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견원지간 (2)
각성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제어계는 보통 무언가를 조종하는 느낌의 각성자가 많았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일본의 S급 각성자 엔도 이츠키의 암영세계(陰影世界)나 신유나의 천상광휘(天狀光輝)를 떠올리면 됐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암영세계. 빛을 조종하는 천상광휘.
물론 둘 다 단순히 조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특수한 형질을 부여했지만, 당연하게도 그것 또한 제어계 각성자의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그리고 무신련의 신입 길드원, 배예린 또한 제어계 각성자였다.
배예린. 제어계 각성자. 사용하는 무기는 도.
각성 능력은, 전기를 조종하는 뇌류상인(雷流狀印).
파직. 뇌전이 배예린의 몸을 맴돌았다. 뇌류상인의 핵심은 뇌전(雷電)을 응축하는 것에 있었지만, 제어계 각성자의 장점은 응용력. 단순히 뇌전을 조종하는 정도는 배예린도 할 수 있었다.
배예린의 등급은 B였지만 백한영이 판별한 바로는 즉시 A급도 될 수 있는 포텐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전투 스타일도 진작 확립된 지 오래였다.
뇌전으로 인해 가속된 배예린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목표는 아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마음에 안 들었던 청진호였다.
파지지직! 배예린의 도가 푸른 불꽃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뇌전이 사방을 밝혔다.
푸른빛이 사그라들고, 배예린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렇게 쉽게 막힌다고?’
나름 진심으로 날린 공격이었건만 청진호는 아무렇지 않게 배예린의 도를 막아 냈다.
“흠.”
배예린의 도를 막아 낸 청진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청진호는 강화계 각성 능력자. 강화계 각성자는 일반적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계통이 많았지만, 모든 강화계 각성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신체라는 건 수많은 요소의 집합체였다. 근력 외의 것을 강화하는 강화계 각성자도 존재했다.
청진호의 각성 능력은 감각을 강화하는 무련감극(無連感極).
강화계 각성자로서는 꽤 드문 기교파라고 할 수 있었다.
청진호는 배예린과의 거리를 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격이 무거워.’
최대한 공격을 흘려 냈음에도 몸에 여파가 남았다. 배예린의 도격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였다.
배예린은 청진호가 쉽게 공격을 받아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했을지 몰라도 몸은 정직했다. 손에 잔떨림이 남았다.
‘쉽지 않겠는데.’
배예린의 공격과 몸놀림이 기민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청진호가 검을 상단세로 들며 자세를 잡았다.
결국 청진호 같은 타입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타이밍을 잡는다.’
상대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내며 기회를 노리다 한순간의 빈틈을 캐치 해 카운터를 찌르는 것.
그것 외에 청진호의 승리 패턴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파직. 배예린이 온몸에 흐르는 뇌전을 지워 냈다. 청진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배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간단한 상단세를 취한 것뿐이었지만, 마치 바위 같은 단단함이 청진호에게서 느껴졌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청진호의 수비를 뚫기 어렵다는 걸 깨달은 배예린이 태세를 변경했다.
‘단번에 뚫는다.’
스릉. 들고 있던 도를 칼집에 집어넣은 배예린이 자세를 낮췄다.
파직. 뇌전이 튀었다. 뇌전이 칼집에 모이며 고막을 찢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청진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발도술?’
발도술(抜刀術). 혹은 거합도(居合道)라 불리는 그것은 칼집에 수납해 놓은 무기를 빠르게 뽑아 적에게 대응하는 기술로, 실전성이 없다는 풍문과는 다르게 의외로 실전성이 풍부한 기술이었다.
단. 사용하는 곳이 실내라면 말이다.
발도술은 암습에 대처할 때, 혹은 직접 암습을 하는 기습적인 상황에서나 쓸모가 있지 그 외의 경우는 별로 좋은 기술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발도술은 칼집에서 무기를 뽑는다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진작 무기를 뽑아 놓은 쪽이 칼집에서 무기를 뽑는 쪽보다 빠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보통 발도술은 공격할 의지가 없다고 어필하다 기습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쓸모가 없는 기술이었는데.
그것도 전부 게이트가 생기고 각성자가 나타나기 전의 이야기.
마나는 만능.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줬고, 거기엔 전자기력으로 도신을 가속해 초고속 발도술을 펼친다는 망상도 포함돼 있었다.
뇌전을 머금은 배예린의 몸이 청진호에게 쏘아졌다.
지근거리에 도달한 배예린이 도를 강하게 쥐고, 뽑았다.
파지지직!
칼집을 탈출하자마자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사되는 배예린의 도.
청진호의 검이 움직였다.
그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돼 있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청진호는 배예린의 도를 끝까지 주시했다.
‘할 수 있어.’
눈으로 좇아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는 극한으로 활성화한 감각으로 커버할 수 있다.
도에 실린 거력 또한 극한으로 활성화한 감각이면 해결이 가능했다. 모든 힘을 정면에서 받아 낼 필요는 없었다. 살짝 흘리며 빈틈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내 승리다.
시간 축을 비튼 청진호의 검과 극한으로 가속된 배예린의 도가 상대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리고.
“너네 뭐 하니?”
누군가가 맨손으로 청진호와 배예린의 무기를 잡아채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윽!”
갑작스러운 상황에 배예린이 가장 먼저 도를 빼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바위에 굳게 꽂힌 것처럼 꿈쩍도 안 하는 무기를 낑낑대며 당기던 배예린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어깨 위로 든 배예린이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니에요. 잠깐 대련 중이었어요.”
“너네한테 물어본 게 아니란다. 동협아?”
“…죄송합니다.”
자수해서 광명 찾자는 마음으로 바로 머리부터 박는 최동협. 그러나 백한영이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왜 사과를 하고 그래. 상황 설명이나 빠르게 해 줘.”
“그러니까 그게―.”
백한영의 말에 최동협은 여태까지의 일들을 설명했다
신입 길드원들에게 길드를 소개해 준 것, 재능과 관련된 얘기가 나온 것. 그 결과 싸움이 붙은 것까지 전부 들은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안 와서 찾으러 나왔는데, 얘들이 싸우고 있어서 뭔가 했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구나. 바로 이해했다.
최동협이 죄송스러워하는 말투로 백한영에게 말했다.
“제가 애들을 잘 관리했어야 됐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허락 없이 대련을 시켜서 화나신 것 아니었나요?”
“그런 걸로 내가 화를 왜 내.”
백한영이 중간에 끼어든 건 말 그대로 상황 파악이 안 돼서지 딱히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백한영은 배예린와 청진호의 무기를 놓아주며 말했다.
“한창 달아오를 때 끼어들어서 미안하네요. 이제 방해 안 할 테니까 일들 봐요.”
“…계속하라고요?”
“그러면 안 할 생각이었어요? 누가 더 뛰어난 재능인지 궁금하면 결판을 내야죠.”
청진호와 배예린이 어안이 벙벙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예 아무 소리도 안 할 줄은 몰랐던 거다.
근데 백한영의 입장에선 이게 당연했다.
백한영은 검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던 녀석들에게 한 놈이 남을 때까지 싸우라고 말하던 사람이다. 의견 차이로 대련하는 것 정도야. 별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게이트가 열리고 사람의 인식이 달라졌다지만, 무림인과 현대인의 사고방식엔 많은 차이가 있는 거다.
…백한영은 현대인이긴 했지만, 몇십 년을 무림에서 살았으니 사실상 무림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예 판을 깔아 줬음에도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는 두 사람.
한참을 그러고 있던 중 배예린이 먼저 무기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발도술이라는 카드를 보여 줬음에도 아무런 피해를 못 준 시점에서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배예린을 따라 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청진호가 피식 웃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군.”
“지금 내가 고릴라 같은 뇌를 가졌다고 한 거야?”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다.”
“안 되겠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너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판을 내야겠어.”
그렇게 말한 배예린은 성큼성큼 백한영에게 다가갔다.
백한영 앞에 당당히 선 배예린이 빠르게 말했다.
“길드장님.”
“말하세요.”
“저희 둘을 뽑은 이유는 들었어요. 그러면 저희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재능인가요.”
“어…….”
백한영은 잠시 당황했다.
누가 더 뛰어난 재능이냐고?
재능이라는 건 허락된 자의 전유물이었다. 없는 자가 아무리 갈구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재능이었다.
재능은 서로 간의 우열도 명확하다. 아무리 천재라고 칭송받아도 정점이 아닌 이상 그보다 위의 재능은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마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처럼.
그렇기에 백한영은 다른 길이 있을 뿐 틀린 길은 없다, 뭐 이런 듣기 좋은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서 둘 중 누가 더 낫냐고 묻는다면 많이 애매했다.
천재나 재능충 따위의 말이 남용되는 세상이다. 별것도 아닌 걸로 찬양받는 유사 천재들을 백한영은 너무나 많이 봤다.
우열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된 이후에야 가리는 게 의미가 있지, 배예린과 청진호 수준이면…….
솔직히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둘 다 그저 그래서.
그리고 그냥 쓸 만하다고 했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 적은 없는데. 왜 말이 와전된 거지. 이상하다.
백한영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현대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며 백한영에게도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할 정도의 눈치가 생긴 것이다.
“둘 다 똑같아요. 별것 없고,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눈치가 있는 것과 실제로 배려를 해 주는 건 다른 문제였나 보다. 백한영의 돌직구에 배예린와 청진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배예린과 청진호는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재능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며 살아온 둘에게 심드렁해하는 백한영의 말투는 반발심을 일으켰다.
백한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은 좋네.’
원래 무인에겐 자신감이 중요했다. 저러다 앞뒤 못 가리고 고수에게 달려들어 목이 달아나긴 하는데, 안 그러게 잘 지도하면 되니까.
지금은 저걸 동력으로 삼아서 훈련을 하면 됐다.
‘훈련은 길드에 익숙해지면 시키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다.’
짝. 백한영이 손뼉을 쳐 시선을 집중시킨 후 말했다.
“제 말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아뇨. 괜히 예의 차리실 필요는 없어요. 가식은 성장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요. 솔직하게 말하죠.”
“애초에 저희가 뛰어나니까 뽑으신 것 아닌가요?”
백한영의 말에 배예린이 냉큼 대답했다. 청진호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을 보니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느낌이었다.
둘의 도전적인 눈빛에 백한영이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손맛이 아주 제대로였다. 이게 얼마 만의 활어냐. 아주 펄떡펄떡 뛰네.
“아주 좋아요, 그런 자신감. 끝까지 유지해 주시기 바라요.”
백한영이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최동협이 냉큼 달려왔다.
“교관님, 무슨 일로?”
“던전 하나 준비해.”
“어떤 걸로요?”
“당연히 너네가 했던 거랑 비슷한 거지 뭐겠어.”
둘의 대화에 배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던전? 준비? 그게 뭐지?
그리고 왜 최동협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거지?
대체 왜?
그런 배예린의 시선을 뒤로한 채 최동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얘들아.
근데 이거 해도 죽지는 않더라.
그러니 안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