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원래 기계는 몇 대 때리면 고쳐져 (3)
무림의 역사는 길다.
무협지 속 무림도 보통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했지만, 백한영이 다녀온 세상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술법이라는, 무협을 오래 본 영감님들이 보면 크게 한번 갈(喝)을 할 설정이 포함돼서 그런가. 백한영이 다녀온 세상은 무림의 역사가 무려 1만 년을 넘었다.
1만 년. 요즘 뭐만 하면 버튼을 누르고 1억 년 동안 수련을 하고 와서 짧아 보이는 거지, 1만 년은 절대로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태어나고 지금이 될 때까지 대충 2,000년 정도밖에 안 지났다. 그 시간이 5번은 반복돼야 비로소 1만 년이라는 시간에 닿을 수 있었다.
얘기를 돌려서, 백한영이 다녀온 무림은 그 정도로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무공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지나가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무공을 만드는 게 바로 무림인들이다. 1만 년 동안 수많은 무공이 만들어졌고, 사라졌으며.
그중에는 당연하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무공도 있었다.
“요컨대 방법은 많다는 거야. 뭐가 하나 없이 태어난 애들을 위한 무공인 만큼 어딘가 부족하긴 하지만.”
성장 속도, 고점, 위력 등. 무언가 하나 빠져 있는 무공이 대부분이었지만, 금성화도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존재했다.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다만 말했듯 효율은 떨어져. 뭔가 하나 빠져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좋은 자세야.”
백한영이 금성화에게 이제야 무공을 알려 주는 건 별것 없었다.
천하의 백한영도 각성자는 아직 파악이 덜 돼서, 어떤 무공이 신성계 각성자와 잘 어울릴지 조사도 하고 고민도 좀 했던 것이다.
뭐, 결정 자체는 일주일 전에 내리긴 했다. 이것저것 하느라 바빠서 깜빡한 거지.
아무튼 불렀으면 됐잖아.
“선택지를 줄게.”
“선택지요?”
“내가 추천하는 게 있긴 한데, 네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첫째. 성장 속도를 희생할 것.
둘째. 고점을 희생할 것.
셋째. 위력을 희생할 것.
다른 것도 있는데, 수명이나 기타 등등을 희생하는 무공보다는 이 셋이 가장 무난했다.
“길드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건 뭐죠?”
“성장 속도를 희생하는 무공. 사실 이건 희생이라고 하기도 뭐해. 재능이 없는 애한테 맞춰서 만들어진 무공이 아니라 원래 무공 자체가 느린 거거든.”
“다른 건 어떻죠?”
“고점을 희생하면 말 그대로 상승의 경지로 가기 힘들어져. 아마 승천경의 벽 앞에서 세상을 저주하다 단전을 부수고 싶어질걸?”
“승천경?”
“어… 너네로 치면 SSS등급을 말하는 거야.”
백한영의 말에 금성화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S급의 벽도 까마득한데 SSS등급이라니.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해?
이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아까 한 그 인류 보완 계획이니 사도니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과 비슷한?
“농담 아니다.”
“SSS급이 정말로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본 적도 있어.”
“믿기지 않네요.”
인류 최강으로 유명한 검신도 SS급이 되냐 마냐로 왈가왈부가 많은 데 SSS급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보다 길드장님은 A급인데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지. 마당발인가.
하긴. 그런 재능은 등급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A급도 충분히 S급보다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금성화. 그런 금성화에게 백한영이 말했다.
“위력을 희생하는 무공은 어떤지 묻지도 않네?”
“제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니까요.”
“그래? 저것도 의외로 괜찮은데.”
위력을 희생한다. 얼핏 봐선 쓰레기 같겠지만, 목표가 정말로 높다면 이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결국 저 단점은 승천경에 들어서기만 하면 없는 것이 돼 버리니까.
승천경의 벽에 가로막혀 지옥을 맛볼 두 번째 선택지보다는 100배는 나았다.
“…SS급까지는 무난하게 갈 수 있는 겁니까?”
“두 번째를 고르게? 난 저걸 가장 비추천하는데.”
“S급만 돼도 인류 최후의 보루 소리를 듣습니다. SS급까지 갈 수 있다면 당연히 엄청난 무공이죠.”
“저게 나쁜 무공은 아니야.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비추천이라는 거지.”
백한영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성화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생각과 백한영의 생각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지?’
백한영은 남을 가르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김태식을 S급으로 키워 내고 신입 길드원을 몇 주일 만에 이 정도로 성장시킨 걸 보면 확실했다.
그런데 그런 백한영이 금성화의 선택을 달갑지 않아 한다?
명백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진 않긴 해.”
“하지만 별로 달갑진 않으시잖아요.”
“그거야 지금은 몰라도 SS급 정도로는 앞으로 힘들어질 수 있거든.”
전 차원에 특이점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고 했나.
점점 더 많은 적들이 찾아올 거고, 더 많은 강자와 싸워야 할 것이다.
격화되는 싸움 속에서 SS급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지구가 위험하다는 게 진심이었습니까.”
“진짜라니까 그러네.”
사실 금성화 하나쯤 SS급이라고 해도 큰일 나진 않았다.
애초에 다른 애들이 전부 승천경에 도달하지 못해도 별 상관이 없는데 한 명 정도 SS급이라고 무슨 일이 생길까.
그냥 자동 사냥 인간 하나가 탈주하는 게 아쉬워서 그랬지.
별것 아니었다.
“…….”
금성화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백한영이 옆에서 은근슬쩍 압박을 줬지만 금성화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우선 정보가 더 필요했다.
“느리다면 얼마나 느리다는 거죠?”
“내가 아는 무공 중에서 가장 느려.”
“구체적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금성화의 질문에 백한영은 친절히 답해 줬다.
“보통은 죽을 때까지 완성을 못 해. 완성이 뭐야. 소성도 못 이룰걸? 재능이랑 무관하게 말이야.”
“…네?”
“말했잖아, 내가 아는 무공 중에서 가장 느리다고.”
백한영이 알고 있는 수많은 무공 중 가장 느리다는 말을 들으려면 보통 느린 정도로는 안 됐다.
평생 익혀도 소성을 못 이룰 정도는 돼야 최고의 느림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청진호가 익힌 정종 무공의 끝판왕인 태극혜검(太極慧劍)도 이 무공과 비교하면 마공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로 금성화가 배울 무공은 느리고, 착실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 알지? 얘는 앞에 대가 한 10개쯤 붙는다고 생각하면 돼.”
“그런 무공을 익히라니. 진심입니까?”
“보통은 네 말이 맞아. 이건 원수가 아니면 추천하면 안 되는 무공이긴 해. 완성되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느리잖아.”
수명이 무한대가 아닌 이상 익히면 안 되는 무공을 사람에게 추천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면 하면 안 됐다.
게다가 이 무공이 또 악질인 게, 장수종은 익히는 게 불가능했다. 오직 인간만이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추천했다는 건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확실히 그렇군요.”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어. 다른 사람은 못 하고 나만 할 수있는 방법이야. 어떻게 할래?”
“…첫 번째 무공으로 부탁드립니다.”
의도당한 느낌은 있었지만, 저런 조건이면 나쁘지 않았다.
원래라면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무공이다. 그만큼 완성했을 때의 리턴이 확실할 텐데,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다니. 이건 고르지 않는 쪽이 바보였다.
“자.”
백한영은 쌓여 있던 3개의 책 중 가장 위에 있던 걸 들어 금성화에게 던졌다.
금성화는 받아 든 책의 제목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태허진을공(太虛眞乙功)?’”
“아. 이걸 설명 안 해 줬네. 그걸 익히는 순간 당분간 어디 못 돌아다녀. 특수한 수련장에 틀어박혀야 되거든.”
“얼마나 그래야 되죠?”
“일단은 소성(小成)을 이룰 때까지?”
소성. 작은 성취. 그걸 이루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오는 다졌다.
어차피 가까운 사람 같은 건 없는 금성화다. 폐쇄된 공간에 틀어박힌다고 해서 곤란할 것도 없었다.
‘아니, 혈연만 따지면 잔뜩 있긴 한가. 그 인간들이 안 곤란해하니 의미 없지만.’
피식 웃은 금성화는 이내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답변 한번 시원하니 좋네. 너는 내가 꼭 가장 빨리 승천경에 집어넣어 줄게.”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가장 빨리요? 그게 돼요?”
“당연히 태허진을공을 익힌 사람 중에서 가장 빨리지. 네가 다른 애들보다 빨리 승천경이 될 수 있으면 태극혜검이니 오호단문도니 그런 걸 왜 익혀. 태허진을공이나 익히지.”
확실히 그랬다
납득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금성화에게 백한영이 말했다.
“쓸데없는 경쟁의식 갖지 말고 너한테 집중해. 원래 대기만성 무공은 자신과의 싸움이거든.”
“알겠습니다.”
* * *
“바쁘시네요?”
“그래도 이걸로 거의 다 끝냈어요.”
이초아의 말에 백한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금성화를 특수한 수련장에 집어넣고, 다른 길드원들에게 강화된 수련법을 알려 주고 나니 몇 시간이 꼬박 지났다.
길드원이 많아지니 할 일도 배로 많아졌다.
‘다음 길드원은 신중하게 받자. 자동 사냥 인간 육성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일이 더 늘어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겠다.’
적어도 지금 길드원들이 선생 노릇을 할 수 있는 수준은 된 후에 받아야지. 안 그러면 일하느라 시간을 다 쓰게 생겼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떠올리며 백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이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왜 불렀어요?”
“이초아 씨요? 아까 말했잖아요, 지구가 위험하다고.”
“그건 들었어요. 그런데 그래도 저를 부를 이유는 없잖아요. 저한테 무공을 알려 줄 수도 없고.”
“그건 그런데, 이초아 씨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봤거든요.”
길드원 강화 계획을 짜며 백한영은 이초아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다.
이초아는 길드 내에 두 명밖에 없는 S급 각성자. 심지어 마법사였다.
당연히 귀중한 전력이고, 강화하면 쓸 곳이 많았다.
아쉽게도 무인인 백한영에게 마법이 미지의 영역이라 그렇지.
때문에 백한영이 이초아에게 마법적인 조언을 해 주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도움을 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백한영은 무림 세계에서 많은 술법사과 어울렸다. 휘하에 수많은 술법사를 뒀던 만큼 백한영은 술법사 자체에 대해서는 꽤 잘 알았다.
술법사는 골방에서 연구만 하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도 실전은 중요했다.
술법은 명백히 실체가 있고 현실에서 사용되는 것. 연구만으론 한계가 있었고, 실전을 겪어야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술법사와 마법사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마법사도 비슷할 거라 가정하고.
백한영은 술법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이초아에게도 쓸 생각이었다.
“저번에 대련 얘기 했었죠? 그걸 본격적으로 해 보죠.”
“본격적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련하는 시간을 갖는데, 예전이랑은 살짝 내용이 다를 거예요.”
“구체적으로는요?”
“이초아 씨의 경지보다 한 단계 위의 힘을 쓸 거예요.”
한 단계 위의 적과 싸운다. 이것만큼 술법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도 드물었다.
벽이 느껴지는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술법적 역량과 경지가 늘어났으니까.
이초아가 말했다.
“좋아요.”
“엄청 힘들 텐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백한영이 걱정했지만, 이초아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뭐고 백한영과 만날 일이 늘어서 신난 건 아니고.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뻐서 그랬다.
진짜다.
“대련은 언제부터?”
“바로 오늘부터 하죠. 준비해 놓으세요. 금방 갈게요.”
“알겠어요.”
그렇게 이초아를 보낸 백한영은 마지막 남은 길드원에게 걸음을 옮겼다.
“형, 왔어요?”
소냐와 놀아 주고 있던 김태식은 백한영의 등장에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백한영은 소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래, 왔다. 술은?”
“아까 사 놨어요. 진짜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얘기하자면 길어. 소냐나 다른 애들한테 맡겨 놓고 와. 진짜 할 말이 산더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