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게 정말이니 (1)
파라솔 아레에 누운 백한영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사람들의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한여름 휴양지다운 소란스러움이었다.
“얘들아, 괜찮아?”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기엔 아직도 표정이 안 좋은데?”
김태식과 최동협이 대화하는 걸 유심히 바라보던 백한영은 앞으로의 훈련 계획을 살짝 수정했다.
벌써 괜찮아진 걸 보면 조금 더 빡세게 해도 될 것 같았다.
“힉.”
“왜 그래, 동협아.”
“아뇨. 갑자기 몸에 오한이.”
“이 더위에 오한이라고?”
앞으로의 미래를 극야권의 계승자답게 직감적으로 알아낸 최동협이 몸을 떨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백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닷가를 한눈에 담았다.
‘좋네.’
이게 쉬는 거지, 집에서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느긋한 풍경을 즐기고 싶어서 중원에서 귀환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바닷가와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고향에서 즐기는 휴양은 외지에서 즐기는 휴양과 맛이 달랐다.
게다가.
“언니, 우리 뭐 마실까?”
“응.”
이곳엔 중원에 없던 동생이 있었다.
백은하와 한유림이 웃으며 근처의 노상 가게로 향하는 걸 확인한 백한영은 그대로 의자에 누웠다.
한 시간 정도 쉬다가 아까 수급한 잡일용 노예랑 바비큐 파티 준비나 조금씩 해 놓자. 그렇게 생각한 백한영이 칵테일을 한 입 쪽 빨자.
“둘이서 왔어?”
백은하와 한유림에게 누군가 접근했다. 건장한 남자 둘이었다.
“아뇨. 일행 있어요.”
“일행? 안 보이는데? 우리 이상한 사람 아니야. 거짓말 안 해도 돼. 그냥 같이 놀자고 말 건 거야.”
“같이 놀긴 뭘 같이 놀아.”
보법을 밟으며 남자의 뒤에 나타난 백한영이 사납게 으르렁댔다.
헌팅남이 살짝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 일행이신가요?”
“얘 오빠야.”
“…죄송합니다.”
빠르게 줄행랑을 치는 헌팅남. 정말 예쁜 여자랑 놀고 싶었던 것뿐인,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었던… 건 아니고. 그만큼 백한영의 기세가 무서웠다.
백은하가 백한영의 팔을 흔들며 속삭였다.
“오빠! 사람을 겁주면 어떻게 해!”
“동생한테 수작 부리는 녀석을 가만히 놔둘 순 없잖아”
“좋게 타이를 수도 있었잖아”
괜히 싸움이 붙었다간 오빠만 손해니 걱정돼 말한 것이었지만, 이 부분에서 백한영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게 누가 남의 동생한테 수작 부리래. 혼날라고.
“안 되겠다. 너 이제부터 어디 갈 때 태식이 데리고 다녀라.”
“오빠 또 오버한다.”
“태식……!”
백한영이 김태식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김태식과 소냐가 최동협과 신유나와 함께 신나게 놀고 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저러고 있는데 불러오긴 좀. 그렇다고 잡일 노예를 은하에게 붙이기엔 걔도 마음에 안 들고.
음. 이러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나랑 같이 가자. 뭐 사러 가는데.”
“마실 거. 그리고 괜찮다니까 그러네.”
“뭐가 괜찮아. 안 괜찮아.”
백한영과 백은하가 티격태격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한유림이 툭 하고 중얼거렸다.
“사이좋네.”
남동생이 있는 한유림이었기에 남매가 저리 사이가 좋은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잠시 여태까지 남동생과 싸운 횟수를 속으로 세던 한유림이 생각을 그만뒀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종종걸음으로 백한영의 옆에 따라붙은 한유림이 말했다.
“혹시 저 혼자였어도 도와주시나요?”
“어…….”
그건 왜 묻지.
일단 물어봤으니 시뮬레이션을 굴려 봤다. 방금 백은하가 없고 한유림만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도와주긴 하는데 작게 한숨을 쉬고 느릿느릿 걸어가서 도와줬을 것 같긴 했다.
근데 그것도 도와주는 건 맞잖아.
백한영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그건 왜요?”
“그냥요.”
헤헤 웃으며 팔짱을 끼려는 한유림을 슬쩍 밀어내며 백한영이 백은하를 바라봤다.
얘 좀 떼어 달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런 오빠를 빤히 보던 백은하가 백한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나 먼저 가 볼 테니까 잘해 봐.”
“대체 뭘 잘하라는 거니, 은하야.”
* * *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졌다. 특상급의 고기라 그런가, 냄새부터 달랐다.
적당히 고기를 그릇에 덜어 낸 백한영이 바큐장 구석에 가 앉았다.
고기를 한 점 먹은 백한영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씨 좋네.
이렇게 가족과 느긋하게 쉬어 본 게 얼마 만일까. 물론 백은하와 놀이공원을 갔긴 했지만, 그때는 SS급 던전 게이트를 공략하러 간 김태식을 감시했기에 온전히 쉬었다고 하기 힘들었다.
진정한 의미로 아무 걱정 없이 가족과 함께 푹 쉬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태식, 여기.’”
“어? 어.”
이제 간단한 러시아어 회화까지는 할 줄 아는 김태식이 소냐가 내민 고기를 냉큼 받아먹었다.
“‘맛있어?’”
“‘맛있어.’”
김태식의 말에 소냐가 환하게 웃었다. 그걸 조용히 보고 있던 백한영이 고기와 같이 가져온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 보이는 저건 만약 백한영이 갈림길에서 운명에 순응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면 보지 못할 풍경이었다.
원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물을 보고 나니 더욱 후회가 안 되는 백한영이었다.
‘예전처럼만 안 하면 되는 것 아니야.’
전처럼 세상 전체를 감시하며 악인에게 철퇴를 내리는 건 명백히 과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선 안에서의 문제들을 내키는 대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라면 별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설사 문제가 생겨도 다시 잘하면 되지.
지레 겁먹고 쫄아 있는 거, 애초에 나한테 안 어울렸다.
‘근데 겁먹을 만하긴 했어.’
백한영은 완벽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게 흠이 없는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백한영은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에 익숙했지만, 그때 백한영이 본 중원의 풍경은 여태까지의 실수랑은 느낌이 달랐다.
백한영이 신의 힘을 갖기 전엔 실수를 해도 어디까지나 혼자의, 개인의 영역이었다. 기껏해야 주변 정도가 말려드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나 검신의 자리에 오른 후의 실수는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세상 전체가 말려들다니. 아무리 백한영이라고 해도 다시는 실수하기 싫다며 모든 행동을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한영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예전 생각을 하니 떠오르는 게 참 많았다.
스승, 첫 살인, 첫 다툼, 첫 동료.
그리고.
처음으로 만난 대적자.
세상엔 운명이 흐름이 있다. 그건 신조차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백한영 정도의 실력자는 그 흐름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지금의, 검신의 실력을 갖추기 전에도 백한영은 운명의 흐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건 바야흐로 혈교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당시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었던 무림맹주는 혈교주와 사투를 벌였고, 끝내 승리했다.
그 모든 걸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지켜보던 백한영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초상승 고수의 생사결(生死決)을 직관하며 여태까지 쌓아 온 경험이 폭발한 것이다.
그렇게 정사마가 통합된 중원 무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백한영이 상승의 경지로 가는 단서를 잡아냈을 때.
녀석들은 느닷없이 등장했다.
“예상보다 쉽게 끝났네?”
혈교주의 심장을 뜯어내며 나타난 놈들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말투, 행동, 생김새 전부가 이상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바로 기운. 녀석들이 품고 있던 기운은 백한영이 여태껏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우리가 누구냐고?”
무림맹주의 질문에 녀석들은 한차례 웃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신교(魔神敎).”
그것이 백한영의 운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적자라는 개념이 있다. 심플하게 말하자면 한 존재에게는 마치 저울의 반대편에 놓인 듯, 거울을 보듯 정반대편에 운명이 점지해 준 상대가 있다는 개념이다.
물론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뿐이지 꼭 대적자와 싸워 결판을 내야 되는 건 아니다. 대적자에게 죽는 사람보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죽는 무림인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적자는 분명 실존하는 개념이고, 그것은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뚜렷하게 나타났다.
흑사련주의 대적자 무림맹주.
혈교주의 대적자 천마.
이런 식으로 강한 힘을 가질수록 대적자와 운명적으로 얽힐 일도 많아지는 게 특징이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돼 버린 검신(劍神) 백한영의 대적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답은 마신교가 가지고 있었다.
마신교의 대답을 듣고 그들의 기운을 느낀 직후.
백한영은 거대한 힘을 느꼈다.
칭호에 신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던 무림인들을 죄다 가짜로 만드는, 진정한 신의 힘을.
마신 리바인드.
사건의 뒤편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힘을 느낀 순간 백한영은 깨달았다.
저 녀석이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다행히 내가 이기긴 했지만, 진짜 위험했지.’
대적자는 보통 동등한 실력자인 경우가 많았다.
서로가 서로를 껄끄러워하고,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구도가 많았었는데.
백한영과 마신 리바인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이야 백한영이 완벽히 우위지만, 당시의 마신 리바인드와 백한영의 차이는 쉽게 말해 인간과 신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격차가 둘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백한영이 마신 리바인드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은 하나였다.
반드시 신의 영역에 닿을 것이라고 보이는, 끝을 모르는 재능. 그것만이 백한영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때문에 백한영과 마신 리바인드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백한영이라는 폭탄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마신 리바인드가 해체하는 것.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태생적으로 신으로 태어난 놈들은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이 많았기에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사용하기 쉽지 않았다.
그의 하수인만 잘 피해서 성장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봤고, 예상대로 승리했다. 비록 그 과정이 지옥같이 힘들긴 했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다.
그 모든 걸 이겨 낸 백한영이 한낱 운명에 겁을 먹는다? 검신의 별호가 울었다. 진짜로.
앞으로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백한영이 과거를 곱씹으며 다시금 각오를 다졌을 때.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메시지가 도착한 거다.
뭐지. 나한테 연락할 만한 사람은 다 여기 있는데. 누가 문자를 보낸 거지.
백한영이 스마트폰을 조작해 메시지를 확인했다.
[홍유진: 선생님, 내일이나 모레쯤 시간이 비는데, 이때 저희 방송에 출연하시면 깔끔할 것 같아요. 괜찮으신가요?]
홍유진의 메시지에 백한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얘가 있었지.
까먹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