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미끼 (3)
흡혈귀를 발견하자마자 유르시는 그들의 주인인 진조(眞祖)를 장악했다.
진조(眞祖).
흡혈귀들의 왕, 고귀한 피, 모든 것의 시작 등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녀석.
당연하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진조에겐 일반적으로 알려진 흡혈귀의 약점이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진조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한 나라가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것이 진조라는 놈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유르시의 적수는 아니었다.
끽해야 최하급 신 정도인 놈이 무슨. 반신 주제에 유르시를 상대하는 건 진짜 담백하게 표현해도 500년은 일렀다.
“진조.”
“부르셨습니까.”
“흩어진 흡혈귀들을 전부 모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눈치챘겠지만 유하나가 한 말은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진조가 사실 착한 놈이고 흡혈귀들과 인간의 조화를 원했다?
살인을 하는 건 일부 흡혈귀의 짓이지 대부분은 혈액 팩만 먹으며 살아간다?
흡혈귀가 되면 인간 시절의 가치관은 전부 쓰레기가 돼 버린다.
종족이 바뀐다는 건 그런 거다.
대부분의 흡혈귀는 강해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하며 돌아다닌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해지기 위해서.
흡혈귀의 영역이 전 세계에 펼쳐져 있고, 생명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에 이 정도로 끝난 거지. 아니었다면 사회에 더 큰 혼란을 불러왔을 것이다.
아마 한국에만 세력이 집중돼 있었다면 진작 체포가 되지 않았을까.
정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 또한 거짓말이었다.
흡혈귀가 여태 잡히지 않은 건 안개화라는 특수한 능력 덕이 컸다. 그마저도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자마자 빠른 속도로 꼬리가 잡히고 있었다.
아마 얼마 안 가 흡혈귀들의 정체가 드러났을 것이다.
정체가 드러나는 것과 토벌을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진조의 강함은 이 세계 식으로 표현하면 SSS급.
최하급 신이라도 신은 신. 절대 가볍게 생각해도 될 녀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뻐해라. 너네의 골칫거리 진조는 이 유르시가 해결했으니.
그 대가로 네놈들의 수호자와 인과율의 씨앗을 거둬 가겠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담담히 받아들이거라.
유르시는 늦은 점심을 먹고 밤이 오길 기다리는 최동협에게 시선을 옮겼다.
최동협과 김태식은 서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우연히’ 김태식의 스마트폰이 고장 났기 때문이었다.
예상된 결과였다. 애초에 유르시가 한 짓이니 당연했다.
최동협의 사정이 지금 김태식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김태식은 즉시 백한영에게 연락을 취할 것이었다.
충분히 시간이 있는데 백한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백한영의 행동 패턴을 생각하면 지금 메시지를 남겨 놓으면 밤이 되기 전에 통화가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으니 그건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다면? 당장 최동협이 위급하다면?
그 상황에서 던전 게이트에 있는 백한영과 연락할 뾰족한 수가 없다면?
거기서 김태식이 할 행동은 뻔했다.
백한영에게 문자를 남기고 최동협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백한영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김태식은 나름 강하다. 내 세계에서도 저 정도의 강자는 드물었지.’
하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을, 필멸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얘기.
김태식은 유르시는 둘째 치고 진조와 비교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김태식은 흡혈귀 소굴에 들어오자마자 격의 차이를 느끼고 무릎을 꿇게 될 것이었다.
일이 거기까지 진행되면 계획 2단계 완료였다.
계획 2단계의 핵심은 백한영 몰래 최동협과 김태식을 확보하는 것.
백한영을 끌어들이는 게 목적이면서 왜 몰래 확보하냐고?
그거야 백한영을 당장 끌어들일 계획은 아니니까.
백한영은 강대한 적이다. 그런 적과 정면에서 붙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다.
유르시가 백한영과 마주 서는 건 할 만한 정도로 승률이 올라왔을 때지 지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승률은 어떻게 올리느냐.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 자신이 강해지는 것.
둘.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
유르시가 여기서 더 강해지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으니 여기선 후자의 방법을 택하는 게 맞았다.
백한영을 약하게 만든다니, 대체 어떻게?
그 방법은 유르시가 흡혈귀를 발견한 순간 정해졌다.
‘김태식과 최동협을 흡혈귀로 만든다.’
김태식과 최동협을 흡혈귀로 만들어 백한영과 싸우게 만든다면 그의 정신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상급 신의 경지에 오른 백한영의 심상 세계와 정신에 큰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흠집이 간다는 게 중요했다.
그런 사소한 걸 쌓다가 펑 터트리면 아무리 백한영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건 백한영이 아직 필멸자의 삶을 원했기에 통하는 방법이었다.
필멸자의 삶을 원하는, 그들과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백한영의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
비열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백한영 정도의 강자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됐으니까.
‘아마 이걸로 흡혈귀는 정리되겠지.’
백한영이 김태식이 남긴 메시지를 보고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 재앙이 펼쳐질 것이었다.
모든 흡혈귀가 단번에 정리되겠지. 진조 또한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유르시는 흡혈귀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최대한 옅게 하는 데 집중했다.
백한영이 현장을 발견하더라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이건 어디까지나 흡혈귀 사건에 길드원이 말려든 거다. 그 뒤에 수상쩍은 마법사 같은 건 없다. 백한영이 그런 식으로 인지하도록 유르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전생에 다른 신들을 대상으로 수도 없이 해 온 일이었다. 자신은 있었다.
물론 불안 요소가 없진 않았다.
만약 백한영과 김태식이 예상보다 더 친했다면, 그러니까 그의 죽음을 백한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면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김태식의 죽음과 관련된 사소한 것이라도 알아내기 위해 백한영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까.
또 백한영이 사건의 흐름에 약간의 의구심이라도 품어도 모든 계획이 물거품된다.
거슬리는 흐름을 발견하는 즉시 이유를 알기 위해 힘을 쓸 테고, 그러면 순식간에 유르시가 배후에 있다는 걸 밝혀 낼 것이었다.
유르시가 펼친 위장은 어디까지나 백한영의 인지의 사각을 노리는 것.
쉽게 말해 이런 거다.
일련의 사건이 자연스럽다고, 뒤에 숨겨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힘을 써서 모든 걸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였으니까.
중요한 건 백한영 스스로 사건의 전말을 전부 알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알 건 다 알았고 여기서 더는 밝혀낼 게 없다고 생각하게.
결국 힘을 쓰는 건 백한영 본인이었으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르시의 위장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르시는 아직도 스마트폰이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소냐와 놀고 있는 김태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연히’ 스마트폰이 고쳐져서 김태식이 최동협의 메시지를 받을 타이밍을 잘 정해야 됐다.
사실 김태식을 바로 이용하는 건 리스크가 컸다.
김태식이 위기에 빠지자 백한영이 움직인 건 이미 확인된 사항이었다.
최동협은 몰라도 김태식은 백한영에게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런 김태식을 벌써 이용한다?
계획이 어그러질 가능성이 컸다. 그건 유르시도 알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째깍째깍.
유르시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인과율을 농락하고 이용한 대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유르시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계획을 느긋하고 완벽하게 짜다간 인과율이 유르시를 집어삼킬 것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다.
최동협과 김태식을 흡혈귀로 만들어 백한영과 대적하게 한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결국 백한영의 정신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면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백한영, 기다려라.’
해가 지자마자 유하나와 함께 집을 나서는 최동협을 확인한 유르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 * *
유르시의 계획은 완성도가 높았다.
완벽하진 않았다. 군데군데 구멍은 존재했다.
하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예산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완벽에 가까운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있었지만.
늘 그렇듯 계획이라는 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유르시는 백한영의 인간관계를 빠짐없이 조사했다.
백한영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르시는 백한영을 자극하는 트리거가 뭔지, 그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전부 알아냈다.
하지만 유르시가 백한영과 관련된 모든 걸 정말로 알아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유르시의 섬세함이 부족하기도 했다.
“교관님.”
“어. 왜.”
해변가에 마련된 파라솔 밑. 거기서 60m 크기의 거인이 모든 걸 박살 내는 만화를 보고 있던 백한영이 신유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배예린과 실컷 대련을 한 걸까. 얼굴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신유나가 백한영에게 말했다.
“혹시 태식이 오빠한테 연락 안 왔어요?”
“어… 안 왔는데. 아까 나가 봤을 땐 딱히 연락이 오진 않았어. 왜?”
“뭔가 이상해서요.”
“뭐가.”
그 말에 신유나는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백한영에게 보여 줬다.
[최동협: 문자 보면 연락 바람.]
“이게 왜.”
“얘가 이런 소리를 하는 놈이 아니거든요.”
그랬다. 최동협은 용건이 있으면 용건이 뭔지 문자로 남기지,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 꼭 그러는 건 아니었다. 이런 적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최동협의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였지.’
즉 최동협은 무언가 큰일이 생겼을 때나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따라서 현재 최동협에겐 무언가 일이 터졌을 것이다. 신유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너무 간 것 아니야? 그냥 오늘따라 통화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말투도 이상하잖아요.”
“메시지에 말투가 어딨어.”
“너무 딱딱해요. 사무적이잖아요. 장난기가 안 느껴진다고요.”
“난 모르겠다. 그리고 정 걱정되면 연락하면 되잖아.”
“전화를 안 받아요. 태식이 오빠도요.”
전화를 안 받는다고?
그건 좀 이상한데.
백한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신유나의 말대로 살짝 이상하긴 했다.
“알았어. 확인해 볼게.”
던전 게이트 밖으로 나간 백한영은 스마트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 아무것도 와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 통화를 걸어 봤지만, 기계음만이 백한영을 반길 뿐이었다.
“어때요?”
“진짜 이상하네.”
팔짱을 낀 백한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신유나에게 말했다.
“일단 넌 애들이랑 같이 있어.”
“교관님은요?”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야지.”
유르시가 간과한 그 첫 번째.
그것은 바로 최동협과 신유나의 관계였다.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함께한 신유나와 최동협의 유대는 유르시의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탁. 땅을 밟은 백한영의 몸이 주욱 미끄러졌다.
백한영이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활짝 열렸다.
활짝 열린 공간 안에 뛰어든 백한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냐, 너네?”
무릎을 꿇은 최동협.
그리고 그 앞에 다수의 흡혈귀가 서 있는 걸 확인한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설명해 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