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신화의 종결자 (3)
유르시는 백한영의 경지를 상급 신이라고 추측했다.
상급 신.
대문명을, 우주적인 규모를 갖춘 문명을 단신으로 박살 낼 수 있는 경지.
백한영이 그런 상급 신일 것이라고 유르시가 추측한 건 별게 아니었다.
사실 유르시는 백한영의 경지를 정확히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백한영과의 격차가 너무 심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르시는 백한영이 상급 신의 경지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급 신도 이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상급 신까지는 아직 경계선 안에 있었으니까.
대문명이 몇 개가 오든 감당이 안 되는, 오직 같은 경지에 오른 신만이 상대할 수 있는 최상급 신이 됐다면 저렇게 인간의 삶을 추구할 수 없었다.
최상급 신부터는 흔히 생각하는 ‘진짜’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불완전한 전지와 전능을 얻은 자. 그것이 최상급의 신이었다. 되기 위해선 많은 걸 희생하고, 또 많은 걸 각오해야만 했다.
저렇게 어중간하게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자는 그 경지에 절대 오를 수 없었다. 때문에 유르시는 백한영이 상급 신이라고 추측했는데.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맞긴 했다. 백한영은 최상급 신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경지에 ‘반쯤’ 발을 걸친 것뿐이다.
그러니 유르시의 추측은 잘못되지 않았다.
않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불완전한 전지는 얻지 못했군. 전능의 파편만 어떻게 손에 넣은 건가.’
쉽게 말해 전지는 ‘지식’, 전능은 ‘힘’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백한영은 딱 봐도 모든 걸 알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전지와 전능 중 전능 쪽을 약간이나마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화륵. 백한영의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 저걸 그런 식으로 퉁쳐도 될까?
메테오조차 단번에 증발시키는 대파괴의 정수를, 단순히 불꽃이라 칭하는 게 맞는 걸까?
백한영의 검에서 시작된 불꽃이 그 크기를 늘렸다.
하늘을 뒤덮은 파괴의 정수. 우주에서 관찰해도 바로 포착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초거대 불덩어리가, 이내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했다.
――――!
세상이 불타올랐다. 유르시가 준비한 수많은 골렘들이 전부 녹아내렸다.
순식간에 두 번째 안배가 무용지물이 된 걸 바라보던 유르시는 백한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승산이 희박하군.’
안 그래도 희박했던 승산이 더 낮아졌다.
인과율의 왼편에 앉았던 그때라면 모를까. 지금 유르시가 끌어올 수 있는 인과율의 힘이라고 해 봤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최상급 신의 경지에 반쯤 발을 걸친 백한영을 무력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르시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뭔가, 뭔가 방법이.
“이제 진짜 끝이야?”
백한영의 시선이 유르시에게 닿았다.
지금 백한영의 말투는 장난스럽고, 태도는 건들거렸지만, 눈빛까지 그러지는 않았다.
한없이 차가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저건 적을 용서할 생각이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끝? 이대로 끝이라고?
정말로?
유르시는 일생을 신을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결국 신을 전부 죽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타협했다. 신을 시야에서, 세상에서 치우는 걸로 만족하자고.
그것만 해도 미친 짓이었지만, 유르시는 결국 성공했다.
신화의 시대를 끝내고 필멸자의 시대를 연 것이다.
농사? 그런 건 신의 축복이 없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었다.
병? 그것 또한 신의 축복이 없어도 인간끼리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신에게 의지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신 같은 건 없어도 됐다.
아니. 없어도 되는 걸 넘어 오히려 방해됐다. 신이라는 편리한 힘에 기댔기에 인간은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인간은 신들이 사라지자마자 빠르게 발전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상이 발전했다. 인간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유르시는 그 평화를 즐기지 못했다.
평화의 시대를 연 당사자면서, 평화를 즐기는 게 목적이었으면서, 정작 그걸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끝이라고? 아직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누리지 못했는데 끝?
그럴 순 없어.
절대로.
유르시의 마력이 격하게 터져 나왔다.
중급 신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보유한 마력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력이 세상을 잠식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유르시의 장점은 전투에 있지 않았다. 때문에 마력량도 동등한 경지의 마법사보다 부족했지만.
부족함은 메꾸기 위해 있는 법.
미래의 가능성을 판다. 그 대가로 마력을 빌려 온다.
어차피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미래의 가능성 같은 건 인과율의 씨앗을 얻는 순간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 설사 되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평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 그다음은 어찌 되든 좋았다.
마력에 잠식된 가상의 화성에 유르시가 의지를 불어넣었다.
구구구구궁!
행성에 변화가 생겼다.
지표면에 건축물이 생겼다든가, 바다가 증발했다든가 하는 종류의 변화가 아니라, 행성 자체에 직접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둥그랗던 행성이 마치 하나의 창처럼 변했다.
우웅―!
창으로 변한 행성 표면에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인챈트였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을 뿐, 유르시가 한 건 따지고 보면 간단했다.
연금술로 대지를 변형해 무기를 만들고, 그것에 마법을 부여한 것.
그게 행성 규모로 커져서 그렇지, 원리 자체는 간단했다.
원리가 간단하다고 위력까지 간단하진 않았지만.
“이야.”
백한영이 속으로 나직이 감탄했다.
이 정도 규모의 공격에 노출된 게 얼마 만이지. 마신을 쓰러트린 후에 처음이니까, 거의 십몇 년 만인가?
살짝 향수를 느낀 백한영이 예전 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있자, 유르시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나는 신화의 종결자 유르시다! 이런 곳이 내 마지막일 리 없어!”
그 말을 신호로 유르시의 마법이 완벽히 발동했다.
권능 마법, 롱기누스의 창(Lance of Longinus).
행성 크기의 창 표면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진에 마력이 주입됐다.
구구궁.
롱기누스의 창이 움직였다.
목표는 백한영.
유르시를 방해하는, 이 차원의 수호자였다.
쯧. 백한영이 작게 혀를 찼다.
‘피하는 건 힘들겠는데.’
메테오 때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메테오가 단순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 고등한 마법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저것도 똑같았다.
저건 단순히 행성 크기의 창이 아니었다.
물론 행성 크기의 창이면 그것만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질량 병기였지만, 그걸 넘어 저것은 초거대 마법. 회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뭐. 회피할 수 있었다고 해도 저런 걸 보여 줬는데 그냥 스윽 피해 버리는 것도 그렇지.
모든 걸 쥐어짜 낸 필살의 일격인데, 맛 정도는 보는 게 예의였다.
백한영이 검을 들었다.
롱기누스 창으로부터 거대한 압박이 발생했지만, 백한영은 거기서 자유롭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저 정도의 마법이다. 여기선 나도 제대로 응해 줘야겠지.
곁다리로 배운 무공이 아니라, 내 성명절기(成名絕技)로.
상단세로 검을 든 백한영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정신을 심상 세계로 가라앉혔다.
수많은 검이 꽂혀 있는 밤하늘이 담긴 호수. 그곳을 거닐던 백한영의 시점이 변했다. 위에서 아래로. 조감하듯 심상을 내려다보던 시점이 점점 위로 상승했다.
끝을 모르고 위로 올라가던 시야가 이윽고 대기권을 넘어 성층권을 돌파했다.
우주에 도달한 시야에 방금 전까지 백한영의 내면세계를 담고 있던 행성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와 거기에 꽂힌 수많은 검을 안에 품은 행성을 확인한 백한영이 손을 뻗었다.
마치, 한 자루의 검을 닮아 있는 행성에.
신검합일이라는 경지가 있다.
사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이 되는, 일류 검사의 자격과도 같은 경지.
아무리 거대해도 검은 검.
그것이 검인 이상, 검사가 제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백한영은 행성 안에 있는 수천, 수만 개의 검 중 가장 오래된, 최초의 검을 뽑아 행성 전체에 덧씌웠다.
행성의 모습이 변했다.
기본에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을 한 검의 모습으로.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심상 세계에서 벗어난 백한영이 청심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삼재검법으로 치면 태산압정(泰山押頂)인 단순한 내려 베기였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절대 삼재검법 정도가 아니었다.
절대무적독존검법(絶對無敵獨尊劍法).
형태-절(絶).
――――.
순간 세상에 소리가 사라졌다.
스릉.
백한영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걸 기점으로 백한영이 취한 행동의 여파가 시작됐다.
서걱. 롱기누스의 창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걸 넘어 빠르게 분해돼 소멸했다.
방금 백한영이 벤 것은 롱기누스의 창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 그 자체.
본질이 베인 롱기누스의 창이 세상에 남아 있는 건 불가능했다.
서걱. 그다음으로 유르시가 처음 펼친 마법. 가상의 세계가 반으로 갈라졌다.
번쩍! 세상 전체가 마력광으로 뒤덮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의 황량한 대지. 진짜 화성의 땅에 우뚝 선 백한영은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쿨럭.”
유르시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가상의 세계와 롱기누스의 창이 방패 역할을 해 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유르시도 백한영의 검격에 맞자마자 형태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소멸됐을 것이다.
물론 소멸하지 않았을 뿐이지 몸이 정상인 건 아니었다.
유르시는 자신의 생명이 빠르게 꺼져 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검술이군.’
육체를 넘어 유르시의 본질까지 베어 버린 검은 무섭다 못해 소름 끼칠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가.’
덕분에 유르시를 옥죄고 있던 인과율의 마수가 사라진 게 느껴졌다.
본질이 훼손됐기에 인과율이 잠시 유르시를 놓친 것이다.
그래 봤자 잠깐이었지만, 이 잠깐의 시간이 유르시에겐 굉장히 소중했다.
죽어서도 인과율에게 영혼째로 잡아먹히는 일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윤회의 고리에 합류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아를 잃는 거지만, 아예 영혼이 소멸하는 것보다는 낫지.’
유르시가 피식 웃었다.
그토록 원하던 평화를, 결국 내세에서나 즐기는 꼴이 참 웃겼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유르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인과율이 다시 찾아오기 전에, 긴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아주 길고 긴, 여행을 말이다.
* * *
“…흠.”
백한영은 먼지가 돼 사라지는 유르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 저렇게 평온한 표정이야. 누가 보면 대업이라도 이룬 줄 알겠어.
스토커 주제에.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입맛을 다시던 백한영은 이내 몸을 돌려 공간을 열었다.
트러블도 전부 해결됐고, 시원하게 기분 전환도 했으니.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