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쿠션은 원래 푹신해요 (1)
[백한영: 은하야, 미안. 나 빼놓고 놀고 있어. 급한 일이 생겨서.]
오빠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은하는 플립 폰을 탁 하고 닫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바쁜 일이 생겼길래 오빠가 놀러 가는 걸 미루지? 괜찮은 것 맞아?”
“우리 조카야 어지간하면 괜찮겠지. 근데 은하야, 한영이 놔두고 우리끼리 이런 데 와도 돼?”
백은하의 말에 대답한 건 그녀의 옆에 누워 있던 낭랑 34세 미혼, 남친 없음, 하나, 애는 둘 있음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방송 작가, 이지선이었다.
“몰라. 그리고 이미 예약했는데 어떻게 해. 돈 날릴 수는 없잖아.”
“이모도 몇 달 만에 쉬는데 집에 있는 건 약간 그래.”
“나도 간만에 쉬니까 좋다.”
찰방. 백은하가 앞에 있는 풀장에 발을 담그며 말했다.
현재 백은하와 이지선은 제주도에 지어진 바닷가가 보이는 풀 빌라 안에서 쉬고 있었다.
원래라면 백한영과 같이 와서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었는데, 당일 날 파투를 내다니.
심지어 오랜만에 이모도 만나는데.
집에 가면 한마디 해야겠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어도 보―.
“수영은 안 하네? 배는 안 고파? 우리 뭐 먹을까?”
“깜짝이야!”
백은하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지선도 마찬가지였는지 딸꾹질을 했다.
풀 빌라는 구조상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놓는 게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이 들이닥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 기겁한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백은하가 말했다
“오빠, 언제 왔어. 뭐야. 이럴 거면 문자는 왜 보냈어.”
“먼저 놀고 있으라고?”
“짐 푼 지 10분 만에 올 거면 그런 문자는 왜 보냈냐는 뜻이야.”
“10분 먼저 놀고 있으라고?”
하아.
이놈의 오빠는 갈수록 하는 짓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백은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오빠. 무슨 일이었기에 가족 여행까지 미룬 거야.”
“길드 일이었어. 오빠도 이제 사회인이라는 거지.”
“뭐라는 거야. 오빠는 원래도 사회인이었어.”
“집에서 게임만 해서 착각을 좀 했어.”
치익. 냉장고에서 꺼내 온 맥주(이지선이 이런 날은 먹어야 된다고 사 왔다)를 꿀꺽 마신 백한영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게 맥주지.”
“그거 내 건데.”
“가족끼리 네 것 내 것이 어딨어, 이모. 아 참. 요즘 일은 어때? 안 힘들어?”
“왜? 힘들면 때려치우라고 하게?”
“이모 조카가 이제 그 정도 능력은 되지. 누가 힘들게 하면 말해. 이모 원하는 건 다 하게 해 줄 테니까.”
백한영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이지선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우리 조카 능력 있는 건 전 국민이 다 알지.”
“능력뿐이야? 게임 좋아하는 것도 다 알잖아.”
“그러게 말이야, 은하야. 아무튼 이모는 방송 작가 일이 좋아. 힘들긴 해도 보람이, 보람이…….”
“이모? 보람 있는 것 맞아? 왜 말끝을 흐려.”
“있어. 있다고. 있다니까? 매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일하지만 있다고. 못 믿어? 어떻게 해야 믿을래. 어떻게 해야!”
갑자기 PTSD가 도졌는지 발작하는 이지선.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진정시킨 백한영은 이내 한 가지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이모 프로그램 끝났잖아.”
“그렇지?”
“그러면 이제 쉬는 거야?”
“직장인이 그럴 리가 있니. 당연히 새 프로그램 들어가지.”
“어떤 프로그램?”
그 말에 이지선은 백한영이 들고 있던 새 맥주 캔을 뺏어 꿀꺽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다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안 맡는다고 하지 않았어?”
“어쩌겠니. 그런 대규모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을 겪어 본 작가가 흔하질 않은데.”
이지선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개고생할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번엔 연습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데뷔조 애들을 모아다가 서바이벌을 시킨다더라. 무슨 생각인 건지.”
“데뷔조? 그럼 걔네는 떨어져도 데뷔 확정이니까 별로 안 간절하지 않나?”
이해가 잘 안 가는지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지선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한 해에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이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간절하긴 간절하지. 중소 기획사 출신에게는 뜰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텐데. 그리고 우승하면 대기업에서 지원을 어마어마하게 해 줘서 우승하는 게 무조건 좋아.”
“그래? 근데 이미 데뷔가 확정된 애들이 서바이벌 하는 게 재미가 있나? 몰입이 덜 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알겠니.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해. 한두 군데는 대형 기획사 출신이긴 한데, 대부분이 중소 기획사 출신이라. 어떻게 보면 일반인 출신보다 독기가 넘칠걸? 걔네는 몇 년 동안 이것만 바라보며 살았으니까.”
“흐음.”
이모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백한영은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다. 이모의 일이라 물어본 거지, 백한영은 기본적으로 아이돌이나 연예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이왕 물어본 것, 마지막까지 물어봐야지.
“한두 개 있다는 대형 기획사는 어디야?”
“네가 말하면 아니?”
“그래도 대형 정도면 알지 않을까?”
“TW 엔터테인먼트랑 블링즈 엔터테인먼트야.”
흐음. 그렇구나.
“블링즈, 블링즈라.”
“알아? 의외네.”
“아니. 몰라. 근데 블링즈?”
블링즈. 블링즈. 블링즈?
아. 기억났다.
“한유림 씨 소속사가 여기 아니었던가?”
맞는 것 같은데.
만날 때마다 자기 TMI를 하도 말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는 맞나 보네, 내가 기억하는 걸 보면.”
“그렇다니까 그러네.”
“이모는 또 바빠지겠네? 언제부터 일해?”
“하하.”
백한영의 말에 이지선은 메마른 웃음을 터트리곤 나직이 말했다.
“모레부터.”
“난리 났다, 진짜.”
* * *
블링즈 엔터테인먼트 연습실.
그곳에서 누군가가 거울을 보며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포인트별로 안무를 쪼개 반복하는 연습을 끝없이 진행하던 그녀는 이내 연습실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부족해.’
그녀, 정예나에겐 데뷔조가 갑자기 무산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던 경험이 있었다.
뭐,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해도 2주 만에 블링즈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인 유상현이 주워 오긴 했지만, 그때의 충격적인 경험은 정예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만족이 안 됐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조금 더. 조금 더 능숙해야 됐다.
데뷔를 못 하는 경험을 또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
‘보컬, 보컬 트레이닝도 해야 돼. 이미 아침에 트레이닝을 받긴 했지만 개인 연습은 아직 못 했―.’
드르륵. 연습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나 너는 아직도 연습 중이야? 그러다 쓰러지겠다.”
“언니.”
이번에 정예나와 같이 데뷔하는 것이 확정된 블링즈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이선아였다.
“아직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러다 또 언니들한테 혼날라.”
“…아직 안 들켰잖아요.”
“내가 이를 건데 뭐가 안 들켜. 기다려 봐.”
이선아가 스마트폰을 꺼내 단톡방에 문자를 올렸다.
[이선아: 언니들~ 예나가 또 쓰러질 때까지 연습해요~]
[허지연: 그렇게 혼났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이선아가 이르기 무섭게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단톡방을 확인한 정예나는 답장을 보자마자 터치 패드를 후다닥 눌렀다.
[정예나: 아직 쓰러진 적 없잖아요. 유언비어 뭐예요.]
[허지연: 아직? 아직이라고? 너는 기절해야만 쓰러지는 걸로 취급하나 보네? 안 되겠다. 어디야. 아. 연습실이겠지? 딱 기다려.]
[정예나: 잠깐, 언니. 언니?]
답장이 없었다. 정예나는 울상을 짓고 이선아를 바라봤다.
“선아 언니, 나 어떻게 해?”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혼나야지.”
“혼나기 싫어!”
“싫으면 말을 잘 듣지 그랬니.”
하하하. 임무(정예나 감시)를 완수한 이선아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곧 중요한 일정이 있었기에 이선아도 최근 하드 하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예나는 하드 하다 못해 몸을 망가트리니까 혼나는 거지, 느긋하게 연습해도 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풀던 이선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 둘째 막내, 홍체리는 어딨어?”
“막내면 막내지 둘째 막내는 뭐예요.”
“그냥 막내라고 부르기엔 걔랑 너랑 동갑이잖아. 그래서 어딨어?”
“길거리라도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요. 체리 걔 조용히 돌아다니는 것 좋아하잖아요.”
“그래?”
체리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과일이라 그런가, 라며 이선아가 장난스럽게 말했을 때였다.
드르륵. 연습실 문이 재차 열렸다.
허지연이 찾아온 건가 싶어 화들짝 놀랐던 정예나는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습실에 들어온 사람이 허지연이 아닌 다른 언니인 탓이었다.
“린 언니. 힝.”
“무슨 일이냐.”
“언니, 단톡 안 봤어요? 한번 봐 보세요.”
“이 세계의 문명은 내게 너무 어려워서 말이다.”
이선아의 말에 방문자, 백한영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버린 차원을 달리는 소… 녀라기엔 나이가 살짝 있는 여인, 독고린이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예나.”
“넵.”
정예나가 군기가 바짝 들어서 대답했다.
허지연뿐만 아니라 독고린도 정예나를 자주 혼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지연과 독고린은 스타일이 달랐다.
허지연이 잔소리를 마구잡이로 하는 타입이라고 하면 독고린은…….
“그대가 조급한 건 알겠다. 하나 조급함은 심마(心魔)를 낳는 법. 몸도 몸이지만 마음 또한 신경 써야 될 것이다.”
어딘가 특이한 말투로 충고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참고로 정예나는 독고린에게 혼나는 걸 더 선호했다.
허지연의 잔소리는 너무 길어서 힘들었으니까.
“명심할게요, 언니.”
“그리고 이리 와 봐라. 흐음.”
독고린은 정예나의 몸을 이리저리 주무른 후에 말했다.
“확실히 몸이 지치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렇다니까요!”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군. 곧 중요한 일정이 있지 않나? 컨디션 관리도 무인… 이 아니라 예인(藝人)이 갖춰야 될 능력이다. 주의하도록.”
“네!”
정예나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독고린이 좋은 얘기를 해 줘서… 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허지연에게 혼날 일이 사라진 게 컸다.
이렇게 독고린에게 먼저 혼나면 조금 있다 허지연이 잔소리를 시작해도 자신이 이미 혼냈다고 말려 주니 말이다.
“좋단다.”
그런 정예나를 보며 이선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독고린에게 말을 걸었다.
“린 언니, 유상현 팀장님이 뭐래요? 얘기하고 온 것 아니에요?”
“예정대로 준비하면 된다더구나. 일정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네요. 그것 하나만 보고 죽어라 연습했는데, 파투라도 나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거예요. 그나저나 언니, 그 말투 진짜 컨셉 아니에요?”
“컨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내 원래 말투는 맞다.”
자신의 말투를 의심하는 이선아와 함께 몸을 푼 독고린은 안무 연습을 시작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유상현 팀장이 백 가가에 대해 알아봐 준다고 했으니, 곧 소식이 있겠지.’
백한영과 만날 날을 기다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