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S급이 되고 싶으시다고요 (1)
해외 로케이션을 마친 한유림은 백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유림: 한영 씨, 혹시 바쁘신가요? 저 오늘 한국 들어가는데.]
답장은 없었다.
한유림이 미간을 좁혔다.
백한영이 원래 답장을 바로바로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한유림은 최근 한 달간 보낸 문자를 전부 확인해 봤다.
[한유림: 혹시 영화 촬영 관심 없어요? 한영 씨한테 딱 맞는 배역 있는데.] - 1
[한유림: 한영 씨, 저 영화 촬영 해요, 오늘―.] - 1
[한유림: 한영 씨―.] - 1
백한영이 답장을 바로바로 안 하긴 했지만 문자를 보내면 보긴 했는데, 지난 한 달간 보낸 문자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면 차단을 당했나?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한유림은 달랐다.
‘무슨 일 생겼나?’
근데 그랬으면 백은하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활동할 수 있을 리 없는데.
뭐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한유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우웅―!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다급히 스마트폰을 확인한 한유림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볼 수 있었다.
[백한영: 저도 오늘 한국 들어왔어요.]
[한유림: 한영 씨도 해외 다녀왔나 봐요?]
[백한영: 비슷해요. 그래서 왜요?]
[한유림: 진짜 괜찮은 제안 있는데, 혹시 흥미 있으신가 해서요.]
[백한영: 재밌나요?]
[한유림: 아마도요.]
백한영의 말에 답장하며 한유림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영 씨는 어디 오지 로케이션을 다녀왔나. 어딜 갔다 왔길래 한 달 동안 연락이 안 됐던 거지?”
* * *
백은하는 최근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다!”
기어코 밀렸던 일을 다 끝낸 것이었다.
오빠가 식물인간이었던 시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가리지 않고 받았던 일을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니 기분이 좋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동안 중간중간 쉬는 날이 있긴 했지만, 숙제를 끝내고 쉬는 거랑 끝내지 않고 쉬는 건 다른 얘기였으니까.
백은하는 흥얼대며 위스키를 꺼냈다.
요즘 MZ 세대에서 유행이라는 하이볼, 저도 한번 마셔 보겠습니다.
달콤한 안주를 준비한 백은하는 거실에 휴가지에서 볼 법한 하얀 의자(어디서 가져온 건지 진짜 똑같이 생겼다)를 놓고 그 위에 몸을 뉘었다.
동생이나 오빠나 하는 짓이 똑같았다.
“행복하다.”
모처럼 만의 휴식에 백은하가 기지개를 늘어져라 켜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을 때.
삑삑삑삑. 띠리링.
누군가 도어 록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지? 오빤가? 한동안 길드 일로 바쁘다더니 벌써 끝났나 보네.
자리에서 일어난 백은하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으로 가자 예상대로 백한영이 있었다.
백한영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려던 백은하는 손을 들다 말고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뭐야. 은하 있었네? 오늘 일 안 나가나 봐?”
“…….”
“왜 말이 없어. 너무 반가워서 그래?”
“누구야, 그 사람들.”
백한영의 뒤에는 남자가 하나 있었고, 천상의 외모를 가진 여자가 하나, 냉철한 인상의 미인이 하나.
그리고 오빠를 닮은 남자가 셋 있었다.
사실 여기에 가장 놀랐다. 오빠한테 여자가 따라다니는 건 이미 익숙했으니까. 미인이 둘이 뭐야. 다섯이 따라왔어도 놀라지 않았겠지만.
오빠를 너무나도 닮은 남자 셋은 얘기가 달랐다.
백은하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오빠, 설마 결혼했었어? 거기에 애까지 셋이나 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 나이에 이렇게 큰 애가 어떻게 있어.”
정신적 나이를 따져 보면 얘네보다 더 큰 애가 있을 수 있었지만, 육체의 나이만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는 오빠를 닮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 사람들은 뭔데.”
“호문쿨루스.”
“호문쿨루스?”
“인공 생명체라고 생각해.”
“흐음.”
백은하는 백일영, 백이영, 백삼영을 훑어봤다.
오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아들인데. 인공 생명체라니, 신기했다.
“일단 알았어. 나머지 둘은?”
“세레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젊은 여자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지만,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백은하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백한영을 바라봤다. 해명해 보라는 듯.
백한영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내 수행원이야. 결혼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할 사람도 없어.”
“오빠가 할 사람이 없긴 왜 없어, 마음만 먹으면 여자가 줄을 서는데. 수행원은 뭐야. 그럼 저 남자도?”
“백한영 님을 모시는 바르세알이라고 합니다. 언제든 편하게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시길.”
“아, 알겠어요.”
바르세알의 말에 대답한 백은하는 조심히 백한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뭐냐니까, 오빠?”
“수행원이라니까. 어쩌다 보니 생겼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면 수행원이 생겨. 오빠 그동안 길드 일 한 것 아니었어?”
“비슷해.”
“오빠는 하는 짓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은하가 이내 말했다.
“유림 언니가 오빠 찾았을 텐데, 뭔 말 없어?”
“안 그래도 연락 와 있더라. 무슨 일인지 알아?”
“영화 관련으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건 직접 들어 봐. 지금 가게?”
백은하의 말에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원 상태 점검하는 김에 만나기로 했어.”
“길드원 상태를 점한다고? 오빠 길드 일로 바빴던 것 아니었어?”
“길드원 상태는 매일 점검해야지. 오빠는 길드장이잖아.”
아차 싶어 급하게 말을 돌리는 백한영.
백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해.
“오빠 정말 길드 일로 바빴던 것 맞지?”
“진짜라니까.”
언젠가 세상을 위협할 마신(아니었음)을 처리하는 것도 넓게 보면 길드 일이지.
거짓말은 안 했다.
* * *
이초아와 유지아는 서로에게 이를 악물고 능력을 사용했다.
심상을 재료로 만든 얼음의 용이 이초아에게 달려들었다.
쩌저저적!
얼음의 용이 땅에 떨어진 직후, 거대한 얼음의 꽃이 피어올랐다.
유지아의 각성 능력, 동령빙화(冬靈氷華)의 힘이었다.
단거리 이동 마법으로 유지아의 공격을 피한 이초아 또한 심상을 열었다.
완벽의 파편을 재료 삼아 주문의 탑이 건설됐다.
1층, 2층, 3층, 4층, 5층, 6층을 넘어 7층까지 순식간에 건설되는 주문의 탑.
완성된 탑의 7층에 법칙이 새겨졌다.
주문에, 심상을 부여하는 법칙이.
화르륵!
완벽의 조각을 중심으로 불꽃이 거세에 타오르며 용의 형태를 갖췄다.
7위계 소환계 주문.
화룡의 분노.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화룡이 유지아를 향해 쏘아졌다.
쩌저적!
지지 않고 빙룡으로 맞받아치는 유지아.
치이이익!
얼음과 불이 만나며 훈련장에 수증기가 가득 찼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유지아와 이초아가 지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래요.”
지난 한 달간 치고받고 싸워서 그런가. 미운 정이 들… 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죽도록 밉지는 않은 두 사람이었다.
유지아가 중얼거렸다.
“백한영 씨랑 대련하고 싶어서 S급이 됐는데, 백한영 씨는 얼굴도 못 봤네요.”
“저도 수련시켜 준다길래 기대했는데, 웬 이상한 여자랑만 매일 대련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아요.”
“이상한 여자?”
유지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얼음을 다루는 제어계 능력자답지 않게 잘 타오르는 그녀였다.
반대로 이초아는 불꽃을 다루는 마법사답지 않게 차갑게 식은 미소로 답해 줬다.
이상한 여자 맞잖아, 아닌 척하고 있어, 라고.
“생각해 보니 아직 대련이 부족한 것 같네요. 다시 붙죠.”
“바라던 바예요.”
그렇게 이초아와 유지아가 2차전을 시작하기 직전.
두 사람은 마나를 끌어 올리다 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던전 게이트 내부에 익숙한 기운과 처음 보는 기운이 잔뜩 들어섰다.
“백한영 씨 왔네요?”
“그러게요.”
둘은 언제 으르렁댔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미친 여자들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물론 이초아와 유지아가 미친 여자라서 이러는 건 아니고, 진작에 합의를 봐 놓은 덕이었다.
백한영 앞에서는 서로 좀 참자고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이초아와 유지아는 던전 게이트 입구 부근으로 걸어갔다. 백한영을 발견한 이초아와 유지아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가, 멈칫했다.
옆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유림 씨는 왜 왔지?”
“나야 모르죠.”
“저 인간은 각성자도 아니잖아. 여길 올 이유가 없는데?”
“나도 모른다니까요.”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 이초아와 유지아에게 백한영이 손은 흔들었다.
“둘이 좀 친해졌나 봐요.”
“서로 매일 대련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네.”
대련을 해 준다고 해 놓고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냐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지만, 백한영은 그런 걸 눈치챌 정도로 남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다.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역시 페이스메이커가 중요한가.”
“아무리 그래도 백한영 씨가 직접 가르쳐 주는 것보단 덜하죠.”
실력이 늘었다고 퉁치지 말고 약속대로 대련이나 해 달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지만, 이하 생략.
백한영과 하하 호호 떠들던 이초아와 유지아는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엔 다 죽은 표정으로 서 있는 한유림이 있었다.
‘저 사람 왜 저래? 누구 죽었어?’
‘세상이 무너져도 저런 표정은 안 짓겠어요.’
눈빛으로 대화를 마친 이초아와 유지아는 이내 백한영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낯선 기운의 정체가 뭔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깨달았다.
한유림이 왜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짓고 있는지.
‘우와.’
‘저건 진짜.’
백한영의 뒤에 서 있는 여자는 말 그대로 인세의 외모가 아닌 것 같았다.
신이 황금 비율이 무엇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만들어 낸 작품 같은 외모라고 해야 되나. 현실성이 너무 없는 외모라고 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 외모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아 본 이초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신이 직접 손대기라도 한 거야 뭐야.’
자기도 모르게 정답을 맞힌 이초아는 이번엔 백한영의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자를 살펴봤다.
저 인간은 또 뭐야.
왜 백한영 이 인간은 볼 때마다 여자가 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백한영 1, 2, 3은 뭐야. 세쌍둥이 동생인가?’
백한영과 똑 닮은 남자들까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이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보던 사이에 식구가 많이 느셨네요. 다 누구예요? 자식이에요?”
“왜 다 그 소리를 하는 거지. 호문쿨루스입니다. 인공 생명체예요.”
“뒤에 여자들은요?”
“한 명은 수행원이고, 한 명은…….”
“제자.”
“제자입니다.”
제자? 수행원? 흐음.
그거라면 뭐.
납득한 이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태 죽을상이었던 여자 하나가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아들이 아니었어요?!”
“아니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