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보이 밋 걸은 클래식입니다 (1)
아무도 없는 새벽의 거리.
그곳 한가운데 있는 가로등 아래에 쓰러져 있는 여자.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최동협은 여자에게 조심히 다가가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만약 여자가 의식불명이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준비를 끝낸 최동협이 말했다.
“저기요?”
“…….”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의식불명은 아니구나. 이러면 일이 편해졌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아뇨. 저는 괜찮으니 다른 곳으로 가 주세요.”
“…괜찮은 것 맞아요?”
여자가 벤치에 쓰러져 있었으면 최동협도 신경을 껐을 거다. 한밤중에 여자 혼자 벤치에 쓰러져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위험했지만, 피곤하니 저러고 있을 거라며 넘겼을 것이다. 그런 상황도 신경 쓸 정도로 최동협은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거리에 엎어져 있었다. 술에 취했든, 떨어졌든, 아니면 다리를 다쳤든, 정상적인 상황으로는 안 보였는데, 괜찮다고 하니 의심이 드는 것이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 드릴까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자의 말이 거칠어졌다. 최동협은 볼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말했지만 최동협은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게 오지랖 때문에 러시아까지 날아간 김태식이었으면 여자가 뭐라 하든 신고부터 했겠지만, 최동협은 그 정도로 타인에게 간섭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모를까. 그냥 얼굴만 본 사이라면 일정 이상 상관하기 꺼려졌다.
‘자기가 괜찮다잖아. 괜찮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최동협이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간단히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겸사겸사 신유나한테 같이 던전 게이트나 공략하고 다닐 생각 있냐고 문자도 보내고.
훈련 중에는 하루에 한두 번 정도만 게이트 밖으로 나왔기에 미리 문자를 보내 놔야 제시간에 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최동협이 여자가 쓰러져 있는 가로등 반대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기껏 도망쳐 놓고 여기서 잡히네? 기분이 어때, 유하나?”
웬 남자의 목소리가 최동협의 고막을 스치고 지나갔다.
최동협은 집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랬지만 지금 나타난 남자는 말투부터 불온했다. 양아치 같다고 하면 이해가 편할 거다.
유하나라 불린 여자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김창수.”
“우리를 배신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정말로?”
“날 내버려 둬, 제발.”
“그럴 수는 없지.”
뚜벅. 김창수는 유하나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손봐 주긴 조금 그러니 본거지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잠깐만요.”
그리고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최동협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오지랖이 좁은 것도 어느 정도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놔두고 가는 것과 위협받는 사람을 가만히 놔두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최동협이 말했다.
“지금 뭘 하는 거죠?”
“이건 또 뭐야. 이야, 유하나. 그새 남자까지 생겼어?”
“저 사람이랑 그런 사이 아닙니다.”
이 악성 우결충은 대체 뭐지. 어떻게 봐서 나랑 저 여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최동협은 고개를 돌려 유하나에게 물었다.
“그, 유하나 씨? 저 인간이랑 아는 사이인가요?”
“…아는 사이는 맞아요.”
“질문을 정정하죠. 친한 사이고, 저 사람을 따라가고 싶으신가요?”
“아니요.”
단호한 유하나의 말에 최동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그래 보였다.
고개를 바로 한 최동협이 김창수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건 많이 그렇네요.”
“아. 고작 인간 주제에 쫑알쫑알 시끄럽네. 됐어. 어차피 네놈들의 의견은 처음부터 필요 없었거든.”
촤악. 피가 뿌려졌다. 김창수의 손목을 타고 흘러나온 피가 이내 단단하게 굳었다.
손톱을 타고 길게 자라난 피를 본 최동협이 표정을 굳혔다.
“각성 능력으로 타인을 위협하는 건 심각한 범죄입니다. 그만두세요.”
“머리가 꽃밭이야, 뭐야. 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와?”
상황 파악을 못하는 최동협을 보며 김창식이 크게 웃었다. 저런 멍청이들을 찢어 버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드물었다.
“넌 특별히 가지고 놀다가 죽여 주마.”
“하아.”
펑!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김창식의 몸이 길게 늘어졌다.
엄청난 신체 능력으로 최동협과의 거리를 좁힌 김창식이 커다란 손톱을 강하게 휘둘렀다.
“위험해요!”
유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최동협의 몸이 움직였다.
기다란 피의 손톱이 화려하게 움직이며 사방을 점거했다. 하나 상관없었다.
녀석의 공격 연계는 신유나의 빛의 검보다 못했고 숫자는 교관님의 나무 공보다 못했다.
지루하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 퀄리티의 공격이었다.
최동협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뒤로 물러나기보다는 앞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얼핏 봐선 성난 황소에 달려드는 미친 짓처럼 보였지만, 그러자 놀랍게도 공간이 활짝 열렸다.
후웅―! 살벌한 피의 손톱을 최동협이 고개를 까딱여 피했다.
흐름이 느껴졌다. 사(死)로와 생(生)로가 손에 잡힐 듯 훤했다.
계산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극야권(極野拳)은 본능을 극도로 증폭시키는 무공.
거기엔 예리한 감각 또한 포함돼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육감을 성장시키는 극야권인 만큼 이런 허접한 공격쯤이야.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이 새끼가!”
헛손질만 반복한 탓인지 김창수가 버럭 화를 냈다. 촤악! 오른손에만 있었던 피의 손톱이 왼손에도 자라났다.
“죽여 주마!”
김창수가 양손을 활짝 펼친 후 최동협을 향해 피의 손톱을 휘둘렀다.
10개의 피의 손톱이 교차하며 최동협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스쳤다. 닿지는 못했다.
“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김창수가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최동협이 움직였다.
마나가 꿈틀거리며 이동했다. 예리해진 감각이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었다.
당황한 김창수가 정확히 1초 후 뒤로 물러나는 게 예상됐다.
최동협은 조금 더 깊게 발걸음을 옮기며 오른손을 허리에 장전했다.
극야권(極野拳), 1식.
호왕폭성(虎王暴聲).
호왕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김창수를 덮쳤다.
펑!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김창수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그그극. 보도블록을 뒤집으며 땅을 구르던 김창수가 멈춰 섰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아무리 제압하기 위해 힘을 뺐다고 해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다니. 몸이 보통 튼튼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최동협은 미간을 좁히며 자세를 잡았다. 힘 조절은 특기 분야가 아닌데. 신유나라면 모를까.
어쩔 수 없지. 상대가 먼저 죽이려 들었으니 제압 과정에서 팔다리 한두 군데쯤 부러져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각오를 다진 최동협이 마나를 끌어 올리자 김창수도 분노를 감추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순간.
“그만해.”
유하나가 비틀거리며 최동협의 앞에 섰다. 유하나의 몸에 흉흉한 기운이 맴돌았다.
최동협은 살짝 놀랐다. 아무 힘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각성자라니. 예상 밖이었다.
‘괜히 나섰나?’
유하나의 몸에 맴도는 기운은 명백히 김창수를 웃돌고 있었다. 굳이 최동협이 나서지 않았어도 김창수 정도는 손쉽게 요리했을 걸로 보였다.
“쯧.”
2:1은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김창수가 걸음을 멈추고 작게 혀를 찼다.
김창수가 말했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명심해라, 유하나.”
“…….”
김창수의 몸을 붉은 연기가 감싸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뭐야, 저건. 특수 능력 같은 건가?
갑자기 사라진 김창수에게 당황한 것도 잠시. 털썩. 느닷없이 유하나가 쓰러져 최동협은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으으.”
“잠깐만요. 당장 구급차를 불러 드릴 테니까―.”
“병원은… 안 돼…….”
“유하나 씨? 유하나 씨?”
병원은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기절하는 유하나.
대체 병원은 왜 안 된다는 거야.
여기서 유하나의 말을 따르는 게 맞을까, 아니면 무시하는 게 맞을까.
그냥 무시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사람에게 굳이 병원에 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어라.
고민을 하다 말고 최동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게 보였다.
‘송곳니?’
살짝 벌어진 유하나의 입속에서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송곳니가 포착됐다.
피를 사용하는 적. 연기로 변하는 특수 능력. 송곳니.
거기에 요 며칠 떠들썩했던 연쇄살인 사건까지 합쳐지자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 헛웃음을 터트린 최동협이 유하나를 등에 업었다.
‘한밤중에 가로등 아래에서 흡혈귀를 줍다니. 이건 옆 나라 소설에서 본 장면인데.’
* * *
쌕―. 쌕―.
유하나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최동협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나: 신유나, 혹시.]
문자를 거기까지 작성한 최동협은 손가락을 멈췄다.
신유나를 불러서 어쩌자고.
습관적으로 소꿉친구인 신유나를 찾았지만, 지금 상황에 신유나가 온다고 해서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경찰에 맡기는 게 나았나.
일단 유하나를 집에 데려오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가 됐다.
딱 봐도 평범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닌 유하나를 데리고 있어 봤자 피곤할 일이 생길 뿐이었다.
공권력의 힘에 기대는 게 맞았는데. 병원은 안 된다고 하도 간절하게 말해서 그만.
병원이 안 되면 아마 경찰도 안 되겠지. 어떤 것이든 공공 기관을 이용하면 안 된다는 뜻일 거다.
그래서 유하나의 말을 따라 일단 집으로 데려왔건만, 소파 구석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맞나? 하는 문장만 계속 떠올랐다.
‘얘기라도 해 봐야 판단이 될 텐데. 언제 일어나는 거야.’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했다. 때문에 지쳐서 기절한 정도는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유하나는 각성자가 아니라 흡혈귀였지만… 김창수의 몸도 엄청 튼튼했으니까. 비슷하겠지, 뭐.
…….
집 안이 참 조용했다.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와 유하나의 숨소리 정도가 소음의 전부였다.
낯선 여자를 집에 들이니 보통 어색한 게 아니었다. 머리를 헝클어트린 최동협은 이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TV라도 틀면 덜 어색하겠지.
[최근에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이 흡혈귀와 연관이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흡혈귀의 실존 가능성에 대해…….]
움찔.
소파가 살짝 들썩여 최동협이 고개를 돌렸다.
“유하나 씨?”
“…….”
“유하나 씨? 혹시 깨어났는데 자는 척했던 건가요?”
“그건 아니고 방금 깼어요.”
스륵. 유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최동협과 눈을 마주친 유하나가 머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사정이나 설명해 주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최동협의 말에 유하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동협입니다.”
“최동협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충격적이고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흡혈귀라고요?”
“…네. 맞아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건 진작 알았어요.”
당신이 흡혈귀인 건 옆집 꼬마도 알겠다, 이 사람아.
“상황 설명이나 해 주세요.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도와주든 말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