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또 시작했네 (1)
VBS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제작 현장. 그곳의 연출부 막내는 주변의 압력에 떠밀리듯 이지선에게 다가가 물었다.
“작가님, 요즘 무슨 관리 받아요?”
“응? 왜?”
“아니, 그게.”
하루 만에 너무 달라졌잖아요.
…라는 말을 삼킨 연출부 막내는 이지선을 찬찬히 뜯어봤다.
잦은 야근으로 죽어 가던 메인 작가는 어디 가고, 생기가 넘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한 낭랑 18세 이지선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 생기가 넘치는 거야 푹 쉬면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젊어진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연출부 막내의 말에 이지선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시켰어요?”
“네?”
“카메라 감독님이에요? 아니면 PD님이에요?”
“PD님입니다.”
멀리서 절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로 팔로 엑스 자를 만들던 PD가 연출부 막내의 대답에 고개를 떨궜다.
조금 있다가 한 소리 들을 걸 생각하니 위가 아팠던 거다.
이지선이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PD님한테 후회할 거면 애초에 하지 말라고 해 주실래요?”
“네…….”
“그리고 관리받은 건 아니고요. 아이참.”
“……?”
마침 잘됐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지선의 모습에 연출부 막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그런데 이게 당연한 게, 이지선은 이지선 나름대로 답답했었다.
사람의 얼굴이 하루 만에 대학교 신입생처럼 변해 버렸는데 아무도 묻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는데. 이걸 이제야 물어보네.
“우리 조카가 아주 좋은 걸 가져다줘서요.”
“좋은 거요?”
“젊음의 물약이라나 뭐라나. 그걸 먹으면 평생 젊게 살 수 있대요.”
“아니, 그런 게 있다고요?”
하다못해 각성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젊음의 물약이라니. 그런 게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지선의 자랑에 멀찍이서 구경하던 연출부, 제작부, 촬영부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 우르르 말을 걸었다.
“그런 좋은 걸 언니 혼자서 먹었다고요?”
“하나밖에 없는 걸 어떡해.”
“와. 그럼 평생 이 외모로 사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
이지선은 백은하와 백한영의 이모였다.
선남선녀인 백은하와 백한영의 이모인 것이다. DNA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이지선도 한 미모 ‘했었’다.
그래. 했었다. 잦은 야근과 어린 백은하와 백한영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생을 하느라 빛이 바랬을 뿐, 한 미모 했었는데.
불로의 영약, 이지선은 젊음의 물약으로 알고 있는 그것과 생명력의 영약을 먹고 이번에 미모를 되찾아 버린 것이다.
“와아…….”
주변 여자 동료들이 이지선을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영원히 20대의 외모를 유지할 수 있는 이지선이 부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남자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20대의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다니. 슬슬 무릎이 시큰거리는 그들에게 그것보다 부러운 일은 없었다.
“하나 정도 더 못 구하나요.”
“엄청 귀한 거라 더 못 구한대. 그리고 구해도 우리 월급으로는 절대 못 살걸?”
“하긴, 경매에만 부쳐도 몇백억은 가볍게 넘겠네요.”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대부호가 어디 한두 명인가.
재산의 반이 뭐야. 전 재산을 써서라도 불로를 이루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평범한 방송 스태프의 월급으로는 불로의 영약의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나는 백한영 같은 조카 없나.’
서브 작가가 이지선의 외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쯧.”
멀리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혀를 찬 여자가 PD를 쏘아보며 말했다.
“PD님, 슬슬 촬영 시작할 시간 아니에요?”
“해야지.”
이번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또 다른 메인 작가, 박지현의 말에 PD가 허겁지겁 현장을 정리했다. 아직 시간이 꽤 많이 남았지만 박지현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원래 프로그램엔 메인 작가가 하나만 있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규모가 워낙 큰 탓에 메인 작가를 둘이나 둔 건데, 때문에 다른 사람만 죽어 나갔다.
박지현과 이지선이 앙숙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박지현의 포지션이 특이한 탓도 있었다
원래 현장에서는 PD가 최고다.
신입 PD와 메인 작가 정도로 짬의 차이가 벌어지면 모를까, 아니라면 보통은 PD가 우위인 경우가 많았다.
PD가 작가를 대우해 주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전체를 지휘하는 건 PD였다.
그래서 보통 메인 작가라고 해도 현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하기 쉽지 않았는데, 박지현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그녀의 능력이 뛰어나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집안의 힘 또한 그녀의 능력에 포함한다면 말이다.
말석이긴 하지만 재벌가의 손녀인 박지현은 현장에서 꽤 힘이 강했다. 어지간하면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이 이지선과 왜 앙숙이냐고?
굳이 따지면 박지현이 이지선을 일방적으로 싫어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지선이 남이랑 싸울 기력이 어디 있겠는가. 먹고살 만한 박지현이나 남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것이다.
뭐, 이지선도 무시를 하는 거지 박지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 앙숙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했다.
둘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입사 동기였으니 거의 10년 정도인가.
박지현은 이지선을 싫어해서 매번 시비를 걸었는데, 예전엔 정치질로 수작을 부렸지만 최근엔 패턴을 바꾸었다.
계속 정치질을 하기엔 이지선이 짬이 너무 차기도 했고, 능력 덕에 아군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패턴을 바꾸었냐고?
은근슬쩍 꼽을 주거나, 지적을 하는 등. 음습하게 수작을 부리는 박지현 탓에 주변인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만 말해 두겠다.
이지선은 능력이 출중했다. 괜히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야근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적인 부분으로는 이지선에게 꼽을 주거나 지적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억지로 지적하는 순간 이지선이 박지현의 부족한 부분을 수십 개 나열할 테니까.
때문에 박지현은 다른 곳을 공격했다.
그녀의 빛바랜 외모라든가, 결혼할 때가 지났는데 남자 친구가 없는 점이라든가, 옷차림이라든가. 이런저런 부분을 은근슬쩍 언급하며 긁은 것이다.
전부 식물인간 상태인 조카 탓에 돈이 쭉쭉 빠져나가느라 생긴 문제인 만큼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은 공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지선은 별생각이 없었다.
말했듯 일하느라 바빠 죽을 것 같아서 저런 헛소리에 하나하나 반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주변 사람이 정색했었다. 한 1년 전쯤 재벌가의 손녀고 뭐고 이지선과 친한 CP가 적당히 하라고 한 소리 했던 건 방송계에서 유명한 일이었다.
한 소리 들었다고 박지현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고 변한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아무튼 기나긴 둘의 사이는 어느 한 기점을 통해 격변했는데, 시기로 치면 약 8개월 전쯤. 백한영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후부터였다.
백한영이 깨어났으니 당연히 이지선의 얼굴이 활짝 폈다.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지는 것만으로 이지선에겐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주변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그 와중에 평소와 같이 시비를 걸 정도로 박지현이 눈치가 없진 않았다.
박지현은 축제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조카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이지선도 깨달을 것이다, 조카가 깨어나 봤자 극적으로 바뀌는 건 없다는 걸.
박지현은 이지선이 그걸 깨달았을 때 평소와 같이 말을 걸면 끝이었다. 레퍼토리를 바꿀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똑같은 삶일 테니 똑같이 말을 걸면 됐다.
…라는 생각은 약 몇 주 만에 무너지고 만다.
“작가님, 이번에 언니 조카 A급 각성자가 됐다면서요?”
“응. 애가 일어나자마자 그래서 살짝 걱정인데, 본인이 괜찮다니까.”
“A급 각성자라니. 작가님은 이제 호강할 일만 남았네요?”
“호강은 무슨. 조카는 조카고 나는 나지.”
“작가님이 사실상 애들 키웠잖아요. 애들도 작가님이 고생한 걸 아는데 가만히 있으려고.”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백한영이 돌연 A급 각성자가 되어 수십억을 벌어 버린 것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박지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담담히 넘어갔다.
그래 봤자 A급 각성자다. A급 각성자는 확실히 대접받았지만, 그래 봤자 조금 잘나가는 프리랜서에 불과했다.
재벌가의 손녀인 박지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박지현이 조사한 바로는 이지선 일가엔 빚이 매우 많았다.
아무리 A급 각성자라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차피 똑같아. 조카가 A급 각성자든 뭐든, 너는 늘 똑같아, 이지선.’
박지현은 속으로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작가님, 이번에 이사 간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이건 어디서 말 안 했는데.”
“거기 고위 각성자랑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잖아요. 아파트 조카가 산 거죠? A급 각성자가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요?”
“그런가 봐. 나는 잘 몰라.”
박지현은 또다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속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대출이라도 받았나 보지. A급 각성자면 신용이 튼튼하니까. 저 정도는 흔쾌히 빌려주는 곳이 많아.’
물론 이 생각은 몇 주 후 관찰 예능이 전국을 강타하며 논파당하고 만다.
대출을 받은 게 아니라 현금 박치기를 한 게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퍼진 것이다.
그 뒤로는 뭐, 박지현의 입술이 매번 고생했다.
계속 나락을 가던 박지현의 기분이 밑바닥을 찍은 건 김태식이 S급이 되고, 무신련이 각성자 사이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는 순간이었다.
각성자는 전 국민의 관심사다. 그래서 각성자들의 관심사 또한 자연스럽게 전 국민의 관심사로 옮겨 가곤 했다.
한때 드라마로 전 국민에게 관심을 받았던 백한영이 이번엔 S급을 육성하는 능력으로 관심을 받았으니, 박지현의 입장에선 속이 쓰리다 못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박지현은 최대한 마음을 다스렸다.
나는 재벌가야. 그리고 여태 관리도 꾸준히 받아서 거의 20대로 보여.
이건 이지선의 조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 해결해 줘.
내가 이겼어.
그리고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알겠지만 이지선은 불로의 영약과 생명력의 영약을 먹었다.
무슨 말이냐.
박지현이 위장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는 뜻이다.
괜히 PD에게 꼽을 준 박지현은 현장의 뒤편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지선, 조카가 덕 좀 본다고 신이 났네? 그게 네 능력처럼 보여? 절대 아니야. 착각하지 마.’
이제 하다 하다 자아 성찰인지 뭔지 헷갈리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박지현.
정작 이지선이 들었으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지선이 최근 신이 난 이유는 순수하게 조카가 잘나가서지 조카의 덕을 봐서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부모가 자식이 잘나가면 이득이 생겨서 좋아하는 건가. 그냥 자식이 잘 커서 좋은 거지.
뭐 이지선이 박지현의 생각을 알 일은 이제 없겠지만.
이지선이 원래도 박지현을 무시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박지현을 진짜 신경 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박수도 두 손이 마주쳐야 나는 법.
박지현이 혼자서 난리를 치든 뭐든 이지선이 상대해 줄 이유가 전무했다.
박지현의 입술만 불쌍하게 됐다.
이지선이 PD에게 물었다.
“출연진들 어때요?”
“전부 괜찮아.”
“그러면 예정대로 하면 되겠네요.”
PD와 오늘 촬영에 대해 상의하던 이지선은 문득 걱정스러워하는 말투로 물었다.
“PD님, 근데 진짜 괜찮을까요?”
“아… 그 블링즈 엔터테인먼트 말하는 거지?”
이지선의 말에 PD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요주의 팀이긴 했다.
PD가 말했다.
“괜찮지 않을까? 시청률은 보장될 것 같던데.”
“너무 보장돼서 터질까 걱정이던데요.”
“뭐 어때. 어차피 아직 데뷔도 안 한 애들이잖아. 기존의 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 이슈만 되고 크게는 안 타오르지 않을까?”
PD의 말에도 이지선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건 전부 블링즈 엔터테인먼트의 한 멤버 탓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그 멤버가 한 인터뷰가 문제였지만.
‘연예인이 된 이유가 뭔가요?’
‘낭군님 때문이다.’
‘…팬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건가요?’
‘팬이 낭군님이라니. 내가 한 나라의 여제도 아니고, 낭군님이 여럿일 수는 없지 않은가. 팬은 팬이고 낭군님은 낭군님이다.’
지금이라도 편집하자고 할까?
이지선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인터뷰를 한 장본인이 그대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만 안 했어도 바로 커트하자고 PD에게 건의했을 것이다.
사실 연예계에선 이런 경우가 흔했다.
물론 아이돌이 애인이 있다고 데뷔하자마자 까발리는 경우는 없었지만, 관심을 끌기 위해 어그로를 끄는 경우는 많았다.
때문에 방송계에서 산전수전을 전부 겪은 이지선이 이런 문제로는 고민을 안 했을 거다.
시청률을 챙겨 준다는데 고민을 왜 해. 바로 써먹지.
그러니까, 원래라면 말이다.
‘분명 엄청 인기 끌 것 같은데.’
딱 봐도 당첨 복권으로 보이는 애가 이런 어그로를 끄니, 머리가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출연진 준비할게요.”
연출부의 말에 이지선은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다. 될 대로 대라지.
진짜 저 여자의 낭군님인가 남자 친구인가는 도대체 누구야.
얼굴 한번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