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카데미 속 엑스트라 (3)
백한영은 인세의 외모가 아닌 미녀를 천천히 훑어봤다.
백옥 같은 피부, 바다 같은 눈. 이런 현실에 존재하는 단어로는 그녀를 표현하는 게 불가능했다.
무슨 말이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 누가 손을 쓴 것 같은 외모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한영은 그런 존재를 보상으로 주겠다는 얘기를 최근 들은 적이 있었다.
백한영이 미심쩍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천사세요?”
“파르니안 님께서 앞으로 백한영 님을 모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백한영 님이 제 주인이십니다.”
“진짜네.”
아니, 천사를 준대서 구미가 당기긴 했는데, 바르세알이 있어서 패스했건만 이걸 그냥 주네.
1+1 행사인가.
사장님이 미쳤어요.
진짜 미쳤어요.
불로의 영약에, 생명력의 영약에, 천사에. 보상을 3개나 주다니. 이럴 거면 그냥 지구로 돌려보내 줄 수도 있던 것 아니야?
“보험을 폐기하고 생긴 간섭력 덕에 이런 보상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보상 대신 지구로 돌려보내 드리는 건 아쉽게도 불가능하죠.”
“그렇구나. 근데 내가 방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던가?”
“주인의 표정을 읽는 것이 메이드의 본분입니다.”
“메이드였구나. 옷차림이 메이드긴 했어.”
허허 웃은 백한영은 일 보라며 손을 휘젓고 휴가지에 있을 법한 새하얀 의자에 몸을 눕혔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백한영은 무림에서 절대자였다.
수행원이 늘어나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할 인간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백한영이 빠지고 자리엔 바르세알과 세레나 둘만 남았다.
바르세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레나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바르세알이 세레나를 유심히 살펴봤다.
과연 이 녀석이 주인님을 모시기에 적합한 녀석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건만.’
바르세알은 무려 중급 신위를 얻은 승천자. 평범한 필멸자도 아닌데 혼자라 해서 주인을 모시는 것이 벅찰 리 없었다.
때문에 바르세알은 수행원에 다른 사람이 추가된다고 해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겠지. 하나 이 바르세알의 템포를 평범한 녀석이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이 녀석은 도움이 안 된다. 결론을 내린 바르세알은 주방으로 향했다.
백한영이 휴식을 시작했으니 거기에 걸맞은 편의를 제공해야만 했다.
주방에 도착한 바르세알은 빠르게 재료를 손질해 천상의 맛을 재현한 디저트를 정성스레 만들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면 1초 만에 끝날 작업이었지만, 주인이 먹을 음식에 그런 불성실한 짓을 할 수는 없는 법.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달그락. 바르세알은 조리 도구를 만지다 말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어느새 따라온 세레나도 디저트를 만들고 있었다.
‘흥. 그래 봤자, 이 바르세알의 작품에는 못 미칠…….’
바르세알이 생각하다 말고 멈칫했다.
세레나의 손에서 만들어진 디저트의 향기와 비주얼이 심상치 않았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했던 바르세알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맛이다. 이 바르세알을 맛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다!
“이야. 기가 막히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백한영에게 디저트를 가져다준 바르세알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백한영이 세레나의 디저트를 먹고 감탄했기 때문이다.
“요리 실력은 둘이 호각인데?”
“감사합니다.”
“아주 만족스러워. 좋아, 좋아.”
백한영의 칭찬에 세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바르세알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과연, 백한영 님을 모시겠다고 나설 만하군. 하나 그것도 지금뿐이다. 진심으로 나서야겠군.’
바르세알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슬슬 점심 재료를 준비해야 됐다.
세레나 또한 따라왔다.
바르세알이 신선한 재료를 식탁에 늘어놓고 주방 칼을 들었다.
원래도 정성을 기울였지만, 이번엔 영혼을 갈아 넣어 주마.
탁탁탁. 음식을 써는 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무슨 짓을 한 거야. 평소보다 더 맛있네?”
“신경을 좀 썼습니다.”
“특히 이… 이걸 뭐라고 하냐? 양념구이? 이게 제대로네.”
바르세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한영이 칭찬한 음식은 자신이 만든 게 아니었다.
바르세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세레나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찬 바르세알은 또 주방으로 향했다. 또 세레나가 따라왔다.
“기가 막히네.”
또 백한영이 칭찬했다.
이하의 행동이 수차례 반복됐다.
그리고 늦은 밤. 산처럼 쌓인 디저트를 보며 백한영이 말했다.
“얘들아, 합의 봐서 지금 만들어 오는 것의 반 정도만 만들어 와. 내가 살다 살다 승천경에 오른 후에 당뇨 생각이 들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 * *
아일라는 아침이 밝자마자 간단한 짐을 챙겨 학원장실로 향했다.
새로 온 교수, 백한영은 주변에 한동안 사라져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두라 했지만, 아일라에겐 그런 말을 할 주변인이 없었다.
짐만 챙겨서 가면 끝이라는 거다.
“왔나.”
“응.”
먼저 와 있던 슈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잠을 설친 상태였다.
곧 마왕이 부활하고 자신이 그 마왕을 처치할 용사 후보라니.
게다가 이 엄청난 비밀을 나만 알고 있어야 되다니.
사춘기 소년… 이라기엔 성인까지 앞으로 3살 정도밖에 안 남긴 했지만, 아무튼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대의 슈진이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망상을 한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웠다.
마왕 얘기는 동기 부여를 위한 거짓말이고, 애초에 마왕이 아니라 마신이 부활할 예정이었으며, 부활한 마신은 현재 백한영의 밑에서 디저트나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불을 뻥뻥 차겠지만, 괜찮았다. 우린 남이니까.
“내가 용사 후보라니…….”
마찬가지로 학원장실에 먼저 와 있던 마빈이 우울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당했던 슈진의 모습을 부러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입장으로 만들다니. 악취미도 아니고 이게 뭐야.
백한영은 내게 재능이 있다고 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런 게, 뜬금없이 무술의 재능이 왜 튀어나와. 난 마법사라고. 평생 마법만 익힌 사람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내가 재능이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나겠어.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겠지.
다시 생각해도 내가 왜 용사 후보인지 모르겠네.
“혹시 장난치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후 떨어트리려고?”
“고작 너한테 누가 이런 공들인 장난을 치겠니. 묘한 곳에서 자존감이 높은 녀석이네.”
“헉.”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마빈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앞에 백한영이 서 있었다.
백한영이 말했다.
“다 모였구나.”
“네. 그…….”
“편하게 스승님이라고 부르렴.”
“알겠습니다, 스승님.”
슈진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은 걱정이고, 어렸을 적 질리도록 봤던 이야기 속 용사가 되다니. 아직 후보긴 했지만, 설렘이 차올랐다.
“바르세알.”
“알겠습니다.”
백한영의 명령에 바르세알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우웅―!
허공이 일그러졌다.
공간과 공간이 연결된 것이다.
“가자.”
그렇게 말한 백한영은 앞장서서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슈진을 포함한 용사 후보들도 백한영을 따라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학원장실에서 탁 트인 공터로 이동한 슈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주목.”
백한영이 용사 후보들을 집중시켰다.
“우리 서로 바쁜 사람들이잖아. 맞지?”
“저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바쁜, 사람들이잖아. 맞지?”
“맞습니다.”
무언의 압박에 슈진이 냉큼 대답했다.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아 눈치가 살짝 부족한 슈진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잘못된 대답을 할 정도로 눈치가 부족하진 않았다.
“저는 시간이 많은데요.”
하지만 우리의 마빈은 그런 걸 몰랐다. 눈치가 부족한 친구인 것이다.
“내가 없어서 그래, 내가. 응?”
“죄송합니다.”
“자. 시간이 부족한 우리가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될까.”
“수련을 열심히 하면 됩니까?”
“그건 기본이고. 다른 게 추가로 필요해.”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슈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된 반응에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도 모르나 보네. 하긴 내 특별 비법이니 모를 만하지.”
“특별 비법이라 하면?”
“말로 해서 뭐 해. 직접 봐.”
백한영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르세알이 또다시 마법을 썼다.
허공이 열리고, 거기서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저건?”
슈진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허공에서 걸어 나온 자들의 모습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세쌍둥이? 하지만 그렇다기엔 묘하게 익숙한데.
슈진의 시선이 백한영에게 향했다.
그래. 저 세쌍둥이가 나이를 조금 먹으면 백한영처럼 될 것 같았다.
설마?
“스승님의 동생분들이십니까?”
“내 동생은 하나밖에 없어. 쟤네는 호문클루스야.”
“아.”
호문클루스. 그것은 연금술로 만들어 낸 인공 생명체를 뜻하는 말이었다.
고등한 마법 실력이 있어야만 제작할 수 있는 호문클루스의 등장에 슈진은 살짝 감탄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래서 저거랑 특별 비법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그런 슈진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저 애들은 바르세알이 나를 본떠 만든 거야. 정확히는 내 재능을 흉내 낸 애들이라고 해야 되나?”
“네?”
“너네랑 경지는 동등하지만, 내 재능의 일부분을 이식한 놈들이라는 거지.”
즉 무슨 말이냐.
쟤네랑 대련을 하면 실력이 쭉쭉 는다는 뜻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랑 매일 대련을 할 수 있다니. 실력이 안 늘고 배기겠냐.
“알아들었으면 가서 하나씩 붙잡고 대련 시작해. 시간은 금이니까.”
“아. 네.”
“응.”
백한영의 말에 슈진과 아일라가 각자 앞에 놓인 호문클루스를 데리고 근처의 빈 대련장으로 향했다.
백한영은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슈진과 아일라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들이 밟고 있는 대련장과 호문클루스를 바라본 거지만.
‘이야. 바르세알이 있으니까 애들 교육시키는 것도 편하네. 누워서 디저트만 먹었는데 훈련장이랑 훈련 도구가 뚝딱 생겨났잖아?’
이건 지구로 돌아가서도 요긴하게 써먹어야겠다.
길드원들을 굴릴 생각에 싱글벙글 웃던 백한영은 세레나가 건넨 음료수를 받아 쪽 빨았다.
100% 생과일 주스(무슨 짓을 했는지 평범한 과일 주스의 맛이 아니다)를 전부 마신 백한영은 세레나에게 말했다.
“알아서 잘하는 것 같으니까 나는 좀 쉬자. 세팅 부탁해.”
“알겠습니다.”
“저기…….”
“아. 그리고 바르세알한테 지루함을 달랠 뭔가 없냐고 물어봐 줘. 슬슬 심심하네.”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마빈의 다급한 외침에 백한영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모기만 한 목소리가 날 부르길래 착각인 줄 알았는데, 마빈이었구나.
“왜 그러니.”
“저는 무술이고 뭐고 모르는데, 그냥 가서 싸워요?”
“아하. 미안. 깜빡했다.”
얘는 무공부터 알려 줘야지, 참.
하도 헛소리만 해서 나도 모르게 뇌 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