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미끼 (2)
신유나와 배예린이 치고받는 걸 구경하던 최동협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예린 저 녀석,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또 대련을 하자고 할 텐데, 배예린을 몇 시간 동안 산책시키느라 지친 신유나가 그걸 받아 줄 리 없었다.
즉 애꿎은 최동협이 배예린을 산책시키기 위해 대련장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럴 순 없지.
최동협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금성화 씨가 걱정되네. 얼굴 한번 보고 와야겠다.”
“야! 다음은 네 차례야!”
“금성화 씨가 걱정되네.”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를 벗어난 최동협은 자신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와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금성화 얘기를 꺼낸 게 꼭 핑계를 대기 위해서만은 아니여서. 진짜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길드에 들어오자마자 단체로 자신만 빼놓고 훈련을 하러 떠난 거다. 소외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김태식과 이초아는 훈련을 받지 않고 길드에 출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태를 살펴볼 필요는 있었다.
원래라면 교관님이 해야 될 일이었지만, 교관님은 신입 길드원들을 가르치느라 바쁘니까. 시간이 남는 자신이 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최동협은 길드 빌딩에 들어갔고.
“어? 뭐야. 벌써 훈련 끝났어?”
길드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김태식과 만날 수 있었다.
“아뇨. 잠깐 들렀어요. 금성화 씨는요?”
“아는 사람 도와서 게이트 공략을 하고 오겠다던데? 할 게 없어서 심심한 모양이더라고.”
“일거리라도 있으면 괜찮을 텐데. 저희 길드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금성화 씨에 대한 건 고민 좀 해 봐야겠네요.”
“그냥 훈련에 데려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효율이 떨어지긴 하니까. 체력 훈련은 자체적으로 하고 있을 거고.”
금성화는 신성계 각성자다. 신성계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각성 능력의 의존도가 컸고 체계적인 수련 방법도 없었다.
무신련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적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간단한 무기술이라도 배울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금성화는 그런 부분에서 절망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희귀한 신성계 각성자인 만큼 계속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이래서는 금성화 쪽에서 먼저 길드를 나가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이 부분은 내가 한영이 형이랑 상의해 볼게.”
“알겠어요.”
“다른 신입 길드원은 어때. 잘 적응했어?”
“말도 마세요.”
최동협은 지난 3주일간 있었던 일을 김태식에게 설명했다.
백한영을 도와 훈련장을 만든 것부터 시작해서 배예린, 청진호의 훈련을 도운 일. 배예린이 날뛴 일. 배예린이 기행을 벌인 일. 배예린이 대련을 해 달라고 졸졸 따라다닌 일 등등.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부분 배예린 씨 얘기네?”
“그 사람이 워낙 특이해서. 청진호 씨는 조용히 수련만 하더라고요.”
“그래 보이긴 했어.”
딱히 관상을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김태식은 배예린을 보자마자 살짝 이상한 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배예린이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걸 보면 관상이 아예 무시해도 되는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적응을 잘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다행인 게 맞을까요.”
“일단 배예린 씨는 적응을 잘했잖아. 그럼 된 거지.”
“하하.”
지난 2주일 동안 배예린에게 끌려다녔던 걸 생각하면 몸이 으스스 떨렸지만, 그게 적응이 완벽한 증거라면 또 나쁘지 않았다.
무신련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최동협은 길드에 정이 많이 쌓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신입 길드원이 겉돌지 않고 녹아들어 주는 건 그의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었다.
“고생 좀 해야겠네요.”
“그래. 고생 좀 해라.”
김태식의 말에 형도 시달릴 준비나 하세요, 라고 대꾸한 최동협은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선반을 뒤적거린 최동협은 그대로 코코아 가루를 꺼내 따듯한 물에 탔다.
호록. 따듯한 코코아를 한입 마시며 걸어나온 최동협이 김태식에게 물었다.
“형은 요즘 어때요?”
“나?”
“바쁘다고 훈련에 참가 안 했잖아요. 뭐 때문에 그렇게 바쁜 건데요.”
“협력 요청이라든가 이것저것 많지. 아예 무시해도 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거절해도 연락 정도는 하고 있어.”
“협력 요청이요?”
김태식은 처리하고 있던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최동협이 말했다.
“읽어 봐도 돼요?”
“딱히 비밀은 아니니까. 그런 건 애초에 여기서 처리 안 해.”
“그럼 사양 않고.”
서류를 받아 든 최동협은 서류 상단에 적혀 있는 제목을 읽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성 범죄 수사 협력 요청’?”
“그건 특이한 경우긴 한데, 보통 그런 느낌으로 협력 요청이 온다고 보면 돼.”
김태식의 설명을 들며 최동협은 서류의 세부 내용을 확인했다.
“연쇄살인이네요.”
“요즘 그걸로 얘기가 많아.”
“범인은 각성자인가 봐요?”
“그걸로도 얘기가 많아. 흡혈귀가 나타났다나 뭐라나.”
“흡혈귀요?”
생뚱맞은 소리에 최동협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흡혈귀라니. 그런 게 진짜로 있어요?”
“시체 상태가 꼭 흡혈귀에 당한 것 같다고 하더라.”
“대체 어떻길래.”
“시체에 피가 없고 이빨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고, 이것저것 많아.”
“이야.”
진짜 흡혈귀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시체의 상태에 최동협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흡혈귀로 변하는 각성 능력일까요?”
“아마도. 그냥 위장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진짜 흡혈귀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왜?”
“그거야.”
탁. 코코아가 든 컵을 책상에 내려놓은 최동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흡혈귀라니. 뭔가 무섭잖아요.”
* * *
최동협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다섯의 가정 중 둘은 찢어지는 세상이다.
즉 이혼 가정은 의외로 보편적인 가정의 형태 중 하나였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성인 된 뒤로 쭉 혼자 살았기에 인사를 해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자꾸만 인사가 버릇처럼 튀어나왔다.
이래서 어렸을 때 습관이 중요한가 보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진 최동협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중얼거렸다.
“하루 쉬고 다시 강원도로 올라가야 되네.”
아.
가기 싫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최동협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 단체 훈련은 신입 길드원을 성장시키기 위해 시작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최동협이 놀거나 하진 않았다.
아직 한창 성장할 때인 최동협도 훈련장에서 개인 훈련을 진행했다. 늘 하던 백한영이 띄운 나무 공을 피하는 훈련이다.
처음엔 그저 나무 공을 피하기만 하면 됐지만 최동협이 성장함에 따라 훈련의 내용도 달라졌는데, 지금에 와서는 눈을 가리고 나무 막대 위를 넘나들며 나무 공을 피해야만 했다.
굉장히 어렵고 힘든 훈련이었다. 그래서 할 때마다 진이 쫙 빠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최동협이 강원도로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었다.
훈련이 힘들고 어려운 건 당연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었다.
단. 성장이라는 과실이 따라와 준다면 말이다.
“막막해.”
백한영에게 극야권(極野拳)을 배운 직후는 좋았다. 매일같이 실력이 늘었으니까.
훈련도 즐거웠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게 성장으로 이어지는 게 보이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두 달 전까지의 얘기였다.
두 달 전, 최동협은 강기(罡氣)를 손에 넣었다. 무차별로 날아오는 나무 공을 무아지경으로 피한 끝에 얻은 달콤한 과실이었다.
이제 드디어 시작점에 섰구나. 그런 생각에 최동협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훈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벽을 마주했다.
강기를 손에 넣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최동협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두 달. 당연히 짧은 시간이다. 누군가는 최동협의 경지에 닿기 위해 평생을 수련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작 두 달 벽에 막혔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그거랑 별개로 현재 상황이 너무나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최동협이 막막한 건 마주한 벽이 너무나 거대해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받지 못하는 게 컸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아주 느린 속도일지라도 움직이고 있기만 하면 의욕이 생길 텐데, 두 달째 제자리에만 있으니 이게 정말 옳은 방법인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해. 훈련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잠시 고민한 최동협은 스마트폰을 꺼내 백한영에게 문자를 남겼다.
[최동협: 교관님, 당분간 훈련에 불참하겠습니다. 실전 경험을 채울 시간인 것 같아요.]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최동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고민하던 일을 결정해서 그런가. 몸이 달아올랐다.
산책이나 하면서 머리를 식혀야겠다.
가볍게 씻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최동협은 그대로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미적지근했다. 한여름의 밤이란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을 것과 마실 걸 구매한 최동협은 봉투를 든 채 걸음을 옮겼다. 경기도 인근의 도시라 그런가, 수도권 근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한산했다.
볼캡을 눌러쓰고 거리를 걷던 최동협은 이내 적당한 벤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벤치에 앉은 최동협은 캔 맥주를 꺼내 거침없이 들이켰다.
몸에 차가운 게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하나 딱 그게 끝이었다. 알코올이 몸에 들어갔음에도 딱히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각성자의 신체는 알코올도 거뜬하게 버티는구나. 좋긴 한데, 취하고 싶을 때 취하지 못하는 건 단점일지도.
술이라는 건 취하지 못하면 그냥 맛없는 음료수일 뿐이었다.
진작 마셔 봐서 아는데도 이렇게 쿨타임이 돌 때마다 술을 사게 된다. 마치 편의점에서 파는 코코아 음료수를 매번 사는 것처럼.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이토록 망각과 미화가 심했다.
“콜라나 마셔야겠네.”
반도 못 마신 맥주를 전부 땅에 버린 최동협은 같이 사 온 콜라를 꺼내 입에 들이부었다.
크아. 콜라를 단번에 비운 최동협은 벤치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바라봤다.
도시의 밤하늘이라 별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의 느낌이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던 최동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지만, 내일부터 바쁘게 게이트 공략을 다녀야 되는 걸 생각하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맞았다.
신유나도 벽에 막힌 것 같던데, 걔도 불러서 게이트 공략이나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최동협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최동협의 시야에 예상치 못한 게 들어왔다.
‘뭐야, 저건.’
당황한 최동협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공원 거리. 그곳 가로등 아래에.
웬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