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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이 귀환했다-67화 (67/117)

68화 서울 표류기 (2)

독고린은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교주의, 아버지의 부름이 있었다. 잠시 안휘로 가 있으라는 명령에 독고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가 약 8살 때의 일이었다.

당연히 신교의 수행원과 이동할 줄 알았지만 예상 외로 아버지는 사람을, 낭인을 고용했다.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던 낭인과의 첫 만남을 독고린은 아직도 기억했다.

오랜 인연의 시작점이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낭인은 뛰어난 검사였다. 비록 상승 무공을 많이 접하지 못해 덜 다듬어진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날카로운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무(武)의 천재였던 독고린은 그것을 산적을 베는 낭인의 검로를 보며 알아챘다.

저 사람의 재능은 아버지인, 천마(天魔)에게도 닿는다. 당시 독고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웃긴 생각이었다.

천마를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검신(劍神)에게 못 할 말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검신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니 고금제일인은 인간을 위해 남겨 두는 게 어떠냐는 얘기도 돌았지만, 독고린은 그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 낭인은.

백한영은, 신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이었으니까.

슬퍼하고,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올바른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백한영이 떠난 세상에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자리에 오른 자. 천마(天魔) 독고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세상천지의 술법사를 긁어모아 만든 차원 이동진이 설치돼 있었다.

독고린은 반년 전 백한영과 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떠날 거예요? 저를 두고요?”

“나를 따라오면 천마신교는 어떻게 되냐는 둘째 치고, 자. 설명해 줘.”

“천마 님, 차원의 벽이라는 건 인간의 육체로 버틸 수 없습니다.”

“봐 봐. 어쩔 수가 없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따라오는 것도 이상해. 그만 포기해.”

결과적으로 차원 이동이 잘됐는지 안됐는지는 독고린도 몰랐다. 하지만 아마 잘됐을 것이다. 고작 차원 이동을 검신이 극복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백한영이 아니라 독고린이었다.

독고린이 입을 열었다.

“다시 설명해 보거라.”

“천마 님이 차원 이동을 못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육체가 있는 것.”

차원 이동 기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화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서역의 술법사까지 싹 다 잡아 온 백한영 덕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차원의 벽으로부터 육체를 지키는 기술은 완성되지 않았다. 실마리조차 못 잡은 상태였다.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방법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독고린은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차원의 벽을 넘겠다고.

“역시 포기하시는 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요컨대 차원의 벽에서 육체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간단하구나.”

차원의 벽에서 육체를 지켜 내는 방법을 독고린은 끝없이 고민했다.

호신강기(護身罡氣)를 강화하는 무공을 창안도 해 봤고, 아예 차원의 벽을 부수고 나아갈 생각도 해 봤지만, 전부 술법사에게 반려당했다. 현실성이 없다고.

그렇게 아이디어가 끝없이 반려당하던 나날이 이어지던 중, 독고린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한 가지 의견을 냈다.

바로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차원의 벽을 넘는 방법을 말이다.

사실 별 기대는 안 하고 낸 의견이었다. 호신강기도 못 버티는 차원의 벽을 환골탈태로 넘으려 하다니. 그야말로 뭘 모르는 인간이기에 낼 수 있는 의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술법사는 처음으로 독고린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게 된단 말이냐?”

“의외로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고린은 차원의 벽에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이유를 거센 압박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차원의 압박인지 뭔가 때문에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찌그러지는 느낌이라고 상상했었는데, 현실은 그거랑 살짝 다른 모양이었다.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건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어… 지금 머무는 차원을 편의상 1층이라고 하면 차원과 차원 사이에 있는 허수 차원은 비유하자면…….”

“요점만 말해라.”

“허수 차원에서 환골탈태를 시도해 그곳에 적응하면,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만.”

그 말을 끝으로 독고린이 차원을 넘을 방법이 정해졌다.

술법사가 차원 이동진을 조작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가시는 겁니까.”

“이미 정했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다른 방법과 비교해서 그런 거지, 이 방법도 확률이 현저히 낮습니다.”

“가능성이 있기만 하다면 아무래도 좋다.”

독고린이 차원 이동진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두근. 독고린의 심장이 뛰었다.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그녀도 지금 하는 게 미친 짓이라는 걸 잘 알았다.

0에 가까운 확률. 어쩌면 불가능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대로 차원의 격류에 휩쓸려 영원히 이승을 떠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떤 경우도 이대로 백한영을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웅―!

차원 이동진이 발동했다.

검신련 전체에 새겨진 거대한 술법진에 빛이 들어왔다.

직후.

독고린의 몸이 차원의 격류로 빨려 들어갔다.

* * *

대한민국 경기도 외곽 부근.

그곳에 생겨난 차원의 구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하아. 하아.”

독고린이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원 이동 자체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곳이 백한영의 고향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경계해야 됐다.

‘윽.’

매캐한 공기에 독고린이 검지로 코를 막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백 가가의 고향이 이런 곳이라고?’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독고린이 몸을 긴장시킨 그 순간이었다.

“여기다!”

사방에서 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현장을 확인하던 무장한 남자들은 독고린을 발견하곤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뭐야.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 있는데요?”

“차원 에너지 반응은 여기가 맞는데? 정말 저 사람이 끝이야?”

“일단 제가 보기론 그렇습니다.”

부하의 말에 특수 기동대의 대장이 머리를 헝클어트리곤 확성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죄송하지만 신원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언어와 관련된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 왔기에 독고린은 상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장한 집단에 잡히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단 도주하고 상황을 파악한다.’

이곳이 어딘지, 백한영의 고향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기로 한 독고린이 크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천마의 발걸음은 곧 하늘의 발걸음이니.

하늘의 무거움을 아는 자. 무릎을 꿇을지어다.

천마신공,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콩. 독고린의 발이 아스팔트와 만나며 가벼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

콩. 콩. 콩. 독고린이 천마군림보의 묘리로 연달아 아스팔트를 밟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몸에 내공이 없었다.

아니. 아예 백지 상태로 변해 버렸다. 단련된 육신도, 깨끗하게 뚫린 전신 세맥도 전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게 차원을 넘은 대가라는 건가. 이것이 백한영을 만나기 위한 대가라면 얼마든지 줘도 상관없긴 했다.

정말 만날 수만 있다면.

“저 사람, 하는 짓이 이상한데요?”

“기다려. 각성자일 수도 있다. 지금 각성 능력의 조건을 채우는 걸지도 몰라.”

특수 기동대의 대장이 재차 확성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수상한 행동을 즉시 멈춰라!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

제압. 독고린의 머릿속에 안 좋은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신원이 불분명한 타 차원의 이방인. 만약 이런 신분을 들켰다가는 신기한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권력자의 손에 팔려 가 좋지 않은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힘을 가지고 있던 독고린이었다면 코웃음 치며 모든 적을 분쇄했겠지만, 지금의 독고린은 무공이라고는 한 톨도 배우지 않은 일반인. 여러모로 위험했다.

‘저들은 관(官)의 녹봉을 먹는 자들로 보인다. 아마 백성을 지키는 게 저들의 임무겠지. 그렇다면.’

독고린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멀찍이서 이곳을 보고 있는 군중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직 주변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다.

독고린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군중 쪽으로 달려간 그녀의 손이 사람 하나를 낚아챘다.

낚아챈 사람의 뒤로 돌아간 독고린이 손날을 세워 인질의 목을 겨누며 외쳤다.

“날 놓아줘라! 안 그러면 이 사람의 목숨은 없다!”

“제압해!”

* * *

수원 경찰서 안. 그곳에서 독고린이 조용히 조사를 받았다.

“인질은 갑자기 왜 잡으신 겁니까. 흉기가 없었고, 심리적으로 몰릴 만한 상황이었다는 게 인정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미안하군.”

독고린이 녹차를 호로록 마셨다. 질은 별로였지만 간단히 먹기엔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말도 통하시잖아요. 외국인이라 대화가 안 되나 싶었더만.”

“대화가 통하지 않을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면목이 없군.”

“인질로 잡힌 사람이 괜찮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아무튼 여러모로 운이 좋으셨어요.”

독고린은 간단한 신상 정보(이 과정에서 불법체류자라는 게 들켰지만, 신원보증자가 나타나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었다)를 밝히며 모든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하아. 독고린이 한숨을 쉬었다. 사고를 친 느낌이라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

그나저나 여기가 백 가가의 고향이 맞는 건가. 독고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백한영의 설명과 부합하는 곳도 있었고, 아닌 곳도 있었다.

일단 백한영의 고향엔 신기한 능력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까의 전투 때 술법 같은 걸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백한영이 설명을 대충 했든가, 아니면 잘못된 차원으로 왔든가.

후자면 골치가 아파졌다. 중원에서야 술법사를 갈구면 차원 이동진이 나오기라도 했지,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을지 감도 안 잡혔다.

‘…우선 이곳이 어딘지부터 알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기반을 키워야 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여태까지 익혀 온 무공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와 관련된 지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일단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그 후에 방법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독고린이 앞으로의 계획을 대강 정했을 때.

“독고린 씨?”

한 남자가 독고린에게 말을 걸었다.

독고린이 말을 건 남자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까 그 남자인가.”

“그렇습니다.”

독고린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까 그녀가 인질로 잡았던 남자였다.

남자, 유상현을 독고린이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조금 전 자기는 괜찮다고 강력하게 경찰에 주장했었다.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처음 본 사람을 위해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심지어 인질로 잡기까지 했는데.

독고린과 똑바로 마주 본 유상현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해 주세요.”

“미안하다만 내게는 이미 정인이 있다.”

“…그건 곤란한데요.”

그야 곤란하겠지. 정인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이라니. 그것보다 낭패인 일도 없었다.

처음 들어 보는 열렬한 사랑 고백에 독고린은 살짝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독고린의 표정을 본 유상현이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방금 한 말이 어떤 식으로 들린 건지 눈치챈 것이다.

“방금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유상현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독고린에게 내밀었다.

독고린이 명함을 받아 읽어 내렸다.

블링즈 엔터테인먼트.

이게 뭐지.

모르는 단어에 독고린이 중얼거리자 유상현이 대답했다.

“독고린 씨, 저와 함께 아이돌이 되어 주세요.”

“그게 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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