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페루에서 생긴 일 (1)
윤한은 정부에서 지원해 준 전세기에 탑승한 채 생각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태국에 S급 게이트가 열린 게 불과 2주일 전이건만, 마치 몇 년 일인 것처럼 S급 게이트가 또 열렸다.
그나마 동시에 안 열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윤한은 창문을 통해 지평선 끝에 걸린 구름을 시야에 담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때 천진혁이 있으면 든든한데.’
최근 S급 게이트를 하도 공략한 탓에 이제 S급 게이트가 출현해도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으나, 그래도 S급 게이트는 S급 게이트였다.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각성자의 정점인 천진혁이 함께 있었다면 굉장히 좋았겠지만, 그 수련 중독자는 질리지도 않고 사방이 막힌 방 안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윤한은 마지막으로 본 천진혁의 약간 밝아진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도 고생이라는 걸 하는구나.
평생 안 할 줄 알았는데.
백한영에게 조언을 듣고 눈빛이 맑아진 천진혁을 떠올리며 윤한은 승무원을 불렀다.
그렇게 간단한 식사로 허기를 때운 윤한은 안대를 쓰고 잠들었고, 일어났다.
창밖을 보자 대륙이 보였다.
이번에 S급 게이트가 열린 곳, 페루였다.
* * *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S급 게이트는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이고 있습니다. 주리엔 님은 이미 와 있습니다.”
“주리엔?”
주리엔. 최초의 S급 각성자로, 천진혁과 같이 인류 최강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윤한은 천진혁이 주리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지만, 그게 주리엔이 반갑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주리엔 같은 강자가 함께하면 공략할 때 든든한 정도가 달랐다.
대충 돼지국밥을 깨끗하게 비운 수준의 든든함이라고 보면 됐다.
국제 각성자 협회원의 안내에 따라 개인실에 짐을 푼 윤한은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느라 생긴 피로를 없애기 위해 몸에 당분을 충전해 줄 생각이었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시킨 윤한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봤다.
디저트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몸에 생기가 돌았다.
부산 사나이가 여유를 즐기는 법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
한참을 설탕이 가득 들어간 디저트를 입에 집어넣던 윤한은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들었다.
친하진 않지만, 국제적인 공조로 몇 번 같이 일을 해서 안면은 있는 녀석.
일본의 S급 각성자, 엔도 이츠키였다.
윤한은 다급히 들고 있던 커피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 큰 덩치가 커피잔에 가려질 리가.
윤한과 눈이 마주친 엔도 이츠키는 천천히 손을 들며 윤한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어.”
“여어는 무슨.”
윤한이 작게 한숨을 쉬며 커피잔을 내려놨다.
말했듯 윤한은 엔도 이츠키와 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윤한은 엔도 이츠키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모순되는 문장 같았지만, 모순이 아니었다.
한 명이 계속 떠들고 거기에 대충 맞장구치는 것도 대화는 맞으니까.
“윤한, 너도 왔군.”
“공조 요청이 왔으니까.”
“천진혁은? 그 인간이 이런 일에 참가하는 걸 본 적이 없네.”
“걔는 국내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적당히 대꾸하며 커피를 마시던 윤한에게 엔도 이츠키가 물었다.
“백한영은?”
“백한영 씨는 갑자기 왜.”
“이번에 S급이 됐다며. 그 녀석한테도 공조 요청이 갔을 텐데?”
S급은 인류의 정점이자 최후의 보루.
아무리 요즘 S급 각성자가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S급은 S급이다.
미국처럼 전 세계의 각성자를 긁어모으는 게 아니면 한 국가에 소속된 S급 각성자는 아무리 많아도 5명을 넘기기 힘들었다.
때문에 S급 각성자가 탄생하면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하물며 엔도 이츠키의 소속 국가는 바로 옆 나라인 일본이었다.
백한영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는 쪽이 더 힘들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안 오지 않을까.”
“어째서?”
“그야, 바쁘니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각성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의 인물을 꼽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의 검신, 천진혁을 밀 것이고.
누군가는 중국의 검제, 주리엔을 밀 것이며.
누군가는 영국의 요정 기사를 밀 것이다.
이처럼 가장 유명한 사람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질문을 바꾸어 ‘현재’ 가장 유명한 각성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한 명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백한영.
S급 각성자를 찍어 내듯 만들어 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공장장.
전 세계의 각성자와 수뇌부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백한영의 이름은 당연하지만 일반인에게도 퍼졌다.
사람이 3명만 모여도 백한영의 얘기를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백한영이 현재 가장 유명한 각성자라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백한영에게 각종 문의가 가지 않았을 리가. 가르침을 내려 달라는 사람부터 광고 문의 등등 수없이 많은 문의가 쏟아졌을 텐데, 그걸 처리하고 있을 백한영에게 이런 곳에 올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아쉽군.”
“네가 왜 아쉬워해. 뭐, 백한영 씨랑 친해?”
윤한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국적이 달라 애초에 접점이 없었고, 여태 지켜본 바로는 백한영이 딱히 엔도 이츠키 같은 사람을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하다만?”
“…뭐?”
“친하다고 했다.”
하지만 엔도 이츠키의 대답은 윤한의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친하다고? 진짜로?”
“그렇다. 왜 안 믿는 건지.”
“일방적으로 너 혼자만 주장하는 것 아니야? 실제로 나랑 친하다고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녔잖아, 너.”
“너랑도 친한 것 맞다만?”
엔도 이츠키의 말에 윤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혼자 백한영과 친하다고 주장하는 게 맞는 듯했다.
“괜히 놀랐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니. 실제로 우리 친하지 않나.”
“그래그래. 네 말이 사실이야.”
“그리고 백한영과도 친하다. 같이 오키나와에서 바비큐 파티도 했단 말이다.”
“…바비큐 파티를 했다고?”
윤한이 입을 떡 벌렸다.
자신과 친한 건 엔도 이츠키의 망상일지언정, 백한영과 친한 건 진실일 가능성이 높아진 탓이었다.
“언제?”
“저번 여름에?”
“몇 달 안 됐네. 대체 너랑 왜?”
“길드원끼리 휴가를 나왔길래 같이 즐겼지.”
길드원 휴가면 더 말이 안 됐다. 그런 개인적인 자리에 엔도 이츠키를 왜 부른단 말인가.
“내가 사 온 고기를 전부 맛있게 먹었지.”
“진짜인가 보네.”
혼자 억지로 끼어들어 놓고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말하는 걸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백한영 그 녀석, 엔도 이츠키 같은 성격을 좋아했구나. 의외네.
진저리 칠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한국에서 열심히 자신의 소설을 읽고 있던 백한영이 들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한마디 했을 생각을 하며 윤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나?”
“어디 가긴. 당분 보충 했으니 슬슬 일하러 가야지.”
“같이 가지.”
오지 말라고 안 올 인간이 아니었기에 윤한은 엔도 이츠키와 함께 국제 각성자 협회가 자리 잡은 임시 캠프로 걸음을 옮겼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관계자를 시야에 담은 윤한은 천천히 캠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란 경계선으로 통제된 장소에 도착한 윤한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했다.
“‘이곳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관계자입니다.’”
“‘관계자?’”
장소를 통제하고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내밀었다. 관계자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것 없는데. 윤한은 당황했다.
윤한은 S급 각성자다. 당연하지만 각성자 관계자들이 그의 얼굴을 모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일반인이야 S급 각성자의 얼굴을 모를 수 있었지만, 관계자는 보통 S급 각성자의 얼굴을 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관계자로 보임에도 윤한을 몰랐다. 심지어 옆에 있는 엔도 이츠키까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러면 귀찮게 사람을 불러와야 됐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쉰 윤한은 캠프로 몸을 돌렸다. 적당히 아무나 불러오면 되겠지.
그 순간이었다.
“‘그 두 사람은 관계자가 맞습니다.’”
윤한의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리엔 님.’”
중국의 S급 각성자, 주리엔이었다.
진작 도착해 있던 주리엔의 얼굴은 아는 건지 그 말에 장소를 통제하고 있던 남자는 순순히 문을 열었다.
덕분에 귀찮은 일을 피했네. 윤한은 옆에 있는 주리엔에게 살짝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통제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따라오는 엔도 이츠키와 주리엔과 함께 통제 공간 중앙으로 향한 윤한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면에 거대한 문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놈의 S급 던전 게이트는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
대체 이 세상에서 게이트는 언제쯤 사라질까.
게이트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윤한이었지만, 게이트가 사라진다면 순수하게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각성자 사회가 안정화되고 사상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해도 게이트는 게이트.
이 세상에 없는 게 더 나았다.
엔도 이츠키가 윤한의 옆에 서며 물었다.
“공략일이 언제인지 아나?”
“너나 나나 이제 막 왔는데 알 리가. 사람들이 모이면 그때 시작하겠지.”
“흐음.”
적당히 대답해 준 윤한은 주리엔을 바라봤다.
던전 게이트를 빤히 바라보는 주리엔. 한참을 그러고 있던 주리엔은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볼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윤한도 던전 게이트를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긴 했다.
일종의 루틴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 의미 없어도 큰 공략을 앞두고 게이트의 생김새를 확인하는 습관을 지닌 각성자는 의외로 많았다.
주리엔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며 윤한은 생각했다.
이번 공략도 저번처럼 별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 * *
며칠 후, 국제 각성자 협회의 캠프 회의실.
주리엔이 입을 열었다.
“전부 모인 것 같군.”
4명의 S급 각성자와 다수의 A급 각성자면 S급 게이트를 공략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가장 명성이 높다는 이유로 공략의 책임자를 맡은 주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출발한다.”
주리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성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S급 게이트를 공략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S급 게이트가 열린 페루의 외곽, 그곳에서도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절벽 위.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보스, 언제 출발해?’”
“‘보스를 귀찮게 하지 마라, 루이스.’”
“‘내가 뭘 했다고. 작전 시작 시간 정도는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니야?’”
평소와 같이 투덕거리기 시작하는 붉은 머리의 남자, 루이스와 푸른 머리의 남자, 오스카.
그들에게 보스라고 불린 남자, 아더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더의 명령에 입을 다무는 루이스와 오스카.
주변이 조용해지자 아더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움직일 시간이군.”
아더의 말에 그의 부하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부하들이 전부 사라진 순간. 부하를 따라 남자의 몸이 밑으로 낙하했다.
그들의 정체는 ‘오버로드’.
각성자야말로 신인류라고 믿는, 초월을 추구하는, 미치광이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