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S급이 되고 싶으시다고요 (3)
천진혁은 최근 거대한 벽에 막혀 있었다.
그 벽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 천진혁조차 한계를 느껴 살면서 처음으로 재능의 밑바닥을 드러낼 정도였다.
처음 마주하는 벽에 천진혁은 심플한 선택을 했다.
‘더욱 정진한다.’
안 그래도 수련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건만, 거기서 더욱 수련에 집중한다.
가끔 있던 외부 활동을 아예 없애 버린다. 다음 경지로 넘어갈 때까지 밖에 나가지 않는다.
전부 백한영을 만난 후에, 정확히는 그가 남긴 검로(劍路)를 본 후에 생긴 변화였다.
하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보면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벽에 막혀 수련에 모든 걸 쏟아부은 후로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러시아에 가 백한영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 흔적을 봤어도 달라지진 않았다.’
드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가 남긴 흔적은 보통 밑의 경지의 검사에게 도움이 됐지만, 천진혁에겐 반대였다.
안 그래도 견고했던 벽이 더욱 견고해진 게 끝이고, 사정이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천진혁은 선택지를 골라야만 했다.
이대로 혼자서 계속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도움을 받을 것인가.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여기서 포기할 거였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테니까.
답답한 상황에 천진혁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천진혁에게 윤한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정 답답하면 도움을 받는 게 어때.”
“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천진혁은 딱히 도움을 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여태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산 것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일 뿐. 만약 도움이 된다면 천진혁은 기꺼이 받을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는 딱 한 명, 천진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
“백한영에게 연락할 수 있나?”
“백한영이 협회랑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으니까, 건너 건너면 연락이 닿을걸?”
“부탁하지.”
“하다 하다 너한테 부탁한다는 소리를 듣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진짜.”
천진혁의 부탁에 윤한은 협회 사람을 통해 백한영과 연락했고, 주소 하나를 받아 냈다.
윤한에게 전해받은 주소로 이동한 천진혁은 던전 게이트를 발견했고,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던전 게이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오셨군요.”
은발의 남자의 말에 천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련의 길드원인가? 그렇다기엔 복장이 특이한데.
사용인? 그런 느낌의 복장이었다.
백한영이 안 본 사이에 많이 특이해진 걸 벌써부터 깨달은 천진혁은 은발의 남자, 바르세알의 안내를 따라 던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천진혁은 다른 사람이 던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으레 보이는 반응, ‘대체 이곳을 어떻게 훈련장으로 개조한 거지?’ 같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백한영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천진혁은 바르세알과 함께 던전 내 해변가로 향했다. 그러자.
“왔어요?”
휴양지 복장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백한영이 천진혁을 맞이했다.
선글라스와 밀짚모자까지 챙긴 기상천외한 모습에도 천진혁은 감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초대해 줘서 고맙군.”
“뭘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거기다 저번에 천진혁 씨가 제주도 게이트에서 강력히 어필해 줘서 저희가 돈을 잔뜩 벌었잖아요. 은혜 갚기 비슷한 거죠.”
백한영은 천진혁과 윤한이 무신련의 기여도가 1등이라고 강력히 주장해 준 덕에 약 800억에 가까운 돈을 번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백은하와 이지선을 편하게 해 준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도움은 몇 번이고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왜 찾아오신 거죠?”
“벽에 막혔다.”
“위로 올라가다 보면 벽을 마주치기 마련이죠. 그런데, 음.”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교 대상을 백한영으로 잡는 오류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천진혁의 재능은 손꼽을 정도로 뛰어났다.
길고 긴 역사를 가진 무림에서도 천진혁 정도의 재능은 몇 번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저 정도면 승천경의 벽을 마주할 때까지 막힐 일이 없을 텐데?
승천경의 벽도 평균보다 높은 확률로 뚫어 버릴 테고.
천진혁의 현재 경지는 화경(化境)의 극. 절대 아직 벽에 막혀서 답답해할 구간이 아닌데, 왜 벽에 막혔다고 하는 거지?
백한영은 천진혁의 표정을 샅샅이 뜯어봤다.
워낙 표정이 없어 티가 나지 않았지만, 꽤나 표정이 어두웠다.
입마(入魔) 초기라는 뜻이었다.
‘잘 모르겠네. 붙어 보면 알려나?’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검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보면 됐다.
“따라오세요.”
천진혁을 근처의 대련장으로 데려간 백한영은 청심을 뽑으며 말했다.
“적당히 덤비세요.”
“알겠다.”
백한영의 말에 천진혁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심상을 최대로 열었다.
심상 속, 묘비에 꽂혀 있는 완전(完全)의 검을 뽑자 천진혁의 손에 심상과 의념으로 만들어진 검 한 자루가 잡혔다.
심상병기(心像兵器), 무상검(無上劍)이.
거기서 끝이 아니다.
천진혁의 경지는 화경의 극.
소세계가 완성되어 심상의 일부를 현실로 꺼내 올 수 있게 되는 경지를 화경의 완숙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화경의 경지가 극에 이를 경우, 소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현실로 꺼내 올 수 있었다.
지금처럼.
파지지직.
천진혁의 소세계와 현실이 만나며 거센 일그러짐을 낳았다.
소세계에 새겨진 하나의 절대적인 룰이 천진혁을 뒤덮었다.
천진혁이 익힌 검법의 이름은 무상검법(無上劍法).
무상(無上). 위가 없으니 올라갈 곳이 없고, 결점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무상검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세계에 새겨진 법칙은 간단했다.
완전.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흠이 없는 상태.
소세계의 법칙을 몸에 덧씌운 천진혁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내공은 이제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이제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의 검은 이제 적을 놓치지 않는다.
무상검법(無上劍法), 진오의.
천의무봉(天衣無縫).
천진혁의 검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최단 경로를 넘어, 아예 공간을 넘은 천진혁의 검이 백한영을 베었다.
서걱.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천진혁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천진혁의 검이 벤 것이 백한영이 아니라 애꿎은 허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잘렸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백한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천진혁을 바라봤다.
‘어림도 없나.’
감정의 변화조차 없는 모습. 이 정도로는 백한영을 놀라게 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예상은 했다. 그거랑 별개로 입맛이 써서 그렇지.
그만큼 자신이 넘어야 될 벽이 높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보여 줄 것이 남아 있었다.
천진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상 세계로 가라앉은 그의 앞에 천태진의 이름이 적힌 묘비와 세상에서 제일 완전한 검이 보였다.
이것이 천진혁의 소세계다.
천진혁이 완성한 작은 세계.
이곳에선 천진혁은 완전했으며, 최강이었다.
이 작은 세계 안에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결국 우물 안 개구리지.’
방구석 안에서 최강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현실은 달랐다. 실제 세상은 이것보다 더 넓고, 다양했다.
그걸 천진혁도 알았다.
때문에 천진혁은 이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고, 그러기 위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짜 세계’, 심상 세계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세계’, 현실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박아 넣어야만 했다.
‘간다.’
천진혁의 심상이 활짝 열렸다.
그의 심상에 새겨진 법칙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의념이다. 의념을 굳게 다져 세계와 이어지는 길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모든 걸 올린다.
영혼에 새겨진, 자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법칙을―.
“자, 거기까지.”
화악!
갑작스러운 순풍에 천진혁이 심상을 열다 말고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한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진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정에 변화가 생기게 하는 건 성공했나.’
자그마한 성과에 천진혁이 속으로 살짝 기뻐하고 있을 때, 백한영이 미간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천진혁의 재능은 ‘진짜’였다.
백한영이 보기에 천진혁은 충분히 천외천에, 승천경(昇天境)에 닿을 수 있었다.
승천경이라는 게 워낙 높은 경지다 보니 고생하긴 하겠지만, 남들보다는 높은 확률로 승천경에 오를 인재가 바로 천진혁이었는데.
그런 천진혁이 승천경도 아니고 고작 현경(玄境)에 막혀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진혁이 현경의 벽에 막힌다면 백한영의 보는 눈이 틀렸다는 뜻인데, 그럴 리 없었으니까.
잘못돼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천진혁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백한영이 말했다.
“혹시 지금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벽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모른다.”
“승천경의 벽이라고 해요.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던져야만 그 벽을 넘을 수 있죠.”
단계를 건너뛰어도 너무 건너뛰는 천진혁의 행동에 백한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진혁이 고작 현경의 벽에서 막힌 이유는 굉장히 심플했다.
애초에 그는 현경의 벽을 두들기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 몇 단계 위인, 승천경의 벽을 두들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화경이 승천경의 벽을 두들기고 있어.
그러니까 입마가 찾아오지.
천진혁이 백한영조차 헛웃음을 터트리는 짓을 하게 된 건 그를 둘러싼 상황과 조건이 특이한 탓이 컸다.
우선 천진혁의 재능은 ‘진짜’였다. 애초에 재능이 뛰어나니 고작 화경의 경지에서 승천경의 벽을 두들길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실상 이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천진혁이 좇고 있는 사람이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천진혁은 백한영이 남긴 흔적을 보며 백한영의 등을 좇았다.
상급 신위를 손에 넣은 백한영을 필멸자가 따라잡으려 한 거다.
당연히 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천진혁도 찢어졌다.
입마에 걸린 게 그 증거였다.
원인이 밝혀졌으니 해결하는 건 간단했다.
마침 현경의 경지에 오른 아일라가 있으니 둘이 꾸준히 대련시키면 상태가 호전되겠지만.
백한영은 망설였다. 그런 처방을 내려 주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왜 결과가 나쁘지 않지?’
확실히 천진혁은 가랑이가 찢어졌다. 찢어졌는데, 반만 찢어졌다고 해야 되나. 그렇게 상태가 나쁜 건 아니었다.
주화입마에 진짜 빠져 버릴 리스크가 있긴 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승천경의 벽을 뚫어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만약 내가 저 상황이라면 뭘 바랄까.
안전이냐, 보다 높은 경지냐.
물어볼 것도 없었다.
백한영이 말했다.
“지금처럼 하면 둘 중 하나예요. 주화입마에 빠지든가,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던지든가.”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는 뜻이군.”
“정확히 맞히셨어요.”
봐 봐. 주화입마는 듣지도 않잖아.
무인이 다 똑같지 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