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선택받은 용사 (2)
“살 것 같군.”
“천천히 먹어, 천천히.”
정신없이 치즈버거를 먹는 뮬리안에게 콜라를 건네준 홍유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런 홍유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콜라를 받아 든 뮬리안이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뭐냐.”
“아아. 모르는 건가. 그건 ‘콜라’라고 하는 거다.”
“탄산음료군. 본인이 아는 것보다 더 달아.”
“네 세상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탄산음료도 있냐.”
기가 막혔는지 홍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햄버거도 알았지, 저 녀석. 이세계인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세상에서 왔길래 햄버거도 알고 콜라도 아는 거야.
뻑킹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온 게 아니란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콜라가 먹고 싶어서 울면서 마왕을 잡으러 갔는데. 요즘 애들이란.
“이봐, 이건 뭐지?”
“아아. 모르는 건가? ‘치즈스틱’이라고 하는 거다.”
“안에 치즈가 들었나.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음식과 비슷하군.”
“진짜 너네 세상 꼭 한번 가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치즈스틱도 있는 거야.”
“너는 안 된다.”
단호히 대답한 뮬리안은 치즈스틱을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그래. 안 되겠지.
하아. 홍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관자놀이를 눌러 진정시켰다.
홍유진은 조금 전, 구체적으로는 2시간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뮬리안 이트렉트. 편하게 뮬리라고 부르게. 초면에 미안하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너, 이 세상 사람 아니지.”
“그걸 알아채다니 눈치가 빠르군.”
홍유진의 말에 바로 뮬리안은 정체를 실토했다.
“사정이 있어서 차원을 넘어왔네만, 그게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진 않지. 왜 넘어왔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사람을 찾는 중이네.”
“사람을 찾는다고?”
뮬리안의 말에 홍유진이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어떤 일 때문에 사람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차원을 넘은 거다.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뮬리안은 홍유진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흠. 자네는 미약하지만 성물 반응이 있었으니 말해도 되겠지.”
“말해 봐.”
“성물이 점지한 구원자를 찾는 중이라네. 우리 세상이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라서.”
“그럴 것 같았어.”
차원을 넘을 정도의 일도 그렇고 여태 물리안이 한 말도 그렇고, 대충 저런 상황일 것 같긴 했다.
뮬리안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새하얀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였다.
보석에서 나는 빛을 확인한 홍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성물 반응이 있는 거야?”
“그렇다. 미약하긴 하지만.”
“미약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정 안된다 싶을 때 도박수로 던져 볼 정도는 된다.”
“그렇습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뮬리안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던 홍유진이 이내 말했다.
“아무튼 나는 모르니까 알아서―.”
꼬르륵.
홍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홍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 용사 파티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엘? 너니? 조금만 참아. 곧 배달시켜 줄게.”
“나 아니야!”
“그러면 누구야. 엘레나 너니?”
“나겠니. 앞에 있잖아, 앞에.”
홍유진이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 배가 고프신가요.”
“죽을 것 같다.”
이상이 홍유진이 뮬리안을 데리고 M으로 시작하는 패스트푸드점에 온 이유였다.
회상 끝.
“본인은 개인적으로 샌드위치를 더 좋아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군.”
“진작 말하지 그랬냐. 그러면 서X웨이에 데려다줬을 텐데.”
“배도 채웠으니 일을 해 볼까.”
홍유진의 말을 한 귀로 흘린 뮬리안이 품에서 성물을 꺼냈다.
성물을 이리저리 조작한 뮬리안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 근처가 맞긴 하군.”
“얼른 끝내자. 나 바빠.”
“바쁜 모양이군. 그러면 가 보도록. 먹을 걸 먹었으니 지금부터는 알아서 할 수 있다.”
“내 세상에 이세계인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을 수 있겠냐.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무 짓도 안 하네만?”
“지금부터 하려고 하잖아!”
구원자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사람을 납치하거나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불안 요소를 아무렇게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할 이유가 있었다.
그걸 왜 내가 하냐고?
동향(아님) 사람이잖아. 욕먹기 싫으면 관리해야지.
“흐으으음.”
홍유진이 뭐라 떠들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듯 꿋꿋이 걸음을 옮기는 뮬리안.
그런 뮬리안을 고개를 저으며 따라가던 홍유진은 익숙한 아파트의 등장에 걸음을 멈춰 섰다.
‘여기 국내 최고 유명 아파트 아니야?’
아파트 이름보다 연예인 아파트 혹은 각성자 아파트로 더 유명한 곳인 만큼 집값이 장난 아닌 걸로 아는데, 여기에 뮬리안이 찾는 구원자가 있다고?
“뭐 하고 있나. 그렇게 가만히 서 있으면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출입을 제지당하고 싶냐?”
“…갑니다.”
무려 이세계인에게 이 세상의 상식을 지적당한 홍유진은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뮬리안을 따라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나요.”
제지당했다.
고급 아파트의 보안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할 리 없었던 것이다.
“어. 그러니까요.”
“사람을 만나러 왔다.”
“사람이요? 혹시 입주자의 지인이신가요?”
경비원의 말에 뮬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
“잠깐만요! 맞아요!”
홍유진이 급하게 뮬리안의 입을 막았다.
괜한 오해를 사는 일을 방지한 것이다.
…오해가 맞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겉으로도 수상하고 실제 목적도 수상하긴 했다.
근데 모르겠고, 적당히 넘어가자.
어차피 여기서 뒤로 물러나 봤자 뮬리안이 이상한 짓을 하면 했지 얌전히 있지는 않을 거니까.
“죄송하지만 어느 입주자의 지인이시죠? 지인분의 동호수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비원의 재촉에 홍유진은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지금 자택에 있으신가요.”
[있긴 한데, 무슨 일이죠?]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 * *
백한영은 갑작스러운 손님 둘에게 음료수를 따라 건네줬다.
백한영이 말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당황했어요.”
“죄송합니다.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인데, 여기 사는 지인이 선생님밖에 없어서요.”
“아뇨. 별것 안 하고 있기도 했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죄송해하실 건 없습니다.”
“이거 맛있군.”
백한영이 따라 준 오렌지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는 뮬리안의 옆구리를 홍유진이 콕 하고 찔렀다.
“눈치 챙겨, 제발.”
“눈치? 무슨 눈치를 말하는 거냐. 마시라고 준 것 아니냐?”
“맞아요. 편하게 마시세요. 그래서 홍유진 씨,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를 만나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아, 그건.”
백한영의 말에 홍유진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왜 이렇게 자꾸 한숨을 쉬게 되지.
“더 없나?”
“잠시만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뮬리안의 부탁에 새 오렌지주스를 꺼내 오는 백한영.
홍유진은 백한영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세계에 갔다 오신 건 알고 계시죠.”
“네. 마왕을 죽이고 오셨잖아요.”
백한영의 말에 뮬리안이 반응했다.
“아니, 마왕을 죽였다니. 그대, 용사였었나? 어쩐지 성물이 반응하더라니.”
“뮬리안, 조용히 좀 해 봐. 아무튼 얘기를 계속하자면, 이 사람은 뮬리안 이트렉트고 이세계에서 왔다고 합니다.”
“홍유진 씨가 갔던 이세계요?”
“그건 아닌 것 같지만요.”
백한영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뮬리안을 바라봤다.
타 차원에서 온 마법사랑 치고받은 게 바로 얼마 전인데, 또 이세계인이라니. 우리 차원에 꿀이라도 발라 놨나. 왜 이렇게 자주 오나 모르겠다.
“그, 뮬리안 씨?”
“편하게 뮬리라고 불러라.”
“그래요, 뮬리안 씨. 저희 차원엔 왜 오셨죠?”
“구원자를 찾기 위해서다. 우리 세상이 위험에 빠졌거든.”
세상이 위험에 빠졌다라.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이네요.”
“그렇긴 해요. 틀에 박혔어요.”
맞장구치는 홍유진. 클리셰라면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전개에 백한영은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구원자는 어떻게 찾는데요. 그쪽 신님이 알려 주시기라도 하나요?”
“제대로 맞혔다. 정확히는 운명이 점지한… 음?”
품속에서 성물을 꺼내려던 뮬리안의 몸이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뮬리안이 조심히 성물을 꺼냈다. 그러자.
강한 빛이 백한영의 집 안을 환하게 비췄다.
멍하니 성물을 바라보던 뮬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찾았군.”
“네?”
“그대가 운명이 점지해 준 구원자인가. 이거 운이 좋았군.”
“제가요?”
백한영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원자라니. 그런 건 안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우리 세상 구하는 것만 해도 귀찮아 죽겠는데 남의 세상을 언제 구하고 있어.
이미 손 씻은 사람 찾아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런 건 나 말고 그 뭐야. 파릇파릇한 고등학생한테 가서 부탁해야 되는 것 아니야?
이고깽 모르냐고.
내가 이세계 가면 이고깽이 아니라 이늙깽, 이세계 늙은이 깽판이야. 조심해.
“잠깐. 선생님이 네가 찾던 사람이라고?”
“이 성물을 봐라. 그대에게 반응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태양과 반딧불이 수준의 차이 아니냐?”
“이러려고 너랑 선생님을 만나게 한 게 아니야.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마.”
“그대가 소개해 주지 않았어도 성물의 인도로 나는 여기에 왔을 거다.”
“아으.”
홍유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백한영이 귀찮아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흐음.”
그러나 정작 백한영은 별 감흥이 없었다.
김태식을 비롯한 길드원들이 와서 도와 달라고 하면 모를까. 생판 남이 도와 달라고 해도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백한영이었다.
어떤 사정을 품고 있든 내가 싫다고 하면 뭘 어쩔 건데.
뮬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백한영의 표정에서 단호함을 느낀 것이다.
“곤란하군.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준다고 해도 듣지 않겠지?”
“그런 걸로는 안 움직이죠.”
백한영이 원하는 건 안락한 일상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누가 힘써서 이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만히 놔두는 게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었으니까.
백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얘기는 잘 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워낙 바빠서. 보상도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고. 그러니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을 찾는 건 힘들다. 마신(魔神)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흔할 리 없지 않은가.”
손님을 배웅해 주려던 백한영의 몸이 멈칫했다.
익숙하면서도, 지긋지긋한 단어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죠?”
“응? 다른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것 말고요. 다른 거요.”
백한영의 말에 뮬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대답했다.
“마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흔할 리 없다는 것 말인가? 근데 이건 당연한 것 아닌가.”
“마신이 있다고요? 당신의 세상에?”
“정확히는 부활 직전이다.”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마신을 부활시키려는 놈들의 이름이 마신교인가요?”
“굉장히 잘 아는군. 그런데 왜 그러지? 이게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되냐고?
당연히 되지.
백한영은 헛웃음을 터트리곤 말했다.
“구원자를 찾고 있다고 했죠?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당장 차원을 넘을 준비를 하세요.”
마신 그 새끼, 어쩐지 죽이고 나서 영 찜찜하더라니.
부활하려고 하고 있었네.
소름 끼치는 놈.
기다려라, 마신. 지금 몸에 바람구멍 내 주러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