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용사의 모험은 계속된다 (1)
백한영은 일단 검을 집어넣었다. 도저히 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백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네, 검의 신이시여. 하명하시길.]
“너 뭐냐? 혹시 전공이 손바닥 뒤집기냐?”
[보통 통찰력이 아니십니다. 그런 말을 자주 듣는 편입니다. 하나 제 전공 자체는 계약 마법입니다. 그 점 유의 부탁드립니다.]
“알았으니까 입 좀 다물어 봐.”
백한영의 말에 바르세알이 입에 지퍼를 채웠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지퍼가 생겨났다. 저것도 마법인가.
백한영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얘를 살려, 죽여.’
말해 두지만, 백한영에겐 땅에 머리를 박으며 항복한 놈의 목을 베는 취미는 없었다.
뭐, 녀석이 피해를 줬다면 항복이고 오체투지고 신경 쓰지 않고 목을 날렸겠지만, 아직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피해를 본 건 내가 신경 쓸 바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살려 두는 것도 좀. 애초에 내가 여기에 온 것도 얘가 세상을 박살 낼 예정이라 해서잖아.
음… 역시 죽이는 게 낫나?
[검의 신이시여!]
“깜짝이야.”
바르세알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원래 신하는 군주의 마음을 빠르게 눈치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법.
백한영의 심경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챈 바르세알이 땅에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
[이 바르세알,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운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모실 주군을 뵙습니다.]
“허허.”
[보잘것없지만, 믿어 주신다면 충심을 다해―.]
“야.”
[넵.]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건방진 놈 어쩌고 하면서 덤비던 게 수십 초 전인데, 충심이니 뭐니 해 봤자 개 짖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백한영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네 녀석의 뭘 믿고 부하로 거둬. 조금 전까지 싸우던, 심지어 자칭 마신인 사악한 녀석인데.”
[저는 자칭이 아니라 진짜 마신인데요.]
“말대꾸를 해?”
백한영이 손을 빠르게 올리며 바르세알을 위협했다. 확 그냥.
백한영의 반응에 바르세알이 재차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악한 놈이라는 건 오해입니다!]
“오해? 무슨 오해. 네가 세상을 위기에 빠트려서 구해 달라고 사람이 찾아왔어, 이 녀석아.”
[제가 부활하는 데 사용한 건 신성의 파편, 그러니까 7개의 신기(神器)가 전부입니다! 다른 마신들처럼 흉흉하게 인신 공양 같은 건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 세상을 위기에 빠트리려고 했던 것도 오해야?”
[살짝 지배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오해 아니네. 이게 어디서 밑장을 빼려고 해.”
역시 안 되겠다.
항복한 놈이고 뭐고 이런 녀석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스릉. 백한영이 검을 뽑았다. 그러자, 살벌한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바르세알이 다급히 외쳤다.
[검의 신이시여!]
“그리고 아까부터 날 왜 검의 신이라고 불러. 별호가 검신일 뿐 난 인간이야.”
[검신이시여! 제 충심을 믿지 못하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말해 봐.”
사형수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는 마음으로 백한영은 바르세알이 떠드는 걸 허락했다.
얼마나 대단한 방법이 있길래 저리 말하는지 궁금했다.
[제 충심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걸로 목줄을 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저는 계약 마법 하나로 중급 신의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방법은 많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촤르륵.
허공에서 튀어나온 기묘한 사슬이 바르세알의 몸을 구속했다.
바르세알은 자신의 몸을 구속한 사슬을 잡아 백한영에게 건넸다.
“이건 뭔데.”
[위대한 법칙과 연결된 맹약의 사슬입니다. 이 사슬에 맹세한 건 반드시 따라야 하죠.]
“신기한 힘을 쓰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게 뭐 어떻다고.”
[검신님과 주변인에게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검신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겠습니다. 검신님에게 제 생사여탈권을 드리겠습니다.]
철컹.
바르세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맹약의 사슬이 작동했다.
마치, 트리거가 발동된 것처럼.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 바르세알이 이어 말했다.
[저는 맹세를 마쳤습니다. 이제 선택권은 검신님에게 있습니다.]
“흐으으음.”
백한영은 일단 맹약의 사슬을 집어 봤다. 촤르륵. 맹약의 사슬이 백한영에게 물었다.
이 맹약을 받아들이겠는가.
‘진짜인 것 같네.’
백한영은 마법과 술법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게 마법과 술법에 당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만류귀종. 백한영 정도의 실력자면 그 마법이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맹약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면 백한영은 자신과 주변인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못하고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바르세알의 생사여탈권을 쥘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백한영은 슬쩍 시선을 내려 오른손을 바라봤다.
청심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백한영이 고개를 바로 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살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
“흠.”
백한영은 살짝 고민했다.
이걸로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꾼 바르세알이 또다시 입장을 바꿔 뒤통수를 칠 걱정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얘를 살려 둘 이유가 있나?
딱히 좋게 만났던 것도 아니고, 좋아 보이는 놈도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살려 둘 이유가 없어 보였지만.
촤르륵!
그럼에도 백한영은 맹약의 사슬을 잡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려 둘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얘를 풀어 두면 세상이 위험해지니까 망설였던 건데, 내가 데려가는 거면 뭐. 걱정 없지.
바르세알이 여태 무슨 짓을 저질렀냐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백한영은 기본적으로 선했지만, 그게 절대적으로 정의를 추구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절대적인 정의를 추구하는 입장에선 바르세알은 구제 불능의 처치해야 할 악이겠지만, 백한영의 입장에서는 새로 추가된 자동 사냥 인간… 이 아니라 마신에 불과했다.
거기다 인신 공양은 안 했다잖아. 부활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혹은 다소 큰 전투가 있었겠지만, 그런 걸 백한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손에 묻은 피만 따지면 백한영이 더 많을 텐데 누가 누구를 지적한단 말인가.
맹약이 완성된 걸 확인한 바르세알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부담스러우니까 주군이라는 호칭은 집어치워.”
[알겠습니다, 검신님.]
“검신도 치워. 백한영이라는 좋은 이름이 있으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한영 님.]
“너, 그 모습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안 되냐?”
바르세알은 현재 커다란 뿔과 팔이 4개 달린 괴물의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을 한 바르세알을 현대에서 데리고 다녔다가는 악마 사역자로 소문이 쫙 퍼져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게 분명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바르세알의 몸에 모자이크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야.”
바뀐 바르세알의 모습에 백한영이 나직이 감탄했다.
은발의 미남자가 집사복을 입고 백한영 앞에 서 있었다.
“복장까지 아주 제대로다?”
[원하시는 복장이나 형태가 있으면 그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냥 그걸로 해. 사내놈의 모습까지 고민하고 싶진 않아.”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바르세알.
백한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르세알을 바라봤다.
갑자기 충성스러운 부하가 생긴 것이었지만, 백한영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진짜 충성을 맹세한 부하가 생겼다면 모를까.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해 형성된 관계였으니 말이다.
바르세알은 살고 싶었고, 백한영은 자동 사냥 프로젝트에 인원을 추가하고 싶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뿐, 거기엔 그 외의 어떤 요소도 작용하지 않았다.
‘당분간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야겠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바르세알에겐 미안하지만 보류된 집행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밖에 있는 마족? 괴물? 걔네들은 뭐야.”
[제 권능으로 만들어 낸 하수인입니다.]
“가짜라는 거야?”
[저와 계약한 사역마라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혹 불편하시면 역소환하겠습니다.]
“어. 불편하니까 다 돌려보내 봐. 혹시 따로 챙겨야 될 애들 있어?”
[없습니다. 설사 있다고 해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백한영 님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혹 하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아직은 없어.”
백한영은 입안의 혀처럼 구는 바르세알을 빤히 바라봤다.
나쁘지 않은데?
누누이 말했지만 백한영은 무림의 절대자였다.
무림이 뭐야. 전 차원을 기준으로 봐도 백한영 정도의 강자는 흔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지에 처박히지 않아도 되는, 제멋대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강자를 기준으로 하면 거의 유일한 수준이었고.
그랬기에 백한영의 무림에서의 삶은 황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편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사람이 살면서 응당 신경 써야 되는 자잘한 것들을 전부 대신 처리해 주는데, 편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실수로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한 건 한 거고, 몸이 편한 건 편한 거니까.
아무튼 그런 만큼 바르세알의 존재가 익숙하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백한영이었다.
‘오케이. 점수 좀 땄다, 바머시기야.’
바르세알의 내부 평가를 살짝 올린 백한영은 이내 입을 열었다.
“이걸로 문제를 전부 해결했으니 보상만 받으면 되네. 따라와,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 되니까.”
[알겠습니다.]
* * *
황제와 대주교 앞에서 뮬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말했다.
“사라졌다고?”
“그렇습니다.”
“이런. 마신이 부활한 이때 기껏 데려온 구원자가 도망을 가다니. 낭패군.”
“도망이라기보다는, 어딘가 갔다 온다는 뉘앙스로 말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가, 팔라딘? 마신이 부활한 이때 마신을 쓰러트리는 것보다 급한 일이 어딨다는 건가! 만약 진짜 다른 볼일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
뮬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본 백한영은 그런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백한영이 사라져서 내심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 번 본 게 끝인 사람의 무엇을 믿고 그리 변호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뮬리안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답답한 상황에 뮬리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안 됩니다.’
‘대체 누구.’
‘침입자다!’
알현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쾅!
알현실 문이 활짝 열리며 안으로 누가 들어왔다.
침입자의 얼굴을 본 뮬리안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그대였는가!”
“보상 받으러 왔습니다. 당신들의 신과 빠른 연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