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마법사 (3)
유르시는 백한영에 대한 정보를 조심히 모았다.
백한영이 광범위한 감지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인 만큼 더욱 조심해야 됐다.
유르시는 어느 것이 백한영을 자극하는 트리거일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조사했고, 끝내 백한영의 정보를 대부분 알아낼 수 있었다.
백한영은 8년간 식물인간의 삶을 살았다. 양화대교 근처의 흔적을 조심히 더듬은 결과 식물인간에서 깨어나자마자 지금의 경지를 얻은 것으로 추정됐다.
결론. 현재 백한영의 몸을 차지한 게 다른 영혼이든 아니면 백한영의 영혼이 다른 곳에 갔다 왔든, 식물인간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행복한 삶이 목적이 된 거라기보다 심신이 지쳐 저 상태가 된 것으로 보였다.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많은 일을 겪어야 되니 누구나 지칠 수밖에 없었지만, 백한영은 그 부분이 유독 두드러졌다.
아마 힘을 얻고 휘두르는 과정에서 사고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해야 될 주변 인물로는 여동생인 백은하가 있다. 이모인 이지선도 각별한 사이지만 여동생은 더욱 각별해 특별한 수준이었다. 지금의 백한영을 인간계에 붙들어 놓는 유일한 연결 고리라고 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백은하는 어떤 식으로든 건드리는 순간 트리거가 작동될 것이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백한영을 사냥하려면 우선 궁지에 몰아야 된다. 효율만 따지면 백은하가 최고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아. 트리거를 작동시키지 않고 백은하를 이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유르시는 백한영의 주변 인물을 차근차근 알아 갔다. 백은하를 이용하는 게 불가능하니 다른 카드가 없는지 살펴본 것이다.
우선 김태식. 백한영이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후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이다. 현재로서는 가족을 제외하곤 가장 친해 보였다.
최동협과 신유나. 백한영의 길드의 길드원으로, 이쪽도 나름 정을 쌓은 것으로 보였다.
이상이 사회에 녹아들며 친해진 사람들이라면 다음은 살짝 특수하다고 해야 하나, 복잡한 인연들이었다.
홍유진. 이 세계의 원주민이면서 유르시와 마찬가지로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특이점이 있었다. 차원 이동을 두 번 한 걸로 추정됐는데, 백은하 다음으로 유르시가 주의하는 녀석이었다. 본신의 힘 자체는 별것 없었지만 가지고 있는 특수한 무기가 굉장히 걸렸다.
거기에 같이 넘어온 파티원들이 강하기도 했고.
애초에 백한영과 인연이 깊지 않아 사용할 곳도 없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 유르시의 결론이었다.
다음으로는 이초아, 유지아, 한유림. 백한영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되는 여성들이었다.
이쪽도 써먹기 애매했다. 친분이 있긴 했지만… 백한영과 그 정도로 친하냐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이 셋보다 김태식이 더 친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얘기를 돌려서 그냥 김태식을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김태식조차 써먹기 애매했기에 다른 패를 뒤져 본 것이었다.
가장 친해 보이는 김태식이 위기에 빠진다고 백한영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연결 고리가 깊어 보이진 않았다.
백한영은 세상에 염증을 느낀 상태였다.
어쩌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자신이 세상에 관여한 끝에 또 일이 잘못될까 봐 무서운 것이다.
때문에 백한영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안 됐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군.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겠어.
…라고 생각하고 2주일 후.
러시아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정도였다고.”
유르시는 러시아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한여름 풍경 속을 거닐며 미간을 좁혔다.
백한영의 강함을 최대치로 잡아 놨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했다.
‘어느 정도인 거지.’
유르시는 수만 년 전 자신이 직접 인간계에서 쫓아낸 신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유르시의 세계엔 최하급 신부터 최상급 신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신들이 있었다. 왜 저런 게 인간계를 돌아다니는 거냐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미친 세상의 출신인 만큼 유르시는 신들의 강함을 잘 알았다.
최하급 신은 유르시의 고향 마을에서 모시던 신 정도다. 그래도 신인지라 상당했지만,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해야 되나. 굳이 따지자면 반신의 느낌이 강했다. 물론 할 만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점이 와야 할 만한 거지 절대 얕볼 상대는 아니다.
하급 신. 여기부터 진짜 신의 느낌이 강했다. 필멸자의 한계에 갇혀선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면 됐다.
필멸자의 껍질을 깨고 한 단계 나아가야만 상대할 수 있는 존재. 그게 하급 신이었다.
하급 신이 이런데 그 위의 중급, 상급, 최상급 신은 어떻겠는가. 거의 우주적 존재라고 생각하면 됐다.
유르시도 일종의 버그를 사용한 게 아니면 중급, 상급, 최상급 신을 온전히 신계로 돌려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 얘기가 샜는데, 그래서 백한영은 어느 정도라고 봐야 되냐면.
사실 이곳에 남은 결과만으로는 추측이 불가능했다.
힘을 사용한 여파만으로 현실이 뒤틀렸으니 필멸자의 굴레를 벗어난 초월자 혹은 승천자의 영역인 건 분명했지만.
이 정도는 솔직히 하급 신도 할 수 있었다.
유르시도 마음만 먹으면 10분 내로 이곳에 있는 나무들을 전부 벚꽃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러시아 한복판에 한여름의 풍경이 나타난 것까진 별게 아니었지만.
이 풍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백한영이 한 짓은 별게 맞았다.
‘잠깐이지만 그가 심상 세계를 연 것만으로 주변의 법칙이 빨려 들어갔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만큼 백한영의 심상 세계의 규모가 거대하고 완성됐다는 뜻이었으니까.
‘중급이라고 봤는데, 상급일지도 모르겠군.’
상급이라. 이러면 머리가 아파졌다.
일단 유르시가 정공법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수준은 아득히 넘어갔다.
하급 신과 중급 신 그리고 상급 신 간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지만, 단순히 강함만 비교하면 다음과 같았다
하급 신과 중급 신 둘 다 단신으로 문명 하나를 박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똑같아 보이지만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시간.
하급 신이 문명 하나를 박살 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며칠 정도라면 중급 신에겐 1초 혹은 그 미만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마음을 먹는 즉시 행성을 박살 낼 수 있는 것이다.
중급 신이 벌써 이런데 상급 신은 어떠냐고?
쉽게 말해 상급 신은 대문명 하나를 단신으로 박살 낼 수 있었다.
대문명. 우주로 진출해 우주적인 규모를 갖춘 문명을 뜻하는 말로,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성장한 문명은 기술과 규모로 신조차 감당이 가능했다.
단. 중급 신까지만.
극소수 상급 신도 감당이 가능한 대문명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급 신을 적으로 돌리는 즉시 멸망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상급 신에겐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런 상급 신이 자신의 성역에서 놀지 않고 왜 인간계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쉬고 싶으시다잖아. 쉬고 싶으시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쁘지 않아.’
유르시는 러시아에서 발행한 일련의 흐름을 긍정적이라고 판단했다.
우선 백한영이 행동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이었다. 김태식이 죽든 말든 가만히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백한영은 김태식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고민의 시간이 있었던 걸 봐선 원래는 안 움직일 생각이었다가 심정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백한영 정도의 강자가 심경이 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필멸자의 기준을 초월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됐다.
심상 세계를 완성한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함과 동시에 규칙을 재정립한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런 자들의 생각이, 하물며 상급 신의 경지에 오른 백한영의 생각이 변하는 게 흔한 일일 리가.
덧붙이자면 유르시는 백한영의 심정에 변화가 생겼을 때 다 때려치우고 도망칠 준비를 했었다. 저 정도 경지에 이른 자들에게 변화가 생기면 간혹 다음 경지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상급 신으로 보이는 백한영이 다음 경지로 넘어간다? 그냥 재앙이었다. 설명이 불필요했다.
물론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진 않았다. 유르시에겐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고향 차원에서 시한부 삶을 살아야 됐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백한영, 몸이 근질거리나 보군.’
백한영이 러시아 범죄 조직의 수장, 코스틴 니콜라이에게 사용한 힘은 명백히 도를 넘어섰다.
도를 넘어섰다? 사실 그런 말로도 표현이 안 됐다.
손짓만으로 죽일 수 있는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 심상 세계를 그 정도까지 열다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 이 행성에선 유르시를 제외하면 백한영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채는 사람조차 없지 않을까.
백한영이 과도한 힘을 쓴 건 녀석이 거슬려서 혹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흥분해서 등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 그것만으론 백한영의 행동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었다.
백한영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가 걸어왔을 길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고 유르시는 백한영이 걸어왔을 길을 대강이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
백한영이 걸어온 길은 피로 점철돼 있을 것이다. 그건 적의 피이기도 하고 아군의 피이기도 했다.
전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 않냐고?
그럴 리는 없었다. 증거도 있었다.
바로 백한영이 가진 힘이 증거였다.
저 정도의 힘을 쌓은 사람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인간이 평화와 일상을 노래 부르고 있는 거다. 물론 머리는 계속 평화가 최고라고 하겠지. 이걸 위해서 여태까지의 수라장을 거쳐 왔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몸은 아닌 거다. 평화에 익숙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치열했던 삶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억눌러 왔던 폭력성을 발휘한 거다.
‘이 정도면 백한영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파악했다고 봐도 되나.’
아직 백한영의 진정함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걸 제외한 모든 것. 인간관계, 성향 등. 대부분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거라면.
‘드디어 계획의 핵심 퍼즐이 모였군.’
부족했던 핵심 퍼즐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됐다.
물론 아직 얻지 못한 퍼즐이 남았지만, 핵심 퍼즐을 손에 넣은 이상 다른 것들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김태식과 길드원을 중심으로 백한영을 꾀어내기로 한 유르시는 계획의 완성을 위해 세부적인 체스 말을 골라냈다.
음지, 양지 가리지 않고 사람을 찾았다. 인간 수준의 소망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유르시가 고려해야 될 건 상대의 쓸모가 끝이었다. 상대의 사회적 위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설사 한 국가의 수장이라고 해도 만족시켜 줄 자신이 유르시에게 있었다.
그렇게 유르시가 체스 말을 고르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아다닌 지 2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한 인천의 부둣가에서 유르시는 흡혈귀를 만났다.
“말해, 흡혈귀. 너네는 총 몇 명이나 있지?”
“약 100명 정도 있습니다.”
“100명? 100명이라.”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100명 정도의 흡혈귀면 체스 말로 쓰기에 적절했다.
“그 정도면 쓸 만하겠군.”
모든 퍼즐을 손에 넣은 유르시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백한영이 머물고 있는 초고급 아파트 방향을 바라봤다.
백한영.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