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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이 귀환했다-80화 (80/117)
  • 81화 미끼 (1)

    쏴아아―! 쏟아지는 폭포가 연못을 때렸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수면에 닿으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연못에 들어가 튀어나오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느끼던 청진호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극혜검(太極慧劍)은 무당파의 신공으로, 이름에도 나와 있듯 무당파의 핵심 사상인 태극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때문에 태극혜검을 온전히 펼치기 위해선 태극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태극은 음양이다. 음양은 오행이다. 오행은 태극이다.

    즉 이 모든 걸 포용하는 태극은 세상의 근원이며 그릇.

    …이라는 설명을 백한영에게 듣긴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어렴풋이 감을 잡긴 했다.

    그 증거로, 봐라.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다.

    청진호의 검이 원을 그렸다.

    유(柔)의 묘리로 그어진 검로 안에 물방울이 갇혔다.

    검이 태극을 그려 모든 걸 포용한 것이다.

    그 상태로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촤악! 물방울이 청진호가 원하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태극혜검의 1단계 수련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는 증거였지만, 청진호는 불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성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1단계 수련을 완료한 정도로는 태극혜검을 실전에서 쓰기 어려웠다. 방금 물방울을 조종한 것처럼 상대의 공격을 조종할 수 있어야 실전에서 쓸 수 있었다.

    “배예린은 벌써 바위를 부수는데, 나는.”

    “서로 성장 속도는 비슷해. 무공이 달라서 성취가 달라 보이는 거지.”

    “길드장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청진호가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백한영이 바위에 누워 감자칩을 먹고 있었다.

    …감자칩? 저건 어디서 가져온 거지?

    “원래 패도적인 무공은 성취가 바로 보여. 거기에 걔는 각성 능력도 화려하잖아. 시너지가 나는 거지.”

    “그렇긴 하죠.”

    “너는 각성 능력이 수수하고.”

    “…감각 강화는 좋은 능력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수수하다고, 인마. 능력을 사용하면 눈동자에 육망성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너 혼자 감각이 강화되고 끝이잖아. 솔직히 일반인은 네가 각성자라고 해도 거짓말인 줄 알걸?”

    뼈를 때리는 말에 청진호는 사레에 들린 듯 기침을 했다.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올랐다.

    ‘오빠, 진짜 각성자야? 살짝 보여 줄 수 있어?’

    ‘…각성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면 법에 위반돼.’

    ‘그건 각성 능력을 써서 사고를 쳤을 때의 얘기잖아. 살짝 보여 주면 안 돼? 응?’.

    이 뒤의 얘기가 더 있지만, 거기까지 말하는 건 너무 슬프니 그만두자.

    참고로 청진호가 막 성인이 됐을 때 겪었던 일로, 그 뒤로 청진호는 클럽에 가지 않고 수련만 하는 착실한 사람이 되었으니 행복한 결말이 났다고 할 수 있었다.

    누가 행복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도 제가 배예린은 이겨요.”

    “솔직히 실력은 비슷하잖아. 거기다 처음엔 차이가 벌어질걸? 둘 다 정파 무공에 대기만성이긴 한데, 무당파 놈들은 정도가 넘는 대기만성이라서. 커다란 깨달음 얻을 때까지 빌빌댈 거야.”

    “태극혜검 이거 좋은 무공 맞나요.”

    “무공의 고하만 따지면 네게 몇 배는 좋은 거야, 이 녀석아. 그렇다고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가 나쁘다는 건 아니니 자만하진 말고. 무공은 고하보다는 얼마나 잘 어울리냐가 더 중요해서.”

    태극혜검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백한영의 설명을 들으니 의구심이 자라났다.

    나한테 이게 정말 최고의 무공이 맞는 걸까?

    아니라고 해서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순수하게 궁금증이 생겼다.

    “저한테 태극혜검이 맞는 무공일까요?”

    청진호의 말에 백한영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무공에 의구심을 품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무림에서야 검신이 준 무공에 토를 다는 건 정신병자니 당연했고, 현대에서는…….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현대에서 만난 애들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어서. 저런 고민 자체를 안 했다. 애들이 나를 신뢰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래서 저런 반응이 꽤 신선했다.

    “맞지 않으면 방법은 있고?”

    “방법이 없다고 해도 그걸 인지하는 것과 아닌 쪽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답이다, 연금술사!”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개씹덕 길드장님, 이라는 반응에 백한영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만화책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요즘 애들은 이건 모르는구나.

    그럴 수 있지.

    큼큼. 작게 헛기침을 한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인지하기만 해도 효과가 크지. 적어도 상승의 경지로 갈 때 반드시 도움이 돼.”

    “그래서 어떤가요, 태극혜검은.”

    “내가 아는 무공 중에서 그것보다 너랑 어울리는 무공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른 무공을 줄 수는 있어. 다른 것도 보여 줄까?”

    “…일단 다른 무공이 뭐가 있는지 알아보기만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이런 탐구적인 자세는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솔직히 다른 애들은 너무 순순해서 제자 키우는 재미가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청진호, 넌 내가 특별히 더 신경 써 주마.

    “다른 무공은 준비가 되는 대로 주기로 하고, 슬슬 나와라. 그러다 감기 들겠다.”

    백한영의 말에 청진호는 찰방거리며 연못에서 나왔다. 그런 청진호를 데리고 백한영은 넓은 공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쾅!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폭음이 백한영과 청진호를 반겼다.

    허공을 날아오른 배예린이 거칠게 움직였다. 뇌전을 머금은 배예린의 몸이 그대로 대지로 낙하했다.

    콰앙! 땅이 움푹 팼다.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유지아를 바라보며 배예린이 도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배예린의 오른쪽 디딤발이 흙을 밀어냈다. 파지직! 뇌전이 칼집과 배예린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배예린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1식.

    뇌호단조(雷虎斷爪).

    배예린의 도가 칼집에서 뽑히며 신유나를 향해 초고속으로 발사됐다.

    필사의 일격. 어지간한 사람은 반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신유나는 아니었다.

    광륜봉시진(光輪封時陣)이나 분광검법(分光劍法)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빛의 검 한 자루만 있으면 충분했다.

    빛의 검을 오른손에 쥔 신유나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신유나의 검과 배예린의 도가 만나며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배예린의 몸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멀리 날아가 땅에 엎어진 배예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다시 해요!”

    “싫어요.”

    신유나가 피곤해하는 표정으로 백한영을 바라봤다. 저 녀석 좀 어떻게 해 달라는 듯.

    백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배예린에게 다가갔다.

    “저기, 예린아.”

    “네, 길드장님.”

    “유나가 피곤하대.”

    “저는 괜찮은데요.”

    “그건 네가 짐승… 이 아니라 체력이 좋아서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개인 수련이나 하자.”

    백한영의 말에 배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개인 수련은 재미없었지만 백한영이 시키니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얌전히 말을 따르는 배예린을 본 백한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린아.”

    “네?”

    “도를 칼집에 안 집어넣을 수는 없니?”

    “없어요.”

    “그래…….”

    당연하지만 오호단문도는 발도술을 사용하는 무공이 아니었다. 발도술 같은 특수한 기술을 정파에서 채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 방금 배예린은 쓴 발도술은 뭐냐고?

    그건 그냥 자기가 멋대로 한 거다. 백한영이고 오호단문도고 발도술을 지시한 적은 없었다.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오호단문도는 오행을 기반에 둔 패도적인 도법으로, 그중 1식 오호단조는 빠른 횡 베기로 적의 숨통을 끊는 기본적인 초식이었다. 저런 발도술이 아니라.

    근데 배예린의 오호단문도는 일반적인 오호단문도랑은 많이 달랐다.

    우선 배예린은 오행에서 파생된 뇌(雷)의 속성 하나에만 집중했다. 근데 뭐 여기까진 그럴 수 있었다. 실제 오호단문도의 수행자들도 한 가지 속성에만 집중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배예린의 이상행동은 1식 오호단조를 익힌 후부터 드러났다.

    초식의 이름을 뇌호단조로 뜯어고친 배예린은 오호단조를 발도술로 바꿔 버렸다.

    길드장님, 이것 보세요, 라면서 허수아비를 향해 발도술을 펼치던 배예린은 백한영에게 지금도 생생했다.

    당연하지만 입문자가 무공을 마음대로 뜯어고친다고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없었는데…….

    ‘짐승이라 그런가. 멋대로 해도 어떻게 되긴 하네.’

    모든 검법의 기본은 간단했다.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찌르기.

    흔히 상승 무공이라고 불리는 검법의 초식도 결국 저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호단문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호단문도의 1식, 오호단조는 얼핏 봐선 단순한 횡 베기에 불과했다.

    오호단문도만 이러냐? 아니었다. 다른 무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검법의 초식이라는 건 외부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안에 든 내용물이 뭐냐에 따라 3류 무공과 1류 무공으로 나뉜다는 뜻이다.

    오호단문도의 초식은 얼핏 봐선 투박해 보였지만 거기엔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의와 념이, 심상이 담겨 있었다.

    결국 무공에 중요한 건 창시자의 철학이었으며 그걸 얼마나 담아내느냐가 핵심이었는데.

    배예린의 마음대로, 오호단문도엔 그게 담겨 있었다.

    무초식을 알지도 못하는 놈이 초식을 자기 멋대로 바꿔 버렸고, 오행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었지만, 그런 배예린이 펼치는 오호단문도에는 의념과 심상이 제대로 담겨 있었다.

    본능적으로 하는 것 같았지만, 원래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른 거니까. 알고 하면 더 좋지만 저것도 나쁘지 않았다. 짐승에게는 짐승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절대 오행이 무엇인지, 초식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알려 줘 봤자 이해를 못 할 것 같아서 포기한 게 아니다. 이건 진짜다.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중요하니 두 번 강조하겠다.

    공터 한복판에 마련된 수련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배예린.

    배예린이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심히 보고 있자, 등 뒤에서 청진호가 중얼거렸다.

    “재능의 차이가 나는 걸까요.”

    “음.”

    근래 청진호는 자신감을 꽤 잃었다. 고작 2주일 동안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배예린이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둘의 재능이나 성장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배예린이 무공을 자기 입맛대로 막 바꾸는 걸 보면 저게 재능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저렇게 본능 하나만 믿고 무공을 익히는 놈들은 처음엔 몰라도 나중에 가면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청진호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해는 됐다.

    어떻게 해야 될까. 잠시 말을 고르던 백한영은 청진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너는 그대로만 해. 잘하고 있어.”

    “네.”

    위로가 된 것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저건 자기가 극복해야 될 문제였다.

    애도 아니니 알아서 잘하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백한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어… 뭔가 하나가 비는 것 같다?

    “유나야, 근데 동협이는 어디 갔냐?”

    “최동협이요?”

    “어. 아까까지만 해도 있지 않았냐?”

    “잠깐 금성화 씨 좀 보고 온다고 하더라고요. 신입 길드원인데 너무 혼자 둔 것 같다고.”

    “그래?”

    하긴 그렇긴 했다. 최동협 이 녀석,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많이 컸구나.

    좋아. 고생하는 우리 최동협을 위해 선물을 준비해야겠다.

    요즘 벽에 막혀서 답답해하던데, 내가 뚫어 주마.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 둬. 특별 서비스니까.

    * * *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돌아온 최동협은 김태식으로부터 묘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흡혈귀라니. 그런 게 진짜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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