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86화 (86/117)

87화 신화의 종결자 (2)

유르시는 마법사다.

그것도 인과율을 속여 신들을 자신의 세계에서 쫓아낼 정도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

필멸의 굴레 따위는 진작 벗어던진 지 오래였고, 승천의 길에도 꽤 많이 올라 숙련된 초월자라고 할 수 있는 게 유르시였지만.

그런 유르시에게도 백한영은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백한영이 강해서? 상급 신의 경지에 오른 괴물이라?

사실 그게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게 전부는 아니었다.

유르시는 인과율을 속이고 신들을 자신의 세계에서 쫓아냈다.

스스로 창안한 마법 체계로 인과율을 분석하고, 우회로를 발견하고, 그 우회로로 인과율에 침입해 세상을 지배하던 법칙을 바꿔 신들을 쫓아낸 것이다.

애초에 정면 대결은 유르시의 장점이 아니었다.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짜는 것이 유르시의 장점.

이렇게 정면에서 대놓고 붙는 건 백한영이 상급 신이 아니라 중급 신의 경지에만 올랐어도 유르시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결국 계획을 아무리 섬세하게 짜도 인과율을 속이는, 그런 미친 짓을 또 할 게 아니라면 이번엔 백한영을 직접 상대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대비를 유르시가 안 해 놨을 리가.

일이 틀어지면 백한영과 정면 대결을 해야 될 텐데, 당연히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진작 모든 준비를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콰아앙!

폭발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가벼운 인사차 백한영에게 마법을 쏟아부은 유르시는 공간을 넘어 화성의 상층부에 도착했다.

백한영과 거리를 벌린 유르시는 재빨리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우웅―!

행성 표면 전체에 덮여 있던 거대한 마법진에 마력이 깃들었다.

이건 유르시가 백한영의 존재를 인지한 그 순간부터 준비한 대마법(大魔法).

마법사에게 시간은 곧 자원. 하물며 유르시 정도의 마법사가 몇 달 동안 준비한 마법이다. 절대 쉽게 넘길 마법이 아니었다.

번쩍!

어마어마한 마력광(魔力光)이 행성을 뒤덮었다. 백한영은 눈을 가렸다가, 서서히 손을 내렸다.

“뭐야, 이건.”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모도 그렇고 거기에 담긴 기운도 그렇고. 딱 봐도 큰 게 온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마법이었는데, 정작 벌어진 일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가상의 세계? 이면 세계?’

하나못해 그 유명한 메테오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냥 자신을 가상의 세계로 초대하고 끝이라니.

저 녀석 강한 것 맞아? 맹탕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유르시는 검사에 대해 편견이 없었다. 무슨 말이냐. 대부분의 검사가 마법에 무지하다는 생각이 편견이 아니라 담백한 사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방금 발동된 마법은 백한영이 인지한 대로 그를 유르시가 만든 세계에 초대하는 마법이었다.

화성 크기의 가상 세계. 듣기에는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사람은 이 마법을 보고 하나같이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전투에 도움이 되냐고.

그 물음에 유르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전투에 도움이 되니까 사용한 거지. 심심해서 사용했으려고.

마법사는 시간이 곧 자원인 생명체였다.

그들에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지면 무한한 일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마법사를 적으로 둔 자들에게 금과옥조처럼 전해지는 말이 몇 가지 있다.

하나. 마법사가 준비한 전장에선 싸우지 말라.

둘. 그 어떤 마법사도 자신의 공방에선 신에 가깝다.

사실 두 개 다 똑같은 말이었다.

마법사에게 공방은 실험실이자 안가(安家)였다.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 놓는 게 당연했고, 그런 공방에서 싸우는 건 준비된 마법사와 싸우는 것과 똑같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얘기를 돌려서, 그래서 행성 크기의 가상 세계를 준비한 게 대체 전투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이 가상 세계 자체가 특별하다고 말하겠다.

지금 머물고 있는 가상 세계는 따지고 보면 유르시의 공방을 행성 크기로 확장시킨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에 준비해 놓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걸 다 쓸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많았으니, 유르시는 준비해 놓은 걸 하나씩 풀기만 하면 됐다.

‘우선 첫 번째.’

유르시는 어리둥절해하는 백한영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구구구궁!

거대한 소음에 백한영이 하늘을 바라봤다.

탁했던 하늘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마찰열과 압축열로 인해 타오르는 불꽃.

상상을 초월하는 질량을 가진 암석 덩어리.

백한영이 그토록 찾던 대마법, 메테오(Meteor)였다.

“흠.”

백한영은 메테오를 유심히 관찰했다.

백한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메테오의 위용에 겁을 먹어서 복잡한 건 아니고.

‘저렇게 큰 운석이 지표면에 떨어지면 세상이 멀쩡할 수 있나? 그냥 세계 멸망 아니야? 여기야 가상 세계라 괜찮다 치지만, 저런 마법을 현실에서도 쓸 수 있어?’

자신이 알던 메테오를 펑펑 쓰던 대마법사 주인공들에게 의아함이 생겨서 그랬다.

그렇다.

거대한 운석을 앞에 두고도 백한영은 여유로웠다.

백한영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네.

모든 걸 베어 버리는 절대의 참격을 약식으로 쓰는 정도로는 유르시의 마법을 파훼할 수 없었다.

저 거대한 암석 덩어리는 단순한 운석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거대하고 드높은 마법의 산물.

당연히 그에 걸맞은 능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뭐가 좋을까.

메테오니까 불꽃. 불꽃이라.

이게 좋겠다.

백한영은 초식을 익히며 성장했고,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잊는 법을 배웠으며, 끝내 초식을 다시 기억해 냈다.

심상(心像)을 굳히는 틀로 초식만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스릉. 청심을 천천히 뽑아 든 백한영이 가볍게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태식이가 자기 길을 찾아가느라 버려졌으니, 나라도 얘를 써 줘야지.

적련검법(赤蓮檢法)이 얼마나 좋은 검법인데 이걸 버리냐. 쯧.

적련검법은 불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검법이었다.

불에겐 다양한 속성이 있다. 파괴, 재생, 신성.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 근원.

백한영은 저 중 어느 것이든 쓸 수 있었지만, 운석의 규모가 규모니까.

여기선 화려하게 대파괴로 가자.

화륵. 청심에 불꽃이 일었다.

검에 씌운 내공(內功)을 불꽃으로 바꾼 백한영은 그대로 허공에 검을 그었다.

가볍게, 휙.

너무 가벼워서 타인이 보면 몸을 풀었다고 착각할 정도였지만.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적련검법(赤蓮檢法), 진오의.

낙일월염(落日越炎).

하늘의 해조차 떨어트리는 파괴의 정수가, 운석을 덮쳤다.

――――!

초고온의 불꽃에 직격당해 깔끔하게 증발한 운석.

파괴가 아니라 증발이다. 낙일월염은 거대한 암석조차 증발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뒤덮은 바다조차 단번에 증발시킬 파괴의 불꽃을 조금 큰 암석 덩어리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탁. 허공을 땅처럼 밟은 백한영이 유르시의 앞에 선 후 말했다.

“끝이야?”

구구구궁!

그 말에 답하듯 재차 하늘이 열리며 다량의 메테오가 지상에 강림했다.

세상의 멸망이 날이 이럴까. 다른 곳에선 보지 못하는 진풍경을 느긋이 감상하던 백한영은 이내 검을 휘둘렀다.

낙일월염이 다수의 메테오를 덮쳤다.

직후.

유르시가 두 번째 마법을 사용했다.

유르시의 손가락이 지상을 가리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한 흙덩어리가 기어 나온 것이다.

흙 인간에게 빠르게 색이 입혀졌다.

황토색이었던 흙 인간이 순식간에 평범한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유르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유르시의 두 번째 마법. 그것은 골렘 마법이었다.

지표면을 가득 덮은 수만 개의 골렘은 전부 유르시의 열화 카피였다.

하나 열화 카피라고 무시하면 안 됐다. 원본이 원본인 만큼 골렘은 전부가 하급 신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방금 유르시가 쓴 마법은 사실상 하급 신 수만 명을 소환하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됐다.

‘숫자 앞에 장사 없지.’

다수의 메테오를 소멸시킨 백한영은 지상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건 뭐냐. 강시 비슷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성능이 좋아. 태식이는 저 중 하나도 감당 못 하겠다.”

“골렘이다.”

“내가 아는 골렘은 네모나고 둔한 녀석인데.”

픽션 속의 골렘을 떠올리며 백한영이 중얼거렸지만, 유르시는 반응조차 하지 않고 골렘을 조종했다.

수만 개의 골렘이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기기기긱!

단지 그것만으로 주변의 법칙이 뒤틀렸다.

당연했다. 따지고 보면 수만 명의 하급 신이 동시에 힘을 쓴 거나 다름없었다.

그 여파만으로 현실이 뒤틀리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이야.”

눈이 부시다 못해 아파져 오는 마력광을 뒷짐 지고 구경하던 백한영은 유르시를 흘긋 보고는 말했다.

“고생 좀 했겠다.”

“조금? 그 정도로는 이런 마법을 준비할 수 없지.”

“그래. 많이 했겠다.”

피식 웃은 백한영은 유르시를 향해 심검(心劍)을 사용했지만.

그그그극!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다.

백한영에 대해 조사한 유르시가 심검 대비를 안 해 놨을 리가. 허무하게 죽지 않기 위해 유르시는 백한영이 주로 사용하는, 즉 잔챙이를 상대로 자주 쓰던 기술에 대한 대비를 이미 해 놓은 상태였다.

“이 정도는 막는다 이거지?”

“네 여유도 거기까지다, 백한영!”

크게 소리친 유르시는 자신의 오른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푹.

송곳처럼 모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유르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장 주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쇠사슬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심장 주위에 있는 쇠사슬을 건드린 유르시는, 그대로 쇠사슬을 밖으로 뽑아냈다.

촤르르르륵!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이 섞인 것 같은, 기묘한 색깔의 쇠사슬이 유르시의 심장에서 뽑혀 나왔다.

쇠사슬이 백한영을 노리고 쏘아졌다. 촤르륵! 마치 행성의 고리처럼 백한영을 둘러싼 쇠사슬이 그의 몸을 구속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과율의 사슬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아까 유르시는 스스로 창안한 마법 체계로 인과율을 분석하고, 우회로를 발견하고, 그 우회로로 인과율에 침입해 세상을 지배하던 법칙을 바꿔 신들을 쫓아낸 마법사라고 했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유르시는 인과율에 침입해 세상을 지배하던 법칙을 바꿨다. 이건 사실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을 정하는 건 인과율의 소관.

즉 세상을 지배하던 법칙을 바꾸기 위해선 인과율의 힘을 사용해야만 했는데,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인과율은 도구 같은 게 아니니까.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다.

우회로가 왜 우회로이겠는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니 우회로인 것이다.

유르시는 우회로를 통해 원래는 있지도 않던 인과율의 사도 자리를 만들어 그곳에 앉았다.

자신의 사도에게 힘을 내려 주는 건 신으로서 당연한 일.

때문에 인과율은 유르시에게 힘을 내려 줬고, 인과율의 왼편에 앉은 유르시는 신들을 자신의 세계에서 쫓아냈다.

그 결과 인과율에게 납치당해 자아를 잃고 하나가 될 위기에 처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개같이 뛰고 있었지만.

요점은 유르시는 아직도 인과율의 사도라는 것이었다.

지금 백한영을 구속한 사슬은 유르시의 힘이 아니다.

유르시가 사용했지만, 힘의 근원 자체는 인과율.

아무리 백한영이라고 해도 저기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백한영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르시에게 이런 비장의 한 수가 숨겨져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죽어라, 백한영!”

지표면에서 시작된 마법의 폭격이 백한영을 덮쳤다.

나라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위력의 마법이 수만 개가 모이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행성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아. 하아. 하아.

유르시가 뻥 뚫린 가슴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겼다.

아무리 백한영이라고 해도 인과율의 사슬에 구속당한 상태에서 하급 신이 펼친 수만 개의 마법을 버틸 순 없었다.

지친 유르시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강대한 적이었던 탓일까. 그걸 이겨 낸 쾌감이 장난 아니었―.

“어우. 위험했네.”

유르시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귓가에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비겁하게 이런 걸 쓰냐. 깜짝 놀랐네.”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백한영을 본 유르시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백한영을 구속하고 있던 인과율의 사슬은 대체 어디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사용한 인과율의 사슬은 상급 신조차 버거워하는 절대적인 힘.

따라서 백한영은 절대 인과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그렇군.’

짧은 번뜩임에 유르시가 표정을 굳혔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너, 반쯤 걸쳤구나.”

유르시의 말에 백한영은.

“알아서 뭐 하게.”

청심을 뽑아 들었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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