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아카데미 속 XXXX (8)
“내가 용사가 되는 게 맞아?”
공원 벤치에 앉은 마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빈의 허리춤엔 성검이 걸려 있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용사로 선발됐다는 뜻이었는데, 마빈은 그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도 그럴 게―.
“그랜드 오러 마스터가 말이 되냐고.”
현 대륙에 두 명밖에 없는 대륙 10강 위의 진정한 최강자.
하늘 밖의 하늘, 천외천의 경지에 같은 나이의 여자애가 도달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스승님은 너도 곧 될 거야, 라고 말했지만… 내가 당장 내일 그랜드 오러 마스터가 돼도 아일라보다 늦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일라가 나보다 뛰어난 인재일 텐데, 왜 아일라가 아니라 내가 용사인 거지?
최근 마빈은 자신감이 넘쳤었다.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검을 잡고 한 달 만에 도달했으니 당연했다.
역사상 최고 천재, 그게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졌었다.
아일라가 그랜드 오러 마스터, 즉 현경(玄境)에 도달하기 전까지 말이다.
마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주인공일 리가 있나.
나는 엑스트라야, 엑스트라.
자리에서 일어난 마빈은 특별동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늘은 스승인 백한영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어쩐지 스승 정도의 강자가 이름을 못 날린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을 줄이야.
백한영에겐 받은 게 참 많았다.
마법이라는 엉뚱한 길을 걷고 있던 걸 바로잡아 준 것도 그렇고, 정안검법(正眼劍法)을 가르쳐 준 것도 그렇고.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른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라도 전하고 싶어.’
백한영을 보자마자 깊게 고개를 숙이기로 정한 마빈은 이내 특별동에 도착했다.
“늦었군.”
특별동에는 슈진이 먼저 와 있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아일라는?”
“아직 안 왔다.”
“스승님도?”
“안 왔다.”
슈진의 대답에 마빈은 적당한 자리에 앉으며 아일라에 대해 떠올렸다.
아일라 펜드라.
역대 기록을 갈아 치우며 바벨 아카데미에 입학한 천재.
비록 용사가 된 건 마빈이었지만, 그게 마빈이 아일라에게 승리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직도 마빈은 아일라가 높아 보였다.
‘아일라, 기다려. 곧 따라잡아 줄 테니까.’
마빈이 호승심을 불태웠다.
사람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에선 여러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재능은 중요했지만, 재능이 그것 하나만 있어도 모든 게 해결될 정도로 만능의 도구는 아니었다.
환경도 중요했고, 열망도 중요했고, 라이벌도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마빈은 이 중 한가지가 충족되었다.
사람은 페이스메이커가 있다면 보다 멀리, 보다 쉽게 나아갈 수 있다.
마빈이 눈을 불태웠다. 매번 자신감이 없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마빈이 각오를 다졌을 때.
“왔나?”
“응.”
아일라가 특별동에 들어왔다.
마빈은 바로 고개를 들어 아일라를 바라봤다.
지금 이 각오를 그녀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일라!”
“응.”
“지금은 네가 나보다―.”
마빈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일라의 행색이 뭔가 이상했다.
마빈이 손가락으로 아일라의 등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배낭.”
“그건 봐서 알아. 왜 배낭을 메고 있냐는 거야.”
“필요해서.”
마빈의 머릿속에 갈고리가 자라났다.
대체 배낭이 지금 왜 필요하단 말인가.
여행이라도 가나?
마빈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눈치가 느린 것이다.
그 와중에 슈진이 눈을 크게 떴다.
계속 말했지만 마빈보다 슈진이 눈치가 빨랐다.
“설마 너, 스승님을 따라갈 생각인가.”
“응.”
“스승님에게 허락은 받았나?”
“아마도.”
“받으면 받은 거지 아마도는 뭔가. 그나저나 너도 참.”
차원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을 이렇게 쉽게 결정하다니. 아일라도 참 특이한 인간인 것 같다고 슈진은 생각했다.
둘의 대화에 마빈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응.”
“스승님을 따라간다고? 진짜로?”
“진짜야.”
“왜?”
“스승님이 강하니까. 내 목표야.”
“아.”
마빈은 아일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마빈이 아일라를 목표로 삼은 것처럼, 아일라도 백한영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마빈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
목표가 사라져 버리는데?
조금 전 뜨겁게 달아올랐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같이 경쟁하고 있는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다른 경기를 뛰고 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계속 심장이 뛰면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뭐야. 너네 여기서 뭐 해.”
살짝 어색해진(사실 마빈만 어색해졌다) 특별동 공터에 백한영이 나타났다.
백한영의 뒤로는 바르세알과 세레나가 얌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백한영의 등장에 마빈은 천천히 다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인사도 하고 감사 인사도 하려고요…….”
“넌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내가 가는 게 그렇게 슬퍼?”
“그러게요. 많이 슬프네요…….”
기운이 빠진 마빈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백한영이 말했다.
“그래도 자주… 는 아니고 가끔 들를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알았어요.”
“그리고… 넌 진짜 따라오게?”
“응.”
백한영의 물음에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퇴서를 내고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낸 아일라는 이 세계에 더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백한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일단 아일라도 백한영의 제자였다.
백한영은 가르침을 베푼 사람에게 약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따라오겠다는 걸 굳이 반대하고 그러진 않았지만.
‘이러면 독고린에게 할 말이 더 사라지는데?’
개나 소나 차원을 넘는 건 그렇다 쳐도, 아예 다른 차원에서 만난 애를 지구로 데려가다니. 이러면 독고린에게 못 데려가니 포기하라고 말한 내가 뭐가 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나도 데려가라고 말하던 독고린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나중에 만나면 진짜 한 소리 듣겠네.
만날 일은 없겠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 보니까 무림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 잘못은 아니야, 그게.
술법사들이 안 된다고 했어. 패려면 걔네를 패.
나는 무죄야.
“한번 가면 이 세계로는 자주 못 돌아와. 알고 있지?”
백한영의 말에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면 됐다.
백한영이 바르세알을 쳐다봤다.
그러자 바르세알이 아공간에서 차원의 보석을 꺼내 백한영에게 내밀었다.
차원의 보석을 받아 든 후 백한영이 마빈과 슈진에게 말했다.
“주화입마에만 걸리지 마라, 얘들아. 그거 고치려면 개고생한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해라.”
차원의 보석을 부수자 허공에 차원 문이 열렸다.
백한영과 바르세알, 세레나, 아일라가 차원 문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흔들며 넷을 배웅하던 마빈은 차원 문이 사라지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나는 누구랑 경쟁하냐.”
“나를 무시하는 거냐, 마빈.”
“네가 있었지. 그래… 힘내 보자…….”
아일라 대신 슈진이 경쟁 상대라니까 왠지 기운이 빠지는 마빈이었다.
시꺼먼 사내놈이랑 경쟁한다니까 괜히 기운이 빠진 게 아니다.
중요하니 두 번 말하겠다.
* * *
2623-차원, 행성 아락시아의 지배자 겔런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특이점이라. 인과율의 씨앗을 말하는 건가?”
타 차원에서 발신된 정보에 놀라운 정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율. 그것은 온 차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법칙이었다.
그런 인과율의 씨앗이라니. 확실히 승천자의 소원도 가볍게 이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나 그런 놀라운 소식을 듣고도 겔런은 0982-차원, 행성 지구로 출발하는 대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 녀석들 봐라?”
겔런은 즉시 수하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이걸 한번 봐라.”
“이건.”
겔런의 부하는 단말기를 받아 들어 읽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정말이라면 우리 세력이 대문명, 그것도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봤어.”
“속도가 생명이겠군요. 다른 녀석들이 채 가기 전에 함선을 준비하겠…….”
“아니, 그게 아니지.”
부하의 말을 끊은 겔런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차원을 구별하지 않고 무작위로 쏘아진 정보야. 이 정보를 몇이나 받았을 것 같냐?”
“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걸 아는 놈이 순순히 격전지로 기어들어 가려 해? 이미 다른 놈이 채 갔을 수도 있고, 설사 아직 인과율이 씨앗이 남아 있다고 해도 얻는 과정에서 손실이 어마어마할 거야. 수많은 차원에서 사람이 몰리니까.”
“그러면 포기해야 됩니까?”
“이 정보를 보고도 포기를 한다고? 제정신이냐?”
겔런이 부하를 질책했다. 아까부터 발상이 일차원적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겔런의 부하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모르겠습니다.”
“쯧. 그래. 너는 머리 말고 몸이 장점이니까. 생각해 봐. 이런 놀라운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전 차원에 뿌린 놈들이다. 과연 가지고 있는 정보가 이게 끝일까?”
“설마.”
“대문명의 상위권? 그걸 넘어 우리는 초차원 문명으로 도약한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겔런의 명령에 순식간에 원정대가 완성됐다.
단순한 원정대라기엔 문명 몇 개를 순식간에 박살 낼 정도로 살벌하긴 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목적 자체는 원정이 맞았으니까.
정보를 역추적해 녀석들의 본거지를 알아낸 겔런은 전 함대에 명령했다.
“6666-차원으로 이동한다. 모두 도약 준비.”
“차원 도약 준비. 아스트랄 엔진, 올 그린.”
“출발.”
우우우우웅―!
겔런의 함대가 차원을 넘어 순식간에 다른 차원에 도착했다.
“여긴가.”
도착한 행성은 황량해 보였지만, 괜찮았다. 위장일 테니까.
이제 꿀단지에 꿀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됐다.
겔런이 명령했다.
“행성에 착륙한다.”
“알겠습니다.”
“선발대에게 전해. 개미 새끼 하나 놓치지 말고 샅샅이 뒤지라―.”
[손님이 왔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겔런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남의 본거지에 쳐들어간 거다.
아무 저항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는 쪽이 비정상이었다.
“적이다. 겔런 함대의 힘을 똑똑히 보여 줘라.”
“전 함대에 전한다. 포문을 열고 모든 화력을―.”
[소란스럽군.]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충격이 사방을 훑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바닥을 구른 겔런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그건 대체 무슨.
[미안하지만 바빠서 말이다. 내가 초대하긴 했지만, 길게 대접을 못 해 주겠군.]
“네가 초대했다고?”
[설마 네가 잘나서 역추적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건가? 그건 그것대로 재밌군.]
겔런의 중얼거림에 의문의 적은 크게 웃은 후 나직이 이어 말했다.
[그만 사라져라.]
직후.
겔런의 함대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의문의 적은 자신이 쓰러트린 영혼을 수집하며 중얼거렸다.
[이미 재료는 충분히 모았으니 역추적은 그만 허용해야겠어. 작업에 방해되는군.]
영혼 수집을 전부 끝낸 의문의 적은 이내 행성 지하로 내려갔다.
행성 지하. 그곳엔 수만 개의 배양기가 있었다.
배양기에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육체가 조용히 배양되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배양기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전부 똑같이 생겼는데, 차원-0236, 백한영이 빙의됐던 무림 세계의 사람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생김새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배양기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백한영을 한없이 닮아 있었으니까.
의문의 적이 배양기를 점검하며 말했다.
“대적자, 기다려라.”
백한영의 생각이 옳았다.
마신 리바인드는 이미 부활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뒤에서 암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