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또 시작했네 (2)
“영화요?”
“네에.”
“흐으으음.”
한유림의 말에 백한영은 세레나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영화라.
마지막으로 그쪽 관련 일을 한 게 거의 반년 전이니 꽤 오래되긴 했다.
오래된 거랑 하고 싶은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 의외로 백한영은 영화를 한 편 정도 더 찍을 생각이 있었다.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가끔 티브이를 보다 보면 <여름에 피는 꽃>이 재방영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연기가 묘하게 거슬린다고 해야 되나.
사람들이 호평하든 뭐든 그냥 거슬렸다.
지금은 저것보다 훨씬 잘할 자신이 있었다.
작품을 하나 정도 더 찍어서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누가 들었으면 네가 배우냐, 미친놈아, 증명하긴 뭘 해, 라고 하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그런데 아무 작품이나 찍고 싶진 않은데.’
백한영은 시작부터 시대를 역행하는 시청률을 찍은 대작 드라마인 <여름에 피는 꽃>에 출연했다.
이다음에 찍을 작품이 망작이면 좀 그랬다. 이른바 필모그래피가 예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보면 네가 배우냐, 미친놈아, 필모그래피를 관리하게, 라고 하겠지만, 이하 생략.
생각을 마친 백한영이 한유림에게 물었다
“유림 씨? 어떤 영화예요?”
“…저 여자. 계속 달라붙어 있네…….”
“한유림 씨?”
“네에?”
“어떤 영화예요?”
백한영의 말에 한유림은 중얼거리던 걸 멈추고 핸드백에서 대본을 꺼내 건넸다.
대본을 받아 든 백한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본의 겉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 혼자 귀환자>.
“귀환자?”
“요즘 유행하는 소재래요. 이세계(異世界)에 갔다가 현대로 돌아온 주인공이 인기가 많다든가.”
“아하.”
백한영은 별생각 없이 대본을 넘겼다. 이런 소재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귀환은 또 백한영이 전문가였다. 재미를 판단하기 적합하다는 뜻이다.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은 백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밌었다.
귀환자인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다 때려 부수는 맛이 아주 통쾌했다.
인기가 있을 만하네. 확실히 납득은 됐다.
살짝 아쉬워서 그렇지.
‘주인공이 귀환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략했네.’
백한영의 입장에선 아쉬웠다.
귀환 후보단 귀환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가 더 궁금했는데, 그걸 깔끔하게 생략한 것이다.
이 편이 더 인기가 많으니 이렇게 한 거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묘사해 줄 수 없었을까.
“한영 씨?”
“예?”
“어때요?”
“재밌네요.”
“그죠?”
호의적인 반응에 한유림의 얼굴이 밝아졌다.
백한영은 대본을 천천히 넘기며 말을 이었다.
“주인공 상황이 재밌네요. 돌아왔더니 집안이 벼락부자가 돼 있는 게 인상 깊었어요.”
“보통은 가세가 기울어 있잖아요.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든가.”
“그… 렇죠.”
“효도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주인공이 자연스럽게 백수에 한량처럼 사는 게 재밌지 않아요?”
“재미 포인트긴 해요.”
이상하다. 분명 시나리오 속 주인공 얘기일 텐데 왜 이렇게 찔리지?
감기인가? 얼마나 독한 바이러스길래 승천자를 감기에 걸리게 한 거야.
괜히 찔려 헛기침을 하는 백한영에게 한유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여기 이 주인공 역할이 마침 비어 있거든요.”
“딱 봐도 기대작 같은데, 주인공 역할이 비어 있다고요?”
“네. 물론 후보가 있긴 하지만, 한영 씨가 하신다고 하면 바로 뽑힐 거예요. 어떻게 하실래요?”
“으으으음.”
백한영은 살짝 고민했다.
대본은 확실히 괜찮았다. 스토리도 좋았고 대사도 맛깔났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다른 내용이었다면, 그러니까 다른 장르였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대본의 퀄리티는 좋았다.
‘귀환물이라니까 약간 그렇네.’
귀환자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가. 이곳저곳 아쉬운 점이 자꾸 눈에 밟혔다.
왜 이런 전개를 했을까. 나라면, 나였다면.
나였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백한영은 눈을 깜빡였다.
‘진짜 내가 쓸까?’
안 그래도 요즘 볼 게 점점 사라져서 심심하던 찰나였다.
이참에 그냥 내가 직접 소설을 써 버리면 어떨까?
나는 천재인가?
스스로의 발상에 백한영이 팔뚝을 문질렀다.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한 발상이었다.
백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심이 섰으니 이제 행동으로 보여 주기만 하면 됐다.
백한영을 따라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한유림이 그에게 물었다.
“한영 씨? 어디 가세요?”
“직접 글을 써 보려고요.”
“네?”
뚱딴지같은 소리에 한유림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백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던전 게이트를 나갔다.
내가 장르 소설 짬밥이 얼마인데, 쓰려면 쓰지.
* * *
집에 도착한 백한영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자신이 평소에 자주 들르던 사이트에 접속했다.
썬피아. 웹소설 사이트로, 신인 작가들의 등용문 같은 곳이었다.
복잡한 절차 없이 바로 글을 연재할 수 있기에 그랬다.
딱히 경력도 없고 업계에 아는 사람도 없는 백한영이 사용하기에 딱 좋은 사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백한영은 최근 바빠서 보지 못했던 연재 순위를 확인했다.
‘확실히 귀환물이 인기네?’
웹소설에서 귀환물이 인기인 것과 영화판에서 귀환물이 인기인 게 무슨 상관이냐 할 수 있겠지만, 요즘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웹소설이 웹툰화가 되고, 뒤이어 영화, 드라마화가 되는 시대다. 웹소설과 미디어의 연결이 긴밀하다는 거다.
그렇기에 웹소설에서 유행하던 트렌드가 웹툰, 영화, 드라마에 반영되는 경우가 꽤 많았다.
트렌드 조사를 마친 백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웹소설 사이트를 종료했다.
정보를 얻었으니 이제 집필만 하면 됐다.
‘주인공의 이름은 백한영… 을 그대로 쓰는 건 그렇고, 백일영으로 할까?’
백한영이 귀환물을 쓴다면 당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일평생 한 번만 쓸 수 있다는 비기.
수필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백일영에게 몰입하게 도와주는 거야. 백일영의 서사를 잔뜩 푸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될까.
백한영은 무릎을 탁 쳤다.
어린 시절에 어떤 인간이었는지 보여 주면 되네.
한 1권 정도 어린 시절을 보여 줘서 백일영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힘들어하는 장면을 보여 준 다음 무림에서 활약하면?
이게 반전 매력이지.
좋아. 가 볼까?
그렇게 백한영은 빠르게 프롤로그와 초반부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장르 소설을 봐 온 짬밥과 무공서(이게 사실 제일 도움이 됐다)를 수없이 많이 집필해서 그런가. 막히지 않고 쭉쭉 써졌다.
이거 이러다가 작가로 유명해지는 것 아니야?
해외의 영화제작사가 집 현관문을 두들기는 상상을 하며 약 3권 분량을 써 내린 백한영은 썬피아에 소설을 업로드했다.
빙의되기 전의 모습은 물론이고 무림에 빙의된 직후 혼란스러웠던 순간까지 소설에 녹여 낸 백한영은 흐뭇해한 표정으로 조회 수가 오르는 걸 기다렸다.
무려 검신의 일대기다. 이건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안 좋아하면 그건 버그가 일어난 거다.
그렇게 백한영은 꿈에 부푼 채로 시간을 보냈고, 일주일이 지났다.
버그가 일어났다.
[무웃: 이게 빙의물이라는 걸 1권 후에 앎. 현판인 줄.]
[타상양화: 무슨 100화 가까이 되도록 주인공이 아무것도 안 하냐. 뭐임, 이거?]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한 것이다!
백한영은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지. 어째서 사람들이 내 소설을 안 좋아하는 거지?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시작되는 백한영, 아니 백일영의 각성이 너희에겐 안 보이는 거야?
앞으로 100화 정도만 더 참으면 나온다고. 왜 몰라 주는 거야.
백한영은 오기가 생겼다.
백한영의, 아니 백일영의 일대기를 혹평한 독자의 생각을 바꿔 주고 싶어졌다.
‘안 되겠다. 비장의 수를 써야겠어.’
굳게 마음을 먹은 백한영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뒤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바르세알, 너 글 좀 쓰냐?”
“비록 백한영 님보다는 못하겠지만, 나름의 조예는 있습니다.
백한영류 진오의.
바르세알 소환.
백한영이 말했다.
“내 글 어때.”
“훌륭합니다.”
“훌륭한데 왜 인기가 없을까. 나는 그런 식의 억지 아부를 좋아하지 않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해 줘.”
군주가 솔직하게 고하라 했다고 해서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죄다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좋은 말만 하는 것도 별로였다.
군주의 성향에 따라 좋은 말만 하는 인간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백한영이 딱 그랬다.
즉 백한영의 신하는 좋은 소리와 진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서커스를 해야만 했다.
미치도록 귀찮은 군주라는 뜻이다.
바르세알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재미가 없습니다.”
“으음.”
“정확히는, 요즘 시대에 읽히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으음!”
재미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봤지.
하나 그 이유를 백한영의 글솜씨가 아닌, 요즘 시대의 탓으로 돌린다.
그로 인해 백한영의 글은 객관적으로 재미있지만, 시대에 맞지 않아 사장됐다는 교묘한 답변이 탄생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간신이나 할 법한 말을 했음에도 바르세알은 아무렇지 않았다.
충신도 충신 나름이지. 백한영이 소설가가 될 것도 아니고, 소설을 못 쓴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이런 취미의 영역에서까지 핏대를 세워 가며 충언을 하는 건 충신이 아니었다.
충신병자지.
게다가.
“백한영 님은 시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요즘 너무 바쁘긴 해. 누구였지? 검신련의 부길드장? 걔 때문에 문의가 쏟아져서 어지럽더라.”
검신련의 부길드장, 김영운이 최근 벽을 넘어 S급에 가까워졌다는 얘기가 각성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돌았다.
심지어 그 원인으로 백한영이 지목된 탓에 모두가 백한영의 말 한 마디라도 듣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무신련에 문의를 넣는 상황이었다.
백한영의 입장에선 살짝 억울했다.
헛짓거리 하고 있길래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뿐인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백한영이 말했다.
“슬슬 외부에서의 문의는 차단하려고.”
“조치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시간이 부족한 게 왜?”
“백한영 님의 일대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제가 써도 문제가 없겠죠.”
글 같은 건 그냥 바르세알이 써도 아무 상관 없었다.
원래 하인은 주인과 한 몸. 즉 바르세알이 쓴 글도 백한영이 쓴 글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으으음.”
백한영은 고민했다.
이거 X스트 바둑왕, 아니 X스트 소설왕 같은 것 아닌가?
이래도 되나?
…안 될 것 있나?
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게 세상에 늘어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결론을 내린 백한영은 바르세알에게 명령했다.
“한번 써 봐, 재미있게.”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