이니, 따로 묻지는 않겠네.”

    ‘역시 아는군.’

    호의적인 반응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필립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자네를 교관으로 받아들인 건 나로서도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알맞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이해합니다. 학장님.”

    “자네의 어머니, 셀레니아는 내 평생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이었지. 하지만 그 아이의 아들이라고 해서 자네를 특별히 취급할 생각은 없네.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자네는 쫓겨날 걸세. 이해하는가?”

    필립은 지금이 질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로셀로 그레이엄은 대현자라고 불리기 알맞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학생이나 교직원이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마족이나 무법자, 그리고 배신자처럼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를 해칠 수도 있는 이들.

    딱 그 정도였다.

    그와 같은 인격자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필립의 이미지가 그만큼 나쁘다는 걸 의미했다.

    필립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학장과 시선을 마주쳤다.

    “예. 그것 또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그렇지 않나?”

    학장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백 세 가까이 살아온 그의 지혜는 고작 몇 마디 말로 흔들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필립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최고의 스승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며 겪을 고난과 역경에서 자그마한 버팀목이라도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학장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자세, 의지가 담긴 눈빛.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

    필립이 보이는 태도는 소문과 달랐다.

    들은 대로 필립이 살롱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질 나쁜 이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했다면 저런 눈빛은 절대 가질 수 없었다.

    “…그래. 잘 들었네. 이만 가보게. 새학기를 준비하려면 바쁠 테니.”

    “예. 학장님.”

    축객령이 내려지자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대현자 로셀로 그레이엄은 한참이나 필립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버팀목이 되겠다고?”

    오랜 세월 아카데미에서 교육자로 살아온 학장은 알 수 있었다.

    필립이 내뱉은 그 교육관이 결코 짧은 세월 동안 만들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 * *

    “…후.”

    학장실을 나온 필립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립은 자신의 말이 학장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새학기를 준비하려면 바쁠 거라고 했지.’

    그래도 일단 나쁜 인상을 주지 않은 것 같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애초에 필립 또한 아무것도 보여준 것 없이 말만으로 뭔가 나아질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의 변화는 행동으로 보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본관 1층에 다다른 필립은 문득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학장과의 대화에서 긴장을 많이 한 탓이었다.

    화장실이 위치한 복도 서쪽 끝으로 걸어가던 필립은 화장실을 고작 몇 발자국 남겨두고 누군가와 마주쳤다.

    “필립…, 오스왈드.”

    푸른빛이 감도는 밝은 금발과 새하얀 피부. 성숙한 여인과 철없는 소녀가 겹쳐 보이는 얼굴.

    필립은 그녀의 얼굴이 익숙했다.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필립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니. 대체 날 언제까지 괴롭힐 셈이야? 네게 양심이란 게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도 잘 알잖니.”

    펠리시아 오스왈드.

    그녀는 이십 대 중반에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에 오를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사이자, 오스왈드 백작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초임 교수로서 처음엔 어설픈 모습을 보이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며 점점 성숙한 교육자로 변해가는 인물.

    펠리시아 오스왈드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필립은 그녀에게 있어 인생의 유일한 오점일 터였다.

    그녀처럼 완벽에 가까운 사람에겐 필립 같은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흠이 되었다.

    “너 같은 망나니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나 되니? 애들한테 뭘 가르칠 건데? 살롱에서 여자 꼬시는 법? 도박판에서 돈 따는 법? 너, 북부 전선으로 가기 싫어서 아카데미에 온 거라면 당장 짐 싸서 나가. 내가 아버지께 빌어서라도 어디 조용한 시골 영지로 보낼 테니까.”

    필립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다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상상 이상의 적대감이었다.

    ‘아니 그거 나 아니라고. 너무하네, 진짜.’

    “…말이 너무 심하시군요. 교수님.”

    “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솔직히 살롱에서 여자 꼬시는 법이나 도박판에서 돈 따는 법도 살다 보면 언젠가 도움이 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애들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필립의 뻔뻔한 말에 펠리시아 오스왈드는 헛웃음을 뱉으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하, 너 정말 미쳤니? 정신이 나간 거야?”

    금방이라도 마력을 끌어올려 필립을 한 대 칠 기세였기에 필립은 다급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장난이야. 누나. 아무리 내가 개망나니라지만 설마 그러겠어? 난 단지 내가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찾아왔을 뿐이라고.”

    “장난? 너랑 내가 서로 장난할 사이는 아닐 텐데?”

    펠리시아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는 여전히 경멸과 분노가 가득했다.

    필립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자신에게 가진 악감정의 깊이를 어느 정도 재어 보려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그녀는 필립을 증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섞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하는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내가 여기서 잘해 나가다 보면 누나와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겠지.”

    펠리시아 오스왈드는 필립의 말에 코웃음쳤다.

    “헛소리하지 마. 필립 오스왈드. 난 너를 잘 알아. 넌 절대 바뀌지 않을 거야. 엄마는 네가 망나니라도 사랑하겠지만, 나는 아니야. 물론 한때는 나 또한 네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지. 하지만 그 기대는 네가 내 하녀 릴리를 건드렸을 때 모조리 사라졌어.”

    그녀의 말을 듣던 필립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럴 만하군.’

    “여기서 말해두는데, 난 널 여기서 쫓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이야. 너 같은 쓰레기가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을 물들이는 거, 난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알아들어?”

    필립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행운을 빌어. 응원할게.”

    “꺼져, 필립.”

    펠리시아는 여자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

    그녀의 반응을 본 필립은 이제 완전히 이해했다.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펠리시아는 아주 조그만 빈틈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고 물어뜯을 터였다.

    * * *

    필립은 검술 교장으로 향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게 먼저였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검술 실력이었다.

    “…필립아, 나는 너를 믿는다. 우리 이러다 다 죽어. 진짜로.”

    그는 필립의 재능을 믿었다. 그 파탄이 난 인성으로도 아카데미에서 어느 정도는 버텨낸 만큼 재능만큼은 확실할 터였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기댈 구석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학기를 앞둔 만큼 창고에는 잘 관리된 목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필립은 그중 하나를 집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정보가 밀려들었다.

    ‘무게 중심이 진검과 거의 같군. 안에 박힌 철심에 신경을 많이 쓴 건가. 손잡이는 학생들 손아귀에 맞춰 달았고.’

    필립은 목검을 쥔 채 창고 밖으로 나와 연무장에 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검을 들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람은 보통 무언가를 학습할 때 뇌로 지식을 받아들이고 몸으로 그것을 익히는 법.

    그러나 필립이 느끼는 이 감각은 그것과 정반대였다.

    발이 얼마나 벌어져야 하는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검을 잡자마자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의 몸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필립은 자신의 몸이 지닌 재능이 정말로 진짜배기였다는 걸 확실히 자각했다.

    “…후우.”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깊게 마셨다. 단전에서 미증유의 힘이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할 수 있으니, 어서 날 끌어내라고.

    필립은 그 속삭임이 인도하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마력이 온몸의 힘줄과 근육을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난 널 믿었어. 필립.”

    그리고 필립은 곧 확인할 수 있었다.

    목검을 감싼 채 일렁이는 푸른빛 칼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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