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마법사 (2)
한 남자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가 세상에 의문을 가진 건 10살 무렵. 마을에서 모시던 신이 느닷없이 제물을 요구했을 때였다.
농사의 축복을 받기 위해 신사를 찾았던 어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장면을 남자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 순간이 남자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 계기이자 시발점이었으니 당연했다.
제물. 뭐 그것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신이야 원래 역겨운 족속들이니까.
그런데 마을의 어른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현 상황의 부조리함 때문이 아닌, 순수하게 마을에 있는 제물의 질이 별로여서, 신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서인 걸 안 순간 남자는 결심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다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하물며 세상 그 자체를 바꾸는 것? 쉬울 리가 없었지만.
남자는 해냈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어떤 희생을 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요점은 그거다.
남자는 신화의 시대를 끝내고 필멸자의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남자가 필멸자의 시대를 열고 수만 년의 시간이 지났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남자, 유르시 텔리온이 말했다.
“실패했군.”
신들을 세상에서 쫓아낸 대가가 수만 년의 봉인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르시는 빠르게 다음 계획을 세웠다.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신들을 쫓아낸 건데 100년도 못 즐기고 죽을 수는 없었다.
죽는 게 아니라 인과율에 합류하는 것이지만, 자아를 잃고 인과율의 일부분이 되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점을 유르시는 알지 못했다. 여기서는 죽는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았다.
아무튼 수만 년 만에 봉인에서 깨어난 유르시는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해 정보를 끌어모았고, 곧 타 차원에서 발신된 메시지 하나를 포착했다.
“만능의 특이점이라.”
메시지의 출처는 의심스러웠지만, 그 내용은 사실로 보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한 유르시는 망설임 없이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인과율의 손아귀가 바로 뒤까지 쫓아온 상황이다. 찬물 더운물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지잉—! 차원문이 열리고 유르시는 메시지가 알려준 차원 좌표에 도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쉽지 않겠군.”
이 차원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 * *
유르시가 0982-차원에 도착하고 처음 한 일은 그 차원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마력은 있군.’
0982-차원, 지구엔 마력이 존재했다.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이런저런 우회를 해야 되는 차원과 비교하면 상당히 괜찮은 곳이었다.
마법을 쓰는 데 문제가 없는 걸 확인했으니 다음은 이곳의 전투력을 확인할 차례였는데.
거기서 유르시는 살짝 놀랐다.
마법이고 이능이고 이제 막 발전한 수준에 불과한 주제에 전투력 하나만큼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가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겠군.’
인류 최강의 무기, 원자폭탄의 존재를 인지한 유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저력이 있는 차원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기대에 비해 괜찮은 수준인 거지, 원자폭탄 정도론 마법을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유르시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능의 발전도 더뎌서 대놓고 마법을 쓰고 다녀도 못 알아볼 것 같았고, 여러모로 활동하기 편한 차원이었다.
‘특이점은 아마 숨겨져 있을 거다.’
이야기 속에서만 회자되고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만능의 특이점이 뭔지 유르시는 잘 알았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권한이 있는 유르시는 만능의 특이점에 대한 정보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문명이 꽃핀, 필멸자들이 자리 잡은 행성에 천문학적인 확률로 발생하는 인과율의 씨앗. 물론 씨앗이 인과율까지 성장할 확률은 극악하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온 차원을 지배하는 법칙의 씨앗은 그 자체만으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었다.
소유자가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특이점은 하나의 문명이 정점에 달했을 때 발생하는 것인 만큼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특이점의 뿌리가 되는 문명을 박살 내면 됐다.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만, 어느 정도 위협할 필요는 있겠군.’
적어도 멸망 직전의 위기감 정도는 조성해야 특이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유르시는 조심히 지구의 정보를 모았다.
대충 봐도 유르시의 손짓 하나에 끝날 세상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유르시는 기본적으로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신들에게 머리채가 붙잡혀 죽었을 테니 당연했다.
그렇게 유르시가 지구에 혹시나 있을 위험 분자를 조사하고 몇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지구-대한민국 서울 상공에 거대한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특이점을 찾으려는 외부 세력인가.’
고도로 발전한 문명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초거대 전함을 확인한 유르시는 계획을 약간 수정했다.
유르시에겐 마법 몇 개를 사용하면 쓰러질 적에 불과했지만, 이 세계의 문명에겐 상당히 버거워 보였으니 저걸 잘 이용하면 숨어 있는 위험 분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이 세계에 숨겨진 강자 같은 게 없어 거대 전함을 막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저놈들이 대신 세계를 위협해 특이점을 밖으로 꺼내 주면 수고를 덜어서 좋았다.
거대 전함에서 지상으로 낙하한 용인과 그걸 막는 지구인으로 보이는 검사의 등장에 유르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정도가 인류의 정점이면 변수는 없겠는데, 라고.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유르시는 상상하지도 못한, 거대한 변수가 등장했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리고, 거대 전함이 마치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게이트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그 모든 걸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던 유르시는 자신의 신중함을 다시 한번 칭찬했다.
역시 아무리 별것 없어 보여도 신중히 움직이는 게 맞았다. 저걸 봐라. 저런 미친 변수 덩어리가 뜬금없이 튀어나오지 않는가.
서울을 침공한 거대 전함이 전부 박멸될 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유르시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전투의 현장을 찾았다.
얼핏 보이는 흔적만으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대 전함의 잔해에 손을 얹은 유르시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과거를 읽는 마법을 발동해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정렬된 마력이 유르시의 제어에 따라 형태를 갖췄다. 거기에 의지를 불어넣자, 파지직―! 마력이 현실을 뒤틀며 현상을—.
오싹.
갑작스러운 오한에 유르시가 마법을 발동하다 말고 양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유르시의 눈동자가 어느새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황금색으로 변한 유르시의 눈동자, 예언안(豫言眼)이 아무 생각 없이 마법을 사용할 경우 발생할 미래를 유르시에게 알려 주었다.
유르시가 마법을 발동한다. 무언가를 본다. 아마 전투를 벌인 사람의 흔적을 직접적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마법으로 과거를 읽은 유르시가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직후.
허공이 일렁이며 갈라진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온다. 남자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건 또 뭐야. 작게 중얼거린 남자가 유르시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커어어억.”
미래에서 현실로 돌아온 유르시가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 폐가 요구하는 대로 끊임없이 산소를 보내던 유르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과거의 흔적을 살펴본 것만으로 공간을 넘어온다고?
그래. 거기까진 그럴 수 있었다. 유르시도 미리 준비해 놓는다면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저항조차 못 하고 단번에 목이 달아나다니. 아무리 검사가 근접전에 유리하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신화의 시대를 끝낸 대마법사가 단칼에 목이 날아가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괴물이다.’
예언안이 전해 준 극히 일부분만으로도 유르시는 남자, 백한영의 위험함을 바로 눈치챘다.
저건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다. 유르시는 쓰게 웃었다.
어째 쉽게 되는 일이 없을까.
어쩌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신화의 시대를 끝내 버린 인간은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냥 특이점만 넘겨 달라는 건, 안 되겠지.’
특이점은 문명을 뿌리로 둔 씨앗. 그런 걸 넘겨줬다간 문명이 서서히 쇠퇴하고 만다.
원주민이 순순히 넘겨줄 리 없는 것이다.
‘정보. 정보를 모아야 해.’
유르시의 뇌가 맹렬히 연산을 시작했다.
유르시는 우선 현 상황의 모순점부터 집었다.
누군가가 과거를 읽는 순간 그걸 눈치채는 인간이 어째서 유르시의 존재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까. 하고자 한다면 이 행성에 있는 모든 인간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에 대한 답을 유르시는 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다. 유르시는 백한영에게서 동류의 냄새를 맡았다.
‘일상을 즐기고 싶은 거군.’
유르시도 마음만 먹는다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인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하나 유르시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평범하고 행복한 삶과 그런 짓은 백만 광년 떨어져 있었으니까.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받으며 살고 싶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생산하는 쓰레기 같은 비극을 전부 관람하고도 멀쩡하려면 둘 중 하나여야 됐다.
감정이 없든가.
인류가 아니든가. 즉 신이 되든가.
양쪽 다 아닌 유르시는 의도적으로 최소한의 감각만 열어 놓고 있었고, 그건 백한영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흔적, 과거를 읽는 것같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면 닫아 놓았던 감각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지만, 아닌 경우 인간 레벨의 감각이 유지되는 것이다.
‘내겐 다행이군.’
그런 식으로 평소에 감각을 제한하고 있다면 정보를 모을 방법은 많았다. 지금 당장만 해도 20가지가 넘게 생각났다.
유르시는 과거를 읽는 대신 현장에 있던 영혼 하나를 불러왔다.
갑작스럽게 영면에서 깨어난 영혼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는.]
“이름은?”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질문에 대답해라. 이름은?”
유르시의 재촉에 용인의 형태를 한 영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스트레일.]
“좋아, 아스트레일. 네겐 선택지가 있다. 내게 협조하고 편히 저승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저승으로 돌아갈지.”
[고통? 감히 네놈이 만년제국 레티오르의 황제를 겁박하는 것이냐? 내게―.]
“아. 됐어. 난 분명 선택지를 줬다? 원망하지 마.”
유르시가 영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아아악!]
“시끄럽네.”
유르시의 마나와 닿은 영혼이 걸레 짜듯 뒤틀렸다.
영혼이 조금 전에 겪었던 격렬한 전투가 유르시의 머릿속에 흘러 들어왔다.
직접적으로 백한영의 흔적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타인의 경험을 흡수하는 방식이면 백한영의 감각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흠.”
영혼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를 얻은 유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생각보다 더 괴물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손에 넣은 수준이 아니군. 그 이상이야.’
편린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진심을 내보이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잘 안 갔다.
하지만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신을 상대하는 건.
“내 전문이거든.”
상대는 절망적으로 강하고, 시간은 빠듯했지만.
할 만해 보였다.
적어도 불가능일 것 같지는 않았다.
“준비는 많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영혼을 저승으로 돌려보낸 유르시는 거대 함선의 잔해 위를 천천히 벗어났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