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원래 기계는 몇 대 때리면 고쳐져 (1)
최동협은 멍하니 강원도 인근의 게이트에 진입했다.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던전에 들어선 최동협은 그대로 수련장으로 향했다가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왔어?”
신유나가 다가왔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찰나에 최동협이 나타나 반가웠던 것이다.
“어? 어어.”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신유나의 말에 최동협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수많은 흡혈귀. 그들의 주인인 진조(眞祖).
그리고 그 모든 걸 단번에 쓸어버린 백한영까지.
참 많은 일이 있긴 했다.
최동협이 말했다.
“우린 교관님한테 가르침받는 걸 행운으로 알아야 돼.”
“언제는 아니었어? 갑자기 왜 그래.”
“하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렇게 가볍게 말해도 되는 게 아니야.”
“왜 이래, 얘. 뭐 잘못 먹었어?”
“괴롭다. 진실을 안 사람은 이토록 괴롭구나.”
세계의 진실을 알기라도 한 사람처럼 헛소리를 지껄이는 최동협의 앞에서 신유나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누가 봐도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쩌자고 저런 놈을…….’
혹시 내가 눈이 낮기라도 한가? 쟤가 뭐가 예쁘다고 좋아하는 건지.
그렇게 스스로의 취향에 신유나가 다시 한번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였다.
“뭐 하냐, 얘들아.”
푹 쉬고 그새 게임도 실컷 하고 온 백한영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교관님!”
최동협이 벌떡 일어나 백한영에게 달려갔다.
존경심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최동협을 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백한영은 이내 신유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얘 왜 이러냐?’
‘저도 몰라요.’
입 모양으로 신유나와 대화를 나누는 백한영에게 최동협이 빠르게 말했다.
“교관님, 앞으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세요.”
“언제는 안 그랬어? 왜 그러니.”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교관님의 진정한 힘을 보고 개안한 것입니다!”
“진정한 힘?”
최동협의 말에 대답한 건 백한영이 아닌 신유나였다.
신유나가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운 거야?”
“하. 고작? 신유나, 너도 교관님이 강한 건 알고 있었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교관님의 진정한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관님, 쟤한테 보여 준 거랑 예전에 저에게 보여 준 거, 어때요? 많이 차이 나요?”
“어… 아니? 따지고 보면 쟤가 본 것보다 너한테 보여 준 게 더 고등한 경지긴 해.”
“그렇다는데, 동협아?”
“…네?”
최동협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세계의 진실(진)이 세계의 진실(개나 소나 다 앎)로 변했기 때문이다.
“뭔데. 언제 본 건데.”
“예전에? 그러니까 교관님에게 무공을 전수받고 다음 날?”
“엄청 예전이잖아!”
최동협이 백한영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말이 진짜냐고 묻듯이.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인데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백한영은 예전 일을 회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될 이상향을 보여 줬지, 경지 상승에 도움이 되게.”
“수백 개의 검이 각자 다른 검술을 펼치는 게 진짜 장관이었죠.”
둘의 대화에 최동협이 억울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왜 저는 안 보여 주셨어요. 저도 제 궁극점을 알고 싶은데.”
“네 궁극점은 내면에서 완성되는 거라 겉으로 봐서는 티가 잘 안 나. 그리고 보여 줘도 도움이 안 되는 걸 넘어 방해만 되고.”
“아니, 왜요?”
“그야 그런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면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너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그냥 머리 비우고 나무 공만 피하면 알아서 경지가 상승하는데 쓸데없는 짓을 왜 해.”
“아.”
최동협이 탄식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보이는 게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다.
‘혹시 그게 슬럼프의 원인이었나.’
하지만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생각을 멈추라니. 그게 말이 쉬워서 그렇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뇌는 부정의 개념을 모른다. 스테이크를 떠올리기에는 쉬워도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스테이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테이크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비우고 수련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건지 등등. 고민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머리를 비우라니.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최동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요즘 수련을 할 때마다 잡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슬럼프도 찾아왔고요.”
“음. 좋은 현상이야.”
“예?”
상상도 못 한 백한영의 대답에 최동협이 당황했다.
좋은 현상이라고? 슬럼프가?
“아. 슬럼프는 당연히 좋지 않지. 내가 말한 건 다른 쪽이야.”
“어떤 거요?”
“잡생각이 많아진 거.”
“저는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면서요.”
“당연히 많으면 안 되지. 근데 잡생각이 많아졌다는 건 여유가 많아졌다는 뜻이거든.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생각이라는 건 원래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였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사람은 이성이고 뭐고 본능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최동협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설마.”
“맞아. 축하한다, 동협아. 너는 오늘부터 백한영 특별 과정을 수료하게 될 거다.”
“지금보다 더 빡세게 한다고요? 진심으로요?”
“웬 엄살이야. 네가 잡생각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여유롭다는 뜻이야.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수련을 마치고 기절하듯 드러눕는데, 여기서 더요?”
“드러누울 기력이 남았네. 선 채로 기절 정도는 해야 어디 가서 제대로 수련했다고 자랑할 수 있어.”
최동협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사실 말이 여유가 생겼다지, 최동협이 받는 훈련은 절대 쉽지 않았다.
한 번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서 말도 못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여기선 백한영의 말이 맞았다.
그럼에도 잡생각이 난다는 건 여유가 아주 약간이나마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마른걸레 짜듯 기운을 전부 짜낼 필요가 있었다.
고생길이 펼쳐진 최동협을 보며 신유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배예린 대련 나한테 짬 때리더니 꼴좋다.’
그런 신유나에게 백한영이 말했다.
“유나 너도 기쁘구나.”
“네?”
“네 훈련도 준비해 놨는데,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보람이 느껴지는걸.”
“예?”
신유나의 입이 고장 난 카세트처럼 ‘네?’와 ‘예?’만 반복해서 내뱉었다.
자신의 훈련도 준비해 놨다니.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저는 왜요? 저는 슬럼프를 겪지 않았는데요?”
신유나는 지금도 착실히 성장 중이었다.
애초에 최동협과 재능이 방향이 다른 신유나는 극한의 훈련 같은 걸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돌아보며 철학을 가다듬고, 의념을 조율하고, 심상을 깎아 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느려. 그대로는 안 돼.”
그런 신유나라고 해서 극한의 훈련이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훈련이라는 건 원래 다다익선. 지금도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극한의 경험을 겪고 나면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신유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저 곧 S급인데요? 지금 심상(心像)과 강환(劍丸)이 뭔지 거의 다 감 잡았어요.”
“뭐야. 너 언제 그 정도로 앞서갔어.”
“넌 조용히 해, 최동협. 아니, 교관님. 이래도 느리다고요?”
“어. 느려. 나도 그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백한영의 자동 사냥 인간 육성 프로젝트의 원래 목표는 S급이었다.
S급만 돼도 세간에서 치켜세워 주길래 여기는 S급이면 충분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이번에 만난 유르시를 보니 절대 아니었다.
S급?
그 정도로는 자동 사냥을 할 수 없었다. 유르시를 상대하기 위해선 S급이 뭐야. SSSSS급은 돼야 했다.
뭐 그래. 유르시는 유독 강한 놈이었다고 치자. 그런 변수까지 고려하면 끝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진조(眞祖)는? 백한영의 일검에 소멸해서 그렇지, 그 녀석도 따지고 보면 만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진조는 김태식이 10명 모여도 상대가 불가능했다. 그 정도로 진조와 김태식 사이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S급 중에서도 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는 심상병기(心像兵器)의 사용자인 김태식이 그랬다. 당연히 강환을 쓰는 정도가 끝인 S급 입문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S급을, 진조 선에서 커트당하는 경지를 기준으로 계획을 짠다고?
일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거랑 다를 게 없었다. 얼마나 세상이 좋았으면 혼자서 지키려고 했을까.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아무튼 내 목표는 오늘부터 심플해.”
“뭔데요?”
“사람들이 인류 최강이 누군지 토로할 때 우리 길드원의 이름만 나오게 하는 거야.”
“검신을 제치고 우리가 인류 최강이 되라고요?”
“검신 이러고 있다. 너네가 누구한테 가르침받는데 가짜 검신 하나 못 이기겠냐?”
“…가짜 검신이요? 천진혁 말고 진짜 검신이 따로 있어요?”
최동협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백한영은 빠르게 계획을 점검했다.
‘2년, 아니 1년 안에 전부 승천경(昇天境)에 집어넣는다.’
승천경은 지고한 경지였다.
수십 년간 벼려 낸 이미지를 이용해 내면에 소세계(小世界) 혹은 소우주(小宇宙)를 완성하는 것이 화경(化境). 그다음의 경지가 현경(玄境)이었는데, 그 현경조차 넘어선 것이 바로 승천경이었으니까.
반쯤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경지에 오르는 게 절대 쉬울 리 없었지만.
백한영은 자신이 있었다.
‘얘들이 재능은 부족하지만, 선생이 나니까.’
어차피 초월자가 되기 위해선 단순히 재능이 뛰어난 정도론 안 됐다.
정말 재능이 미치도록 뛰어나서 전 차원에서 손꼽힐 정도라면 모를까. 고작 필멸자 수준의 재능으로는 어차피 초월자 입장에서 거기서 거기였다.
초월자가 되기 위해선 무언가 하나를 극한으로 갈고닦아야 됐다.
각오든, 재능이든, 노력이든, 삶이든. 아무튼 무언가 한 가지를 정해 그걸 극한으로 갈고닦아 필멸자의 한계를 부숴야만 했는데.
그래서 백한영의 길드원은 무엇을 무기로 삼아야 되냐.
각오? 풍요로운 현대에 태어난 이가 품는 각오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대부분이 각오를 품어 봤자 필멸자의 한계를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능? 길드원들에게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말했듯 재능은 전 차원에서 손꼽힐 정도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노력? 삶? 이건 각오와 맥락이 비슷했다. 간절함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각오도, 재능도, 노력도, 삶도 안 된다면 대체 백한영의 길드원들은 뭘 재료로 승천경에 오르냐고?
스승이 백한영 걸 재료로 삼으면 되지.
그게 무기야, 쟤네는.
사상 최초… 는 모르겠지만, 다 떠 먹여 줘서 탄생한 초월자나 한번 보자.
동등한 경지인 초월자는 우리 애들을 보고 만들어진 초월자라고 경멸하겠지만, 어쩌라고.
자동 사냥만 잘하면 되지.
그리고 내 앞에서 그 소리 하면 대가리 깨 버릴 거니까 어디 가서 애들 기죽을 일도 없고. 완벽해.
“저희만요?”
“당연히 태식이도 포함이지. 애 데리고 여기로 오라고 진작 연락 넣어 놨어. 금성화 씨랑 이초아 씨까지.”
“애요? 설마 소냐 걔도 훈련을 시켜요?”
“가볍게 능력 활용법을 배우기는 할 건데, 너희한테 하는 것처럼은 안 하지. 나를 뭘로 보고.”
백한영의 말에 최동협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의 마음이 없는 괴물로 봤죠. 네.
최동협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당분간 진짜 죽어 나가겠구나.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어느새 훈련을 마친 배예린이 깡총거리며 다가왔다. 최동협이 손을 내저었다.
“알면 다쳐요. 가세요.”
“뭐예요. 왜 저희만 따돌려요.”
“안 따돌려. 걱정 마, 너네도 준비해 놨으니까.”
백한영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단 한 명도 못 빠져나가.
모든 건 내 안락한 일상을 위해서니까 고생 좀 해 주라, 얘들아.
그래도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받는 검신(진)의 교습이야.
기뻐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