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원래 기계는 몇 대 때리면 고쳐져 (2)
“어디 가는 거야?”
“잠깐 놀러?”
“놀러?”
“응. 놀러.”
운전대를 잡은 김태식은 소냐의 말에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자기도 지금 백한영이 왜 불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형이 이렇게 부르면 보통 좋은 일은… 좋은 일은 맞긴 한가? 하긴 강해지니까. 대신 그만큼 힘들어서 그렇지.’
백한영이 길드원들을 소집한 이유를 추측하던 김태식은 이내 슬쩍 옆을 바라봤다.
조수석에서 소냐가 얌전히 안전벨트를 매고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소냐는 그새 한국에 익숙해져서 한국어도 곧잘 했다. 대충 김태식이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한국어를 익혔는데, 덕분에 김태식은 기껏 배운 러시아어의 사용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좌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며 김태식은 뒷좌석을 살펴봤다.
이초아와 금성화가 양옆에 앉아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마법 연구를 하다가 끌려 나왔고 한 명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끌려 나왔다.
저 사람들은 왜 부른 거지. 이초아 씨야 그렇다 치고, 금성화 씨는 몸 쓰는 데 영 재주가 없어서 무공을 못 가르쳐 주는 것 아니었나?
형의 생각이 궁금하네.
김태식은 금성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초아 씨야 뭐 S급이기도 하고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별로 신경 안 쓰였지만, 금성화 씨가 걱정이었다.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이는 게, 내가 이 길드에 있어도 괜찮은가를 고민 중인 것처럼 보였다.
가입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저런 고민을 한다는 건 절대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동협이도 말했지만 역시 이건 형이랑 상담해 봐야겠다.
그렇게 결정한 김태식은 차를 몰고 내비게이션에 찍힌 장소로 차를 몰았다.
한참을 이동한 김태식은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한 후 내려섰다.
“여긴?”
금성화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초아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장으로 안내한다더니 웬 던전 게이트가 튀어나왔으니 당연했다.
“들어가시죠.”
“여기는 던전 게이트인데요? 여기 맞아요?”
“네. 걱정 마세요.”
금성화의 걱정에도 김태식은 소냐를 어깨 위에 올리고는 던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금성화가 미간을 좁혔다. 던전 게이트에 그냥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애를 데리고 들어가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여기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성화는 조심스럽게 던전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빙글 돌고,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여긴?’
순식간에 휴양지를 닮은 탁 트인 장소로 이동한 금성화가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던전 게이트 중 일부는 이런 식의 넓은 형태라고 했지.
설마 그런 곳을 찾아서 훈련장으로 쓰는 건가?
이게 무신련의 빠른 성장 속도의 비밀?
…….
성장. 성장이라.
보기 좋은 풍경에 잠깐 들떴던 금성화는 현실을 깨닫고 빠르게 기분을 가라앉혔다.
무신련의 빠른 성장. 사실 각성자 관계자 중 이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무신련에 이력서를 넣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빠른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꽂혔다.
금성화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만에 B급에서 S급이 돼 버린 김태식의 소식을 들은 금성화는 자기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무신련에 이력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좋았다.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금성화는 인생이 술술 풀린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물론 딱 거기가 끝이었다.
기껏 합격한 무신련에 출근한 그날 금성화는 백한영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S급이 될 수 있냐고요? 어… 금성화 씨는 신성계 각성자잖아요. 제가 각성자는 전문이 아니라 잘 몰라요.”
“모르신다고요?”
“몸 쓰는 데에 재주가 별로 없던데요. 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그다지 안 내킬걸요?”
무신련은 실제로 S급을 키워 낼 역량을 가진 길드는 맞았다.
하나 그건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한정된 말이었다.
‘몸 쓰는 데 재주가 없다라.’
각성자가 강해지는 방법은 크게 3가지 정도였다.
첫째. 마나의 양을 늘린다.
둘째. 각성 능력을 성장시킨다.
셋째. 무기술 혹은 전투술을 익힌다.
당연하지만 금성화에겐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지밖에 없었다.
간단한 호신술이라도 익히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도저히 몸이 안 움직인 탓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몸치인지 잘 아는 만큼 금성화는 백한영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그렇기에 고민 중인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 길드에 계속 있어도 되는가를.
‘길드장님이 내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와중에 길드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길드에게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 변명하지 않겠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길드를 배려하고 말고 그런 얘기가 아니라, 순전히 스스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았기에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다.
금성화는 S급이 돼야만 했다. S급이 돼서, 세상의 정점에 우뚝 서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근데 이곳을 나간다고 해서 더 좋은 조건의 길드에 들어갈 수는 없을 텐데.
역시 길드에 대한 건 조금 더 고민을―.
쾅!
상념을 이어 가던 금성화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야. 여기 안전한 던전 아니었어? 왜 전투 소리가.
“대련이라도 하나 보네요.”
“아.”
S급다운 상황 파악 능력으로 폭음의 정체를 맞힌 이초아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사실 몇 주일도 안 됐다) 백한영이 보자고 해서 살짝 들뜬 건 아니고. 그냥 용건이 궁금해서 그랬다.
진짜다. 중요하니 두 번 말하겠다.
“대련을 하고 있는 건… 신입 길드원 둘이네요.”
“배예린, 청진호.”
길드에 가입한 첫날부터 치고받은 둘인 만큼 대련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금성화는 충격받은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무언가. 무언가가 달랐다.
몇 주일 전과는, 그러니까 막 길드에 가입했을 때와는 둘의 느낌이 아예 달랐다.
배예린이 대련장을 질주했다. 파지직. 배예린이 밟은 자리마다 스파크가 일었다.
거기까진 이상하지 않았다. 배예린의 각성 능력은 뇌류상인(雷流狀印). 전기를 다루는 제어계 각성자였기에 저 정도는 원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금성화가 알던 배예린과는 거리가 멀게 했다.
파직. 배예린의 전신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진 뇌전이 배예린의 도에 집중됐다. 뇌전이 응축되고, 응축이 정점에 달한 순간 배예린이 초고속으로 도를 뽑아 들었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1식.
뇌호단조(雷虎斷爪).
천둥의 발톱이 청진호를 덮쳤다.
금성화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만큼 청진호가 무방비한 상태로 보였던 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평온한 상태였지만.
스륵. 청진호의 검이 움직였다. 느리게. 동시에 빠르게.
모순되는 문장이었지만, 모순이 아니었다.
느릴지언정, 상대보다 먼저 도착한다면 그것이 곧 빠름이니까.
후발선제(後發先制).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한다.
유(柔)의 극한이 청진호의 검에서 재현됐다.
청진호의 검이 원을 그린다.
바위도 으스러트릴 위력이 담긴 도였지만, 그 또한 만물의 일부.
즉, 태극이 포용 가능한 범위였다.
아직 작고 어설플지언정 청진호의 검이 그린 것은 태극.
충분히 배예린의 도를 감당할 수 있었다.
――.
순간 대련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시끄럽던 천둥을 태극이 완벽하게 지워 버렸으니 당연했다.
“쯧.”
하나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청진호가 혀를 찼다.
여기서 더 숙련되면 태극 안에 들어온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조종해 시전자에게 돌려주는 게 가능했건만, 지금은 이렇게 사라지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역시 아직 실전에서 써먹을 정도는 아니군.
갈 길이 먼 걸 깨달은 청진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배예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아직 안 끝났어! 다시 해!”
“너는 무공만 시끄러운 게 아니라 목소리도 시끄럽군. 현재 우리 둘의 실력은 호각. 그렇다면 패자는 먼저 체력이 떨어진 쪽이 될 텐데, 너 같은 체력 바보와 그런 치킨 게임을 할 이유는 없지.”
“쫄았어? 쫄았네. 그러면 내 승리야. 낙장불입이니 바꿔 달래도 안 바꿔 줄 거야. 이걸로 내가 1승 5무 0패. 너는 0승 5무 1패야. 잘 기억해 둬.”
“도발해도 소용없다. 0승 6무 0패니 잘 기억해 놓도록.”
“이익!”
다시 붙자고 소리치는 배예린과 그걸 무시하며 개인 수련장으로 향하는 청진호.
그리고 그걸 바라보던 금성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청진호와 배예린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걸 보니 조급해진 것이다.
한 달 동안 자신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청진호와 배예린은 저 멀리 앞서갔다.
고작 한 달 동안의 차이만으로 이랬는데 반년 후에는 어떨까? 일 년 후에는 어떻고?
아마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어쩌지?’
금성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다른 길드에 간다고 지금 배예린과 청진호처럼 성장할 수 있나?
물론 금성화는 배예린과 청진호와 경쟁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적은 S급이 되는 거지 누군가와 경쟁해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눈앞의 명확한 결과를 외면하긴 힘들었다.
누가 봐도 빠르게 S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둘과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
이 상태가 무신련을 벗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있기에는 S급이 될 길이 요원해 보였고.
무언가, 무언가 방법이.
“왔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금성화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백한영이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백한영의 등장에 김태식이 소냐를 땅에 내려 주며 말했다.
“형,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얘기하자면 길어. 용건 자체는 짧은데 에피소드가 길다고 해야 되나. 너는 앞뒤 사정까지 전부 들어야 되니까 오늘 밤에 술이나 마시자.”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 게 있어. 금성화 씨랑 이초아 씨도 왔네? 이러면 슬슬 본격적으로 설명을 해 볼까?”
백한영은 다른 사람을 전부 불러 모았다.
원래 던전에 있던 길드원들에게 짧게 설명은 해 줬지만, 자세한 설명은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보류해 뒀기 때문이었다.
백한영의 부름에 길드원들이 전부 공터에 모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백한영은 짧게 자신의 계획을 소개했다.
“인류 보완 계획을 실시할 계획이다.”
“심각해 보이는데, 대체 그게 뭐죠?”
“…이게 뭔지 모른다고?”
백한영은 거대 로봇이 사도와 싸우는 애니메이션이 틀어진 태블릿 PC를 슬쩍 치웠다. OTT 사이트에 떴길래 옛 추억을 살릴 겸 봤는데, 진짜 옛 추억이었구나. 아무도 모르네.
큼큼. 분위기 환기에 실패한 백한영은 헛기침을 하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구가 위험해.”
“그거 진지한 얘기예요?”
“이건 진지한 얘기가 맞아. 그래서 너네가 강해져야겠어. 나 혼자서는 벅차거든.”
여기서 벅차다는 건 혼자서 막을 자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놀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다는 얘기긴 했다.
이초아가 물었다.
“얼마나 강해져야 되는데요? 저로도 부족해요?”
“네. 부족해요.”
백한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S급인 이초아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강자였지만, 백한영의 기준으로는 아직 한참 모자랐다.
“수련 방식은 전부 다르게 생각해 뒀으니 한 명씩 돌아가며 알려 줄게요.”
“나도?”
“그래, 소냐야. 너도 당연히… 얘들아, 쓰레기 보듯 쳐다보지 마. 설마 내가 얘한테도 너네한테 하는 것처럼 하겠니? 근데 이건 아까 말해 주지 않았어? 왜 또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냥요.”
소냐마저 인류 보완 계획 혹은 자동 사냥 인간 육성 프로젝트에 집어넣으려는(오해) 백한영을 쓰레기 보듯 쳐다보는 길드원들.
그런 길드원들에게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던 백한영은 문득 한 명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입을 열었다.
“금성화 씨? 어디 안 좋으세요?”
“…그런 목적이면 저는 왜 부르셨죠? 저는 강해질 방법이 없잖아요. 적어도 길드장님에게 가르침을 받지는 못할 텐데요, 몸을 쓰는 데 재능이 없어서.”
금성화의 말에 백한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백한영이 말했다.
“어… 제가 말 안 했나요?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있다고요?”
“네.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만 방법이 있긴 한데 왜 없다고 생각하신 거지. 말이 잘못 전달됐나. 아무튼 어떻게 할 건가요. 말했듯 효율이 엄청 떨어져서 그냥 각성 능력을 갈고닦는 게 나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도 하실래요?”
“하겠습니다.”
조금 전 눈에 띄게 성장한 배예린과 청진호를 보고도 이 제안을 거절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금성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한영은 이내 길드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분간 바빠질 거예요. 만약 처리해야 될 일이 있으면 전부 오늘 해결하고 오세요.”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