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용사의 모험은 계속된다 (3)
“날씨 한번 기가 막히네.”
황궁 별궁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백한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작게 감탄했다.
오랜만에 보는, 현대로 돌아간 후로는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었다.
무림이랑 판타지 세상이 자연 풍경 하나는 죽여주는구나.
그것 말고는 다 별로지만.
“백한영 님.”
바르세알이 음식 카트를 밀며 다가왔다. 백한영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디저트입니다.”
“꺼내 봐.”
백한영의 말에 바르세알이 음식 카트에서 수많은 음식을 꺼내 식탁에 세팅했다.
아름다운 걸 넘어 경이로운 비주얼의 디저트가 순식간에 식탁을 가득 채웠다.
백한영은 일단 자신의 앞에 놓인 수플레부터 잘라 입에 넣어 봤다.
“와.”
“어떻습니까.”
“내가 이래 봬도 어지간한 호사는 다 누려 본 사람인데, 그런 내게도 압도적으로 맛있네. 네가 만든 거야?”
“백한영 님께서 드실 음식을 타인에게 맡길 순 없죠.”
“설마 음식도 잘하냐?”
“보잘것없지만,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다음 식사부터는 황궁 요리사가 해 주는 음식이 아닌 바르세알이 해 주는 음식을 먹기로 다짐한 백한영이었다.
이걸로 점수 1점 더 올랐다, 바르세알아.
저번에 1점 오른 거랑 합쳐서 안전권까지 약 998점 정도 남았으니 앞으로 더 힘내도록.
바르세알의 내부 평가를 약간 조정해 준 백한영은 정신없이 디저트를 먹어 치운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이럴 시간 없는데.
백한영은 지난 3일 동안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차원 문을 못 여는 이유가 뭔데. 한 세계를 다스릴 신 정도면 그런 건 껌이잖아.”
“문명 신은 한 문명에 종속된 존재. 백한영 님같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위를 손에 넣은 분과는 제약의 정도가 다릅니다.”
“아.”
문명 신. 문명이 탄생할 때 일정 확률로 같이 탄생하는 신.
당연히 하나의 세상을 다스리는 신인 만큼 가진 힘이 어마어마했지만, 전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문명에 종속된 탓에 마음껏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진 힘이 100이면 뭐 하나. 사용할 수 있는 건 1밖에 없는데.
괜히 승천경에 오른 자들이 문명 신을 앉은뱅이라고 비꼬는 게 아니었다.
백한영이 바르세알에게 물었다.
“네가 차원 문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는 없어?”
“단순히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기에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될 겁니다.”
“내공이라면 많은데.”
“그런 종류의 에너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 외에도 황제를 들쑤시거나 대주교를 들볶으며 방법을 찾아봤지만, 전부 허탕을 치고 말았다.
막막한 상황에 백한영은 이마를 쓸었다.
머리가 아팠다.
“이러다 무슨 일 생기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지난 반년 동안 지구에 참 많은 위기가 찾아왔었다. 그것도 꽤 높은 빈도로.
자신이 없었다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인 만큼 지구를 비워 두는 게 내심 불안했다.
“확실히 그건 문제군요. 이런 말 하긴 조심스럽지만, 이미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 그건 아니야.”
“아닙니까?”
“아직은 문제없어.”
백한영이 아주, 아주 먼 곳에 존재하는 자신의 의념을 느끼며 말했다.
길드원들과 가족에게 심어 놓은 의념엔 아직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없는 거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의념은 일종의 탐지기였다.
길드원들에게, 가족에게 이상이 없는지 알려 주는 탐지기.
뭐, 간단한 호신도 해 주긴 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대충 최하급 신 정도만 돼도 의념만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돌아갈 필요가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걸리고 다른 방법은 없다는데.
에이. 백한영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 세상에 온 뒤로 죄다 마음에 안 들었다.
백한영이 중얼거렸다.
“보상도 그래. 어떻게 신이 승천의 영약 혹은 영생의 영약 이런 것도 못 주냐.”
“그런 걸 줄 수 있었다면 아마 직접 저를 처리했을 겁니다.”
“쯧. 불로의 영약이 끝이라니. 그래도 두 병이나 줬으니 봐준다.”
백한영의 수명엔 한계가 없었다. 승천자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필멸자인 백은하와 언젠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거기에 대해 백한영은 수많은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가장 좋은 건 백은하도 승천경에 오르는 것이다.
무한한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정신도 필수였으니까. 스스로 승천경에 오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지만.
승천경이라는 게 오르고 싶다고 오를 수 있는 정도로 쉬운 경지가 아니었다.
승천경에 오르기 위해선 인생과 영혼을 바치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윤회의 고리를 수없이 반복하며 인생과 영혼을 바치는,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하늘이 감동해 허락해 주는 경지. 그것이 바로 승천경이었다.
어지간한 각오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길드원 전부를 승천경으로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걔네 굴리는 것처럼 은하를 굴릴 수는 없잖아. 별개로 은하에게 무공의 재능이 너무 부족하기도 했지만.
정 급하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긴 하겠지만, 아직 급하지는 않으니까. 되도록 은하는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일단 임시로 심법(心法)을 가르쳐 놓긴 했으니, 아예 보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로의 영약은 상당히 괜찮았다.
보상 목록에 있던 산더미 같은 황금이나, 평생 따라다니며 잡일을 해 줄 천사 같은 것보다 백배는 나았다. 천사는 좀 땡기긴 했지만… 바르세알이 있으니까 이제.
불로의 영약. 말 그대로 복용자를 늙지 않게 해 주는 영약이다.
하나 착각하면 안 되는 게, 말 그대로 늙지 않을 뿐. 생명력까지 영원히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결국 필멸자인 이상 불로의 영약을 먹어도 제 수명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늙지 않는다는 건 상당한 메리트였다. 죽는 그날까지 쌩쌩하다는 건 나중에 무공을 가르쳐도 무리 없이 따라올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런 것보다는 그냥 지구로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나쁘지 않긴 한데, 결국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이라.”
“어쩔까요. 이 세상을 가지고 협박하면 문명 신이 무리해서라도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쁜 짓은 하기 싫은데, 이 상태가 며칠만 지속되면 내 안의 악마가 눈을 뜰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황궁의 별궁에서 문명 신을 기겁하게 할 작당모의가 시작되려 할 때였다.
뚜벅뚜벅. 누군가 별궁 안으로 들어왔다.
“구원자, 있는가.”
뮬리안이었다.
백한영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요. 뭔데요, 이번엔. 또 방법을 찾아봤지만 없었다고 하려고요?”
“아니다. 반대다. 방법을 찾았다.”
“네?”
“신께서 그대를 보자고 하시는군.”
“당장 가죠.”
* * *
백한영은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익숙해진 대성당 내부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왔는가.”
“대주교님, 방법을 찾았다니, 대체 뭐죠?”
“그대가 직접 듣게나.”
“직접이요?”
대주교가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제단을 가리켰다. 저 앞에 서라는 뜻인 듯했다
시키는 대로 백한영이 제단 앞에 섰다. 그러자.
한 줄기의 서광이 백한영을 비췄다.
“뭐야, 이거. 연결된 건가? 여보세요?”
[들린다.]
“이야. 너,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신도들 뒤에 숨더니, 용케 직접 말할 생각이 들었다? 진짜 방법을 찾았나 봐?”
[찾긴 했다. 다만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
백한영의 말에 이 세계의 문명 신, 파르니안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줬다
우우웅―!
성스러운 보석이 백한영 앞에 생성됐다. 지구에서 이곳으로 올 때 뮬리안이 깨트렸던 보석이었다.
차원의 힘이 응축된 보석을 잡아 든 백한영이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그냥 줄 수 있었어? 그러면 여태 반년이 걸리니 방법이 없니 난리는 왜 친 거야.”
[들어 보거라, 구원자여. 확실히 나는 언제든 그대에게 차원의 보석을 내려 줄 수 있었다. 하나 거기엔 대가가 필요하지.]
“대가? 무슨 대가?”
[이것으로 이 세계에 마련된 최후의 보루가 사라졌다.]
“…예?”
파르니안은 방금 준 차원의 보석을 만들기 위해 어떤 걸 대가로 치렀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이 멸망 직전에 몰렸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장치가 있다. 짧지만 내가 직접 세상에 강림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그 장치를 폐기하고 그것에 담긴 간섭력을 사용해 차원의 보석을 만든 것이다.]
“잘 생각했네. 솔직히 이 세상을 구해 주러 온 사람한테 대접이 영 아니었어.”
백한영의 말에 파르니안이 살짝 안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됐고. 그래서 조건이 뭔데.”
[구원자여, 이것으로 그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대의 세상이 위험해질 걱정은 없어졌을 것이다. 아닌가?]
“뭐 그렇지.”
차원의 보석이 있는 이상 의념이 사라지기 전까진 지구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차원의 보석을 주겠다. 대신 부탁하겠다. 그대의 힘으로 이 세계에 보험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그 얘기였구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
[보험은 시간을 들이면 또 만들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보험이 없는 기간에 대한 대비책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대에게서 ‘스승’의 운명이 느껴지는군. 그것도 굉장히 높은 수준의. 아닌가?]
“맞아.”
[그대의 제자 정도면 대비책으로는 적당하겠지.]
요컨대 언제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테니 제발 제자 하나만 키워 달라는 거구나.
완벽히 이해했다.
“누굴 가르치면 되는데. 후보는 있어?”
[누구든 상관없다. 그대의 마음에만 든다면 설사 나를 믿지 않아도 된다.]
“거참 쿨한 신이네.”
파르니안이 준 차원의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백한영은 생각했다.
‘내가 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있나? 그냥 이대로 날라 버릴까?’
요약하자면 나중에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달라는 건데.
당장 세상이 위험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 써야 되나 싶었다.
내가 바로 집에 못 돌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의 실수였다. 그걸 바로잡기 위해 보험에 공백이 생긴다 해도 내가 그걸 메꿔 줄 필요가 있나?
없지 않나.
이대로 바로 집에 돌아가도 과실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었다. 교통사고로 비유하면 100:0으로 내가 이기는 싸움인 거다.
어떻게 할까.
백한영은 파르니안과 대화를 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
대주교와 눈이 마주쳤다.
대주교의 맑은 눈을 보니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백한영은 이번엔 그 옆에 있는 뮬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측은지심이고 뭐고 생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백한영은 이 세상에 온 지 3일 정도밖에 안 된 사람이었다.
마신을 처치하기 위해 이 사람들과 동고동락했으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백한영은 이 세상에 온 지 1시간도 안 돼 마신을 처리해 버렸다. 정을 붙일 시간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흠. 정으로 호소하는 건 불가능한데.
혹시 다른 방법으로 내게 호소해 볼 사람?
있니?
없구나.
그래, 알았어.
얘들아, 즐거웠고, 다음에 또 만나자.
백한영이 망설임 없이 차원의 보석을 들었다. 이걸 깨트려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기다려라, 구원자여! 생명력의 영약도 같이 주겠다! 제발 내 부탁을 들어줘라!]
그리고 다급히 파르니안이 소리쳤다.
백한영이 차원의 보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진작 그것부터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