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신화의 종결자 (1)
“교관님!”
백한영을 발견하자마자 소리치는 최동협.
그는 현재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흡혈귀 소굴에 들어오자마자 유하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습격했으니 당연했다.
뭐야. 속았다고? 대체 왜?
여태 보여 준 모든 게 연기라면 유하나가 쫓겼던 것도 연기라는 건데, 나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다고?
아. 일 났다.
…라는 식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최동협에게 백한영은 어둠 속에 내려온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미치도록 반가웠다는 뜻이다.
백한영의 등장에 흡혈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김태식인가?”
“응?”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태식이가 왜 나와.
“아닌가? 넌 누구지?”
“잠깐 기다려 봐. 생각 좀 정리하고.”
“놈, 나를 무시―.”
쾅! 백한영이 손을 휘젓자 흡혈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무게에 짓눌린 것이었지만, 겉으로 보면 그게 그거였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동협아, 이리 와 봐.”
“네.”
최동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한영에게 달려갔지만, 흡혈귀 중 그 누구도 그런 최동협을 제지하지 못했다.
눈앞의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진조 님 이상이다.’
진조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압박감에 흡혈귀들이 침음성을 냈다.
이런 괴물이 찾아오다니. 사전에 듣지 못했다.
‘최동협을 사로잡으면 김태식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저건 대체 뭐야.’
흡혈귀들은 최동협은 물론이고 김태식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흡혈귀 소굴을 찾아온 김태식을 흡혈귀가 실수로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계획이 꼬이니 사전에 알려 준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는 백한영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김태식이야 죽이면 안 되니 알려 줬지만, 백한영의 존재까지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괜히 흡혈귀들이 백한영을 아는 척해서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었고.
김태식을 미리 알고 있는 것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거기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계획이 성공해 최동협과 김태식이 흡혈귀가 되면 그런 사소한 부분을 백한영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까.
분노한 백한영에겐 흡혈귀를 박살 내는 게 중요하지, 흡혈귀가 사전에 김태식과 최동협을 인지하고 있었냐 없었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않았지만.
백한영이 김태식보다 먼저 찾아온 탓에 모든 게 꼬여 버렸다.
이제 백한영은 흡혈귀가 최동협은 물론이고 김태식까지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 버렸다.
이건 중요했다. 흡혈귀가 ‘굳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작업을 친 거니까.
“불청객이 찾아왔군.”
구구구궁!
거대한 혈마력(血魔力)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흡혈귀와 백한영이 모여 있는 광장에 누군가 진입했다.
흡혈귀의 주인, 진조(眞祖)의 등장이었다.
“손님 대접을 하기엔 우리가 바빠서 말이야. 얌전히 최동협을 넘기고 사라져라.”
유르시는 되도록 계획이 성공하길 바랐지만 일단 어그러졌을 때도 대비했다.
만약 백한영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계획이 어그러질 경우, 진조가 나서 흡혈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최동협과 김태식이라고 선을 긋게 시킨 것이다.
“와. 이 녀석들 봐라.”
“거부하는 건가. 이래서 필멸자들이란. 왜 꼭 험한 꼴을 봐야 말을 듣는 건지.”
“어이가 없네.”
“금방 끝내 주마, 필멸자.”
진조의 몸 주위에 피가 뭉쳤다. 뭉쳐진 피에서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극도로 정제된 혈마력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피의 은혜로움을 온몸으로 느껴라.”
피로 된 용이 광장에 강림했다.
혈룡(血龍)이 아가리를 벌리고 백한영에 쏘아졌다. 직후.
“느끼긴 뭘 느껴.”
한 걸음 앞으로 나선 백한영이 허리춤에 있던 청심(淸心)을 뽑아 휘둘렀다.
혈룡이 반으로 갈라져 사라졌다. 그다음엔 흡혈귀였다. 기백 명의 흡혈귀가 동시에 반으로 갈라져 땅에 쓰러졌다.
마지막은 진조였다.
“쿨럭.”
바닥에 쓰러진 진조가 거칠게 피를 토해 냈다.
피로 모든 걸 하는 흡혈귀가 피를 토한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피에 대한 제어력을 상실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게… 무슨.”
진조의 공허한 물음에도 백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꼈다.
진조는 말했다. 자신들이 노린 건 김태식과 최동협이지, 네가 아니라고.
네가 말려든 건 우연이라고.
우연?
그래. 우연일 수도 있었다. 있었는데.
백한영은 이게 우연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여태까지 백한영은 수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왔다.
수많은 적을 만났고 수많은 음모를 분쇄했다.
그런 만큼 백한영은 ‘악의’에 민감했다.
비록 절대자가 된 후에 음모와 거리가 멀어지며 감각이 많이 녹슬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리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너는…….”
“아. 조용히 해 봐.”
콰직.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질량을 휘둘러 진조를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 백한영은 나직이 말했다.
“나와, 인마.”
“네?”
뜬금없는 말에 멍하니 있던 최동협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백한영이 흡혈귀를 전부 쓸어버리는 걸 본 최동협은 살짝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자신의 교관이 강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백한영의 힘을 제대로 목격한 건 김태식밖에 없었으니 당연했다.
“너 말고.”
“여기는 저희밖에 없는데요?”
최동협은 순간 백한영의 머리를 걱정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흡혈귀와 진조를 본인이 직접 쓸어버렸으면서 다른 사람을 찾다니. 제정신으로 안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없겠지.”
백한영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거기구나.”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은 백한영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백한영의 몸이 사라졌다.
“뭐야.”
당황한 최동협이 목이 빠지도록 주위를 훑어봤지만, 백한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면 저는 어떻게 해요?”
혼자 남겨진 최동협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긴.
집으로 돌아가야지.
얼른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라.
* * *
공간을 넘어 백한영이 도착한 곳은 황량하고 붉은 대지였다.
“여긴 어디야.”
“백한영.”
“넌 또 누구고.”
백한영은 삐딱하게 서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표정을 굳힌 유르시가 작게 혀를 찼다.
‘계획이 아예 망가졌군.’
유르시가 원하던 만신창이가 된 백한영을 상대한다는 계획은 이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최상의 컨디션인 백한영을 상대해야 된다라. 승률이 어느 정도지?’
유르시는 빠르게 승률을 계산했다.
승률은… 1퍼센트 미만인가.
하. 유르시는 기가 찬다는 듯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1퍼센트 미만이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과 비슷했으니까.
‘하나.’
유르시는 이것보다 힘든 일을 기어코 성공한 남자였다.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 모든 신을 내쫓는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기어코 성공시킨 게 바로 유르시였다.
성공 확률이 1퍼센트 미만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인간계에서 수천 명의 신을 동시에 쫓아내는 것이 더 어려웠다.
성공 확률 1퍼센트 미만 정도는 충분히 해 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통성명이나 하자. 너는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나는 너를 모르니까 기분이 나쁘네.”
“유르시 텔리온.”
“그래, 유르시. 딱 봐도 중원 사람은 아니네. 왜 나를 노린 거냐? 중원 사람이 아니면 나랑 은원이 있을 리 없는데.”
“그게 중요하냐?”
“중요하진 않지.”
중요한 건 유르시가 백한영을 적대했고, 백한영이 그걸 용서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찜찜하잖아. 이유를 알아야 나중에 대비도 할 수 있고.”
“몇 달 전 이 차원을 찾아온 용인 황제도 너랑 은원이 없었지.”
“또 특이점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그게 뭐길래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적어도 내겐 굉장히 중요한 거지.”
백한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특이점과 엮인 일을 대신 해결하라고 길드원들을 죽어라 훈련시켰는데, 이건 뭐 어림도 없는 상대가 나타났다.
쟤는 S급으로는 안 되겠는데.
태식아, 요즘 풀어 줬는데 안 되겠다.
너, 인류(백한영을 제외) 최강 정도는 찍어야겠다, 저런 애들도 알아서 상대하려면.
백한영이 말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주겠지?”
“김태식과 최동협을 흡혈귀로 만들려 했다.”
유르시는 백한영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 줬다.
이걸로 백한영의 멘탈을 약간이나마 흔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왜?”
“흡혈귀는 진조의 명을 반드시 따라야 하지. 그리고 대부분이 인간 시절의 가치관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무슨 말인지 알 텐데?”
“내 손으로 최동협과 김태식을 죽이게 하려고?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는 건데.”
“너를 흔들 수 있지.”
“흠.”
유르시의 말에 백한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뭐지?’
유르시가 속으로 의아함을 품었다. 아무리 실패한 계획이라도 만약 저대로 일이 흘러갔으면 백한영 입장에선 타격을 받았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태연한 거지?
마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설마.’
유르시가 말했다.
“너, 자기 길드원에게 무슨 짓을 해 놨구나.”
“친한 애들이 나쁜 일을 당하면 찜찜하잖아.”
“대체 언제?”
“말하는 걸 보면 나를 꽤 오래 지켜봤나 봐? 스토커야?”
유르시는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계획의 전제 조건인 백한영이 주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가 망가져 있을 줄은 몰랐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흔적조차 안 남아 있는 걸 보면 굉장히 고등한 방법이다. 그런 걸 계속 유지하면 아무리 백한영이라 해도 정신력이 꽤 소모될 터. 저번에 생겼던 심경의 변화가 그런 소모까지 기꺼이 감내할 정도였다고?’
예상 밖의 일이 계속 벌어졌다.
유르시는 김태식과 백한영이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몰랐고, 그로 인해 백한영의 심정에 생긴 변화가 이토록 큰 건지도 몰랐다.
최동협과 신유나가 사소한 변화조차 감지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라는 것도.
‘…녹슬었군.’
전성기의 유르시는 이렇지 않았다.
이렇게 안일해선 신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을 세상에서 쫓아내는 건 더더욱.
이건 유르시가 모든 숙원을 이뤄 버린 탓이었다.
매번 칼날 위를 걷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찾아온 평화를 보고 마음을 풀어 버린 탓이었다.
‘평화에 젖은 건가.’
유르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평화에 젖다니. 기껏 만든 평화는 즐기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봉인하고, 봉인에서 깨어난 후로는 개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정말 억울했지만, 결과가 이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야. 어디길래 숨도 쉬기 불편하고 아무튼 이것저것 이상하냐?”
“지구 근처의 행성이다. 너희는 이곳을 화성이라 부르더군.”
“하다 하다 화성에서 난리를 피우는구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네 감각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지금 와선 아무 의미가 없어졌군.”
그 말을 끝으로 유르시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던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할 말 더 없어?”
“적과의 대화는 사치다. 예전부터 늘 그랬지.”
“처음으로 마음이 맞네. 그건 나도 동감이야.”
백한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콰아앙!
거대한 폭발이 백한영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