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117화 (117/117)

118화 페루에서 생긴 일 (3)

오스카의 검 끝이 윤한을 향했다.

심상병기(心像兵器), 용린갑(龍鱗鉀)을 유지한 채 윤한은 오스카의 움직임을 시야에 담았다.

오스카의 검 끝이 하늘로 향하자, 그의 기세가 급격히 변했다.

화경의 극에 이르면 수련자는 내면에 새겨진 규칙을 자신의 몸에 적용할 수 있었다.

천진혁의 경우 완전(完全)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규칙을 몸에 덮어씌울 수 있었다.

내공이 마르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으며, 적을 놓치지 않는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윤한은 아직 화경의 극에는 이르지 못했다. 현재 윤한은 화경의 완숙. 소세계가 완성돼 심상의 일부를 현실로 꺼내 올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다면 그런 윤한을 발아래에 둔 오스카의 경지는 어디일까.

천진혁과 똑같은 화경의 극?

가장 희망적인 예측이었지만, 윤한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상대가 절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끝없는 단련을 통해 내면에 소세계(小世界) 혹은 소우주(小宇宙)를 완성하는 경지를 흔히 화경(化境)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다음 경지인 현경(玄境)은 어떤 경지일까.

현경에 오르기 위해선 소세계를 단단히 굳히고 넓혀 대세계(大世界) 혹은 대우주(大宇宙)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수련자는 내면에 새겨진 규칙을 조금 더 폭넓게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자신에게만 적용되던 규칙을 상대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바로 지금처럼.

윤한이 힘겹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몸이… 무거워.’

아니. 이건 몸이 무거운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래.

마치 주위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윤한이 당황하자 오스카가 검을 움직였다.

윤한이 다급히 주먹을 들어 올렸으나,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물속을 거니는 듯한 답답함에 윤한이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덕분에 약간은 나아졌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오스카의 검을 앞에 둔 상태라면 더더욱.

엘리셀류, 심상기(心想技).

프로스트 소울(Frost Soul)

쩌적. 윤한과 오스카 사이에 무언가 생겨났다.

그것은 냉기의 정수였다.

그것은 설산의 의지였다.

그것은 겨울의 핵이었다.

프로스트 소울을 중심으로 반경 10m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공기의 흐름도, 마나의 흐름도.

그리고, 윤한도.

모든 것이 정지한 장소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오스카의 검뿐이었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오스카의 검에 냉기가 모였다.

어마어마한 기운에 윤한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윤한이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이 가득 찼다. 그 순간.

크롸롸롸롸!

윤한의 등 뒤에서 거대한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각성 능력, 암영세계(陰影世界).

섀도우 드래곤(Shadow Dragon).

그림자로 이루어진 용을 뒤집어쓴 엔도 이츠키가 앞으로 내달렸다.

서리의 공간에 침투한 엔도 이츠키가 오스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윤한이 현재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서리의 공간과 오스카의 법칙이 이중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엔도 이츠키라도 비교적 서리의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서리의 공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윤한과 비교해 상대적인 것이지, 엔도 이츠키도 서리의 공간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서리가 온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환경에서 엔도 이츠키가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지만, 평소와 같은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최상의 컨디션을 기준으로 수련을 한다.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혹은 제약이 걸린 상태를 가정하고 수련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일반적인 수련에 비해 빈도수가 적었다.

이런 식으로 몸에 제약이 걸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부상을 입은 게 아닌 순수하게 제약만이 걸린 상황이면 더더욱.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엔도 이츠키는 포기하지 않고 양손을 허리춤에 모았다.

우우웅!

양손에 압축되며 모이는 그림자.

기술이 준비된 직후, 엔도 이츠키가 양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각성 능력, 암영세계(陰影世界).

섀도우 브레스(Shadow Breath).

용의 숨결이, 오스카를 덮쳤다.

콰아아앙!

그림자가 공동을 집어삼켰다.

공동이 흔들렸다. 그만큼 섀도우 브레스에 담긴 위력이 엄청났다는 뜻이었지만.

“‘소란스럽군.’”

정작 공격에 당한 당사자는 평온한 목소리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용의 숨결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림자에 덮쳐졌던 오스카가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드러내며 엔도 이츠키의 복부를 걷어찼다.

저항 없이 뒤로 날아가는 엔도 이츠키. 으윽! 노린 건지 우연인지 엔도 이츠키와 윤한의 몸이 부딪히며 두 명 다 땅에 널브러졌다.

벌떡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을 향해 오스카가 재차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냉기가 모였다.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 흉흉하고 날카로운 냉기가.

엘리셀류, 진오의.

프로스트 스톰(Frost Storm).

냉기의 폭풍이, 엔도 이츠키와 윤한을 덮쳤다.

엔도 이츠키의 그림자 용과 윤한의 뇌룡이 발악을 했지만, 시간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서리의 폭풍 앞에서는 전부 무의미했다.

서리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윤한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기침을 했다. 쿨럭. 새하얗게 얼어붙은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깊은 내상을 입은 윤한이 손을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엔도 이츠키 또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윤한과 엔도 이츠키가 동시에 오스카를 바라봤다.

오스카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방금 그것이 전력이 아니었다는 듯, 가벼운 인사치레에 불과했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오스카의 일격을 막아 낸 윤한의 입장에선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안 좋아.’

윤한은 손등으로 입가를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생각했다.

어쩌면, 살면서 겪었던 일 중 가장 위험 상황일지도 모르겠다고.

“얼마나 싸울 수 있어?”

“거의 한계다.”

그 말에 윤한은 작게 혀를 찼다.

자신도 거의 한계에 가까웠는데, 엔도 이츠키도 그렇다고 하니 막막한 것이다.

윤한이 머리를 굴렸다. 천진혁이었다면 어떻게든 승리할 방법을 찾았겠지만, 윤한은 그런 싸움광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도주하고 싶은 게 윤한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저런 실력자 앞에서 대놓고 등을 보이는 건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뭔가, 방법이 없나?

그렇게 윤한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을 때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한 남자의 목소리가 윤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으로 그리 의기양양했던 거냐?’”

털썩. 누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브라질의 S급 각성자를 단번에 살해한 빨간 머리의 권사, 루이스였다.

무릎을 꿇은 루이스 앞에는 주리엔이 평온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주리엔이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대우주를 완성했으니 현경은 맞지만, 뭔가 묘한데. 경지에 비해 숙련이 덜 됐어. 네 녀석,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현경에 오른 게 맞나?’”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진 않지.’”

피식 웃은 주리엔이 검을 들었다.

“‘다음은 넌가?’”

주리엔의 검 끝이 오스카를 향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오스카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오스카가 물었다.

“‘네 녀석, 뭐지?’”

“‘내가 누구냐고? 설마 모르나? 이 주리엔 님을?’”

“‘검제의 위명이야 널리 퍼졌지. 근데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주리엔의 명성은 세계적이었다. 세계 최강자가 누구인가 가릴 때 반드시 등장하는 세 명. 검신 천진혁, 검제 주리엔, 현자 멀린을 모르는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갓난아기든가, 이세계 트럭에 치였다가 간신히 지구로 돌아왔든가.

그렇기에 오스카는 주리엔이 누군지 잘 알았다. 일반인도 누군지 아는 주리엔을 각성자 소식에 민감해야 하는 범죄 조직의 간부가 모를 리가.

하지만 동시에 오스카는 주리엔이 굉장히 낯설었다.

주리엔의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S급 중 최상급. 즉 천진혁과 같은 경지.

그런데 지금 주리엔을 보라. SS급, 현경의 경지에 오른 루이스를 단번에 쓰러트린 주리엔이 어딜 봐서 S급이란 말인가.

누가 봐도 SS급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주리엔의 힘과 실제 경지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뜻이다.

주리엔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자신의 힘을 5할 숨겨라. 내 고향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격언이지.’”

“‘경지 하나를 낮추다니. 숨겨도 너무 숨겼군.’”

“‘그래서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나는 너네같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녀석들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걸 보는 게 너무나 좋거든.’”

말을 마친 주리엔이 검을 들었다. 더는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주리엔의 검 끝에서 향기가 퍼져 나갔다.

화산의 매화검수의 상징과도 같은, 매화 향이었다.

오스카 또한 검에 냉기를 모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긴장감이 차올랐을 때.

오스카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무슨.’”

주리엔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버로드’의 보스가 무언가 하는 중인 건 알았지만, 이런 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주리엔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 천마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을 때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벽을 넘고 천마의 목을 베어 넘겼을 때의 일을.

지금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나, 기(氣)의 폭풍은 그때 일어났던 현상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아니. 닮아 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저건, 주리엔이 화경에서 현경의 경지에 올라갔을 때보다 더 격한 기의 폭풍이었으니까.

‘설마?’

혹시나 싶어 주리엔이 표정을 굳힌 직후.

쩌적. 거대한 알이 갈라지는 소리가 공동에 퍼져 나갔다.

크롸롸롸롸롸!

알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검은 비늘. 세로로 찢어진 동공. 그리고 날개.

모든 생명체의 정점. 마법의 종주. 중간계의 수호자.

드래곤.

녀석이, 알에서 태어난 것이다.

[배고파.]

“‘나쁘지 않군.’”

결과물에 만족한 건지 ‘오버로드’의 보스, 아더가 턱을 쓰다듬고는 원정대를 바라봤다.

이 세계에 환생한 후로 처음 느끼는 위기감에 주리엔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저 드래곤도 심상치 않았지만, 그 앞에 있는 아더 또한 심상치 않았다.

자신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가 두 명이나 있다니. 굉장히 좋지 않았다.

주리엔은 상황을 판단했다.

살아 있는 S급 각성자가 2명이었지만, 이미 한계에 가까워 보였다. 멀쩡한 A급 각성자 수십 명은 크게 도움이 안 됐고.

크르르릉.

블랙 드래곤이 낮게 울었다. 그것만으로 주변의 마나가 공포에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블랙 드래곤이 말했다.

[배고파.]

드래곤은 마나 생명체다.

드래곤도 음식을 먹긴 하지만, 그건 생명 활동을 위해서가 아닌 기호를 충족하고자 하는 의미가 강했다.

즉 지금 블랙 드래곤 배가 고프다고 하는 건 마나를 바치라는 의미였고, 블랙 드래곤이 마나를 바치라고 말할 때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생명력’을, 제물을 바치라는 뜻이다.

“‘배가 고프다라. 다행히도 재료는 충분하군’”

수십 명의 공략대원을 훑어본 후 아더가 이어 말했다.

“‘가만히 있게, 아니면 아픈 꼴을 볼 테니.’”

“‘건방진!’”

주리엔이 검에 내공을 모았다.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 하는 아더의 행동에 분노가 차오른 것이다.

격한 기세를 내뿜는 주리엔을 흘긋 바라보며 아더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녀석을 처리해라.’”

[배고파.]

* * *

충격적인 소식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페루에 생성된 S급 게이트 공략 실패. 던전 브레이크 발생.

S급 각성자 전원 생사불명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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