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견원지간 (3)
[20XX년 10월 7일. 날씨는… 여기는 맑음.
이곳에 갇힌 지 일주일. 많은 게 변했다.
가장 먼저 생활. 문명의 이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달…….]
“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청진호는 일기를 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약 10m 정도 떨어진 곳. 그곳에 막 잡은 생선을 커다란 잎에 싸서 옮기는 중인 배예린이 있었다.
얼굴에 검댕이 군데군데 묻은 배예린이 청진호 앞에 선 후 말했다.
“넌 왜 아무것도 안 해. 아까부터 나만 일하는 것 같잖아.”
“네가 아까 먹은 열매도 내가 따왔고, 네가 편하게 잔 저 집도 내가 만든 건 까먹은 모양이지?”
“…….”
배예린이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까먹은 것이다.
청진호가 혀를 찼다. 뇌까지 근육으로 돼 있는 것도 아닌데 그새 그걸 까먹다니. 생긴 건 슬림한데 하는 짓은 왜 저런지.
청진호는 마저 일기를 쓰기 위해 펜을 잡으며 배예린에게 말했다.
“됐고. 불이나 피워라, 라이터.”
“내 이름은 라이터가 아니야.”
“알았다, 토치. 불 피워.”
청진호의 말에 배예린은 툴툴대며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피웠다.
각성 능력을 응용하면 불을 피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화륵.
임시로 만들어진 화로에 불이 붙었다. 나뭇가지에 생선을 꿰 화로에 올리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당장이라도 생선을 집어 먹을 것 같은 배예린을 청진호가 말렸다.
“그만. 안 돼.”
“말투가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애완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야.”
“애완동물? 그럴 리가 있나.”
애완에는 동물을 가까이 두고 귀여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즉 청진호가 애완동물 다루듯 배예린을 대했다는 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청진호는 그저 짐승 다루듯 다뤘을 뿐이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 후 고소한 냄새가 극한에 이르렀을 때.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청진호와 배예린이 생선을 잡아 입에 집어넣었다.
소금 하나 안 뿌렸건만 생선에선 천상의 맛이 느껴졌다. 청진호와 배예린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맛있는 생선을 순식간에 해치운 청진호와 배예린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맴맴—!
매미 소리를 배경으로 한 채 배예린이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기댔다.
모닥불 피워 놓고 캠핑을 하고 있으니 낭만이 아주 넘…….
“잠깐.”
“왜 그러냐.”
“나만 지금 상황이 이상해?”
“뭐가 말이야.”
“이게 뛰어난 재능을 가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일단 시키니까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서바이벌 훈련과 재능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 말에 청진호도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랬다.
청진호가 중얼거렸다.
“…실전에 가까운 훈련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게 재능을 알아보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지?”
그냥 훈련을 시켜 준다고 했으면 청진호도 아무 말 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일주일 동안 실력이 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하는 훈련은 백한영이 너네 그 정도 재능 아니야, 라고 말한 데서 시작됐다.
그러니 훈련도 진짜 재능이 뭔지, 왜 백한영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려 주는 쪽으로 진행됐어야 했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청진호가 느낀 것이라고는 배달 음식의 놀라움밖에 없었다.
“길드장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군.”
청진호는 백한영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S급 각성자를 키워 낸 경력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어떤 훈련을 시키든 받아들일 자세는 돼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설명을 듣고 싶었다.
지금 훈련은 너무 명확하게 원래 의도랑은 관계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재밌어 보이는구나.”
누군가 수풀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백한영이었다.
“길드장님.”
“그래. 부르길래 왔다.”
그새 말을 놓기로 한 백한영의 대답에 청진호가 빠르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저희가 왜 재능이 없는지 알려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확히는 그런 말을 들은 단계가 아닌 이유를 알려 준다고 한 건데, 네 말도 틀리진 않지.”
“이 훈련이 그것과 관계가 있나요?”
청진호의 말에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녀석들, 눈치가 빠르구나.”
“네?”
“눈치가 빠르다고. 따라와라.”
멍한 표정을 지으며 청진호가 백한영을 따라갔다. 배예린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곤 둘을 따라갔다.
한참을 걷자 거대한 공터와 절벽 그리고 각종 훈련 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장소가 나왔다.
백한영이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려 주도록 하지. 우선 이것부터 받아라.”
느닷없이 책을 꺼내 던지는 백한영.
청진호와 배예린은 각각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읽어 내렸다.
배예린이 책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입에 올렸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유명 가문의 도법이지. 패도적인 네 스타일이랑 잘 맞을 거다.”
“저는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도법을 추구하는데요?”
“…청진호 네 건 유명 문파의 검법이다. 너랑 딱 맞을 거다.”
배예린의 개소리를 무시하는 백한영. 청진호가 책을 쓸어 내렸다.
“태극혜검(太極慧劍)……. 이거 진짜인가요?”
“오. 그게 뭔지 아나?”
“어렸을 때 무협지를 읽은 사람이면 다 알죠.”
“근본이 있는 친구구나. 마음에 들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난 백한영이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스륵. 청진호는 책을 펼쳐 내용을 읽으려다가, 덮었다.
“길드장님.”
“어. 왜.”
“뭘 하시려는 건지는 이해했습니다. 근데 이거랑 여태까지 일주일 동안 한 훈련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무슨 관계가 있냐고?”
녀석. 눈치가 빠른 줄 알았더니 느리구나.
백한영이 청진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냥 한 거야. 이걸 만들 동안 할 게 없어서.”
“…그냥이요?”
“덕분에 실력은 늘었잖아. 뭐 하고 있어. 이럴 시간에 준 책이나 외워. 할 것 많다.”
그렇게 말하고 느긋하게 공터를 걷는 백한영을 빤히 바라보던 청진호가 툭 하고 중얼거렸다.
“그 개고생을 그냥?”
억울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선 백한영이 법이고 규칙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나가든가.
아니면 조용히 따라야 됐다.
* * *
경기도 인근의 거대한 저택. 그곳에 한 남자가 진입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른 남자, 윤한이 스피커에 대고 입을 열었다.
“천진혁, 있냐?”
반응이 없었다. 작게 혀를 찬 윤한은 도어 록을 조작해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봐라.”
현관부터 사람이 오랫동안 다니지 않은 흔적이 가득했다. 원래라면 바닥에 쌓인 먼지를 보자마자 빈집인가 싶어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침없이 집 안을 누빈 윤한은 이내 커다란 철문 앞에 섰다.
눈앞의 이건 외부와의 연결이 완벽히 차단된 시설의 문이었다. 당연히 밖에서 여는 기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걸 열기 위해선 힘으로 강제로 열어야 됐는데, 이 시설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하면 그런 짓은 급한 일이 아니면 하면 안 됐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맞으니까.”
흐읍. 마나를 끌어 올린 윤한은 철문을 붙잡고 양옆으로 세게 밀었다.
구구구궁. 거센 소음을 일으키며 폐관 수련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안쪽에 있는 계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간 윤한은 곧 넓은 수련실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천진혁을 만날 수 있었다.
명상을 잘못 방해하면 주화입마를 일으킬 수 있으니 벽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 곧 천진혁이 눈을 떴다.
천진혁과 눈이 마주친 윤한이 벽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요새 바쁜가 봐. 통 얼굴을 못 봐서 직접 보러 왔어.”
“무슨 일이지.”
천진혁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수련 중독자에게 수련을 방해하는 모든 건 치워야 될 요소에 불과했다.
설사 친구라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살벌하기는. 내가 괜히 왔겠냐. 원래 너 수련 끝나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 이러다 타이밍 놓칠 것 같아서 급하게 온 거야.”
“타이밍? 뭘 말하는 거지.”
“말로 하면 길어지니 그냥 영상을 보여 줄게.”
그렇게 말한 윤한은 태블릿 PC를 꺼내 천진혁에게 내밀었다.
“이건?”
태블린 PC를 받아 든 천진혁이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영상을 감상했다.
시베리아 한복판. 눈이 흩날리는 설원이 지나가고, 곧 영상이 제작된 목적이 튀어나왔다.
설원 한가운데 피어난 신록의 풍경을 확인한 천진혁은 영상을 종료한 후 윤한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건 왜 보여 주는 거지?”
“왜 보여 주긴. 딱 봐도 심상치 않잖아. 그래서 사라지기 전에 급하게 널 찾아온 거라고.”
“그건 알겠다. 근데 그게 내 수련을 방해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무공의 흔적 같더라고, 그거.”
“이게?”
윤한의 말에 천진혁은 미간을 좁히며 재차 영상을 재생했다.
“잘 모르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직접 보면 느껴져. 나도 그랬는데 너는 어떻겠냐. 혹시 모르잖아, 깨달음이라도 얻을지.”
“깨달음이라.”
천진혁이 구미가 당긴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상의 백한영과 심상 세계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것만 계속 반복하니 정신이 피폐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살짝 벽에 막힌 상태였다.
처음엔 원하는 만큼 성과가 나왔지만, 심상 세계에서의 죽음이 네 자릿수가 된 후로는 이렇다 할 성장을 하지 못했다.
성장을 못 한 걸 넘어 오히려 퇴보하기까지 했기에 변화가 필요했는데, 이렇게 딱 맞춰서 윤한이 찾아오다니. 운이 좋았다.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진혁이 말했다.
“여긴 어디지?”
“러시아. 지금 가려고?”
“네가 말한 대로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니까.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지.”
천진혁의 말에 윤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를 준비시키는 윤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천진혁은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
무공의 흔적이라는 말을 듣고 영상을 다시 확인하니 보이는 게 있었다.
인위적인 풍경 속에서도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풍경 자체가 자연히 생길 수 없으니 당연히 사람이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만, 놀랍게도 원래 저런 게 있었던 것처럼 신록의 풍경이 주변에 자연히 녹아들어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밖에 없는데.
천진혁은 조금 전까지도 심상 세계에서 질리도록 봤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백한영, 또 무슨 짓을 저질렀군.
탁. 태블릿 PC를 내려놓은 천진혁이 윤한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끝났나?”
“말투가 꼭 뭘 맡겨 놓은 사람 같냐? 끝나긴 했어.”
“그래? 그럼 가자.”
천진혁이 윤한을 지나쳐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윤한은 어깨를 으쓱하곤 천진혁을 뒤따라갔다.
집 밖으로 나가 윤한이 몰고 온 자동차에 탑승하며 천진혁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백한영을 찾아가야겠군. 너무 오래 정체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