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화 (1/119)

001화

* * *

예전에 인생을 갈아서 플레이하던 게임이 몇 년 만에 대규모 업데이트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모든 도전과제를 달성한 유저에게 특전을 부여한다는 공지가 떴다면?

그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자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를 보며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애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마침 잘됐군.’

이름난 입시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남자는 삶에 찌들고, 지쳐 있었다.

‘아, 당신이 뭔데요? 그래 봤자 우리 엄마한테 돈 받는 사람이잖아? 그럼 나도 고객 아니에요? 잔소리하려면 가서 국가고시나 보고 오시던지.’

학원 선생을 선생은커녕 윗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학생도 있었고,

‘쌤, 저 오늘 배가 아파서 좀 학원 못 나올 것 같아요.’

거짓말로 그를 속이며 이리저리 놀러 다니기 바쁜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학부모들이었다.

‘애 성적이 왜 저래요? 비싼 돈 주고 다니는데, 성적이 안 오르면 선생 문제 아닌가요?’

‘애가 말을 안 듣는 거야 선생님이 행동거지를 똑바로 못 하니까 그러는 거겠죠. 그럼 지금 저희 가정교육에 문제라도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식을 학원에 보내 놓으면 무슨 게임 자동 사냥처럼 성적이 오를 거라 기대하는 부모들, 그는 이 모든 것들에 지쳐 있었다.

“후….”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게임을 실행시켰다.

‘아카데미 히어로즈’

주인공이 아카데미에 입학해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게임.

남자는 게임 속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좋았다.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거나,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거나, 서로 경쟁하며 열정을 불태우고, 좋아하는 아이와 풋풋한 애정을 나누는 그런 모습들.

그런 것들이, 남자는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인한 법. 영악한 아이들과 책임감 없는 학부모 사이에서 남자는 점점 의욕을 잃어 갔다.

그래서 아마 이 게임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새 게임을 시작했다.

“보자, 뭐가 새로 나왔으려나.”

그는 곧 새로운 기능을 발견했다.

‘교관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고?’

‘아카데미 히어로즈’는 철저히 주인공인 학생 시점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었다.

수업을 들으며 강해지고, 모험을 하고, 친구들과 우정, 혹은 사랑을 나누며 점점 다가오는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내용.

그런데 주인공이 교관이라면 어떨 것인가.

“이걸 어떻게 참아? 절대 못 참지.”

남자의 직업은 강사였다. 그는 누구보다 이 새로운 컨텐츠에 몰입할 자신이 있었다.

“바로 시작한다.”

위이잉,

낡은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응?”

그리고 그의 시야 또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 어?”

* * *

“좆됐네.”

필립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건만 그에게 닥친 상황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현실감만 점점 더해 갔다.

“이게 진짜 꿈이 아니라고……? 그럼 이게 다 현실이라고?”

그는 언데드처럼 비척비척 걸어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 그가 평소 쓰던 흰색 원목 다용도 책상이 아닌, 중세풍의 고풍스러운 책상.

그곳에 놓인 건 양피지 한 장이었다.

빈 곳보다 까만 글씨로 채워진 공간이 더 많은, 그야말로 장문의 편지.

그 내용은 이랬다.

사랑하는 내 아들 필립.

널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렴. 지난번 그 일로 네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나셨단다. 내 말조차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분은 너를 가문에서 내쫓고 북부 최전선에 입대시키겠다고 하셨지.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서는 내 정성이 통했는지 네 아버지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하더구나.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검술 교관 자리를 만들어 뒀으니, 그곳으로 향하렴.

알다시피 이 엄마와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장님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란다. 그분께 연락을 드려 혹시 널 받아주실 수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시더구나.

네 소문을 이미 들으셨음에도 말이다.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필립. 사랑하는 필립. 네 검술 실력만큼은 네 아버지도 인정하잖니.

5년만, 딱 5년만 훌륭히 아이들을 가르쳐 보렴. 5년 동안 문제없이 교관 생활을 마치면 네 아버지도 널 용서한다고 하셨어.

다행히 프리비아 아카데미에는 네 누나가 있으니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다.

그 대신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이 엄마도 더는 널 보호할 수 없을 것 같구나.

…….

중략.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번에도 사고를 치면 전쟁터로 보내버리겠단 말이지. 그것도 마족과 싸우는 최전선으로. 그건 그냥 뒈지라는 거잖아.”

필립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필립 오스왈드. 검술 명가인 오스왈드 백작 가문의 방탕한 막내. 그에게 정말로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아니, 지난번의 그 일이 대체 무슨 일인데. 나도 좀 알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기억상실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기억이 없었다. 왜냐면 지금껏 방탕한 생활을 한 필립은 다른 필립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인물 설정집도 샀지. 어쩐지 시발 그걸 돈 받고 팔더라니.”

필립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했다.

지난 며칠간 느끼지 못했던 현실감이, 검술 교관으로서의 첫 수업을 앞둔 지금에 와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정말로 게임 속 캐릭터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비중 없는 악역이 되어서 말이다.

필립이 본래 알던 필립 오스왈드는 꽤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잘난 얼굴에 뛰어난 검술 재능을 지녔으나 어째서인지 인성이 좀 좋지 않은, 아니 파탄에 가까울 만큼 좋지 않은 청년.

그는 소년 시절부터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또래에 비해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꽤 많은 사고를 쳤다.

아카데미 교관이 된 후엔 명문가인 오스왈드 가문의 위세를 믿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다가 주인공을 잘못 건드려 복날 개 맞듯이 두드려 맞는다.

그리고 동생과 달리 주인공의 조력자 포지션인 누나 펠리시아 오스왈드의 손에 붙들려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뒤에 어떻게 됐더라? 북부 전선에서 마족에게 투항해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고 뭐 어떻게 했던 것 같은데.’

필립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과거를, 아니 자신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러나 워낙에 비중이 적은 인물이었기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게임 속 필립은 그야말로 주인공의 경험치 그 자체였다.

‘아니지. 그 상황까지 가면 안 돼.’

퍼뜩 정신이 든 필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빙의한 이상 ‘필립’이 그런 미래를 맞이해선 안 되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프리비아 아카데미에서 ‘필립’으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물론 검술 교관의 신분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필립은 두려움과 막막함에 몸을 떨었다.

“내가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 검도장도 다녀본 적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검을 아예 다룰 줄 모르는 개초보였다.

“차라리 학생으로 빙의시키지, 왜 하필 교관인데.”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현실이었으니까.

‘그래. 필립 이 새끼도 사람 새끼인데 애들 가르칠 준비는 해 놨겠지.’

필립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제아무리 막 나가는 망나니라도 최소한의 계획은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종이뭉치를 살폈다.

분명 뭔가 유효한 계획이 적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마를렌. 스물셋, ‘얌전한 고양이 살롱’ 소속. 향수나 희귀한 보석 같은 선물을 좋아함. 난이도 중상? 이게 뭐야 시발.”

그런데 내용이 이상했다.

“나르샤. 열아홉. ‘숙녀 거위 살롱’ 소속. 잘생긴 남자를 좋아함. 난이도 하.”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여자 이름과 그녀의 취향만이 적혀 있을 뿐. 정보를 종합해 본 필립은 곧 결론지었다.

“이거 시발 술집 여자 정보잖아.”

뒤늦은 깨달음은 더 늦은 분노를 일깨울 뿐이었다.

“필립…이 개새끼가 진짜….”

필립 오스왈드. 시뮬레이션 게임 ‘아카데미 히어로즈’의 엑스트라 악역.

그는 정말로 구제 불능의 망나니였다.

* * *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제쳐두고, 필립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난 아카데미 검술 교관이 되어 쥐뿔도 모르는 검술을 애들한테 가르쳐야 하는군.’

“…되겠냐?”

상식적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실패하면?’

가주이자 이 몸의 아버지인 오스왈드 백작의 손으로 대륙 최북단의 전쟁터에 던져질 터였다.

‘도망치면?’

아는 거라곤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필립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밖은 지옥이지. 차라리 전쟁터가 더 안전할 거야.’

게임 ‘아카데미 히어로즈’의 배경이 되는 ‘이툰다’ 대륙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상대는 마족.

안전한 내륙은 귀족들과 종교 단체들의 권역이었고,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언젠가는 정체를 들켜 전쟁터에 끌려가고 말 터.

아카데미 내부 사정에나 통달한 필립은 그들에게서 몸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필립이 신분을 숨기고 도망칠 수 있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복마전,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장소뿐.

사람 목숨이 벌레만도 못한 그런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곳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몇 개나 알고 있던 필립에겐 전쟁터보다 더 꺼려졌다.

필립은 달력을 바라보았다.

3월 4일. 봄의 초입이었다.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기가 3월 10일에 시작될 예정이니 오늘을 포함해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그 안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검술을 모르면서 검술을 가르칠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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