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귀환했다-66화 (66/117)

67화 서울 표류기 (1)

혹한의 바람이 부는 시베리아 한복판.

그곳에 헬기가 착륙했다.

“‘니콜라이 녀석 당한 건가.’”

붉은 머리의 남자가 연구소 잔해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오만의 끝을 달리는 녀석이라 끝이 안 좋을 줄은 알았지만 벌써 당할 줄이야. 손실이 컸다.

“‘이 녀석한테 투자한 게 얼마나 되지?’”

“‘셀 수 없이 많지.’”

붉은 머리 남자의 말에 대답한 건 얼굴에 물방울 문신이 있는 푸른 머리의 남자였다.

니콜라이의 목적과 조직의 목적이 부합하는 곳이 있어 수많은 투자를 했건만, 슬슬 성과를 보려 할 때 공중분해라니. 속이 쓰렸다.

붉은 머리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곤 말했다.

“‘근데 어차피 니콜라이는 객원 멤버 같은 거잖아. 그놈이 우리 사상에 공감이라도 했을까? 난 아니라고 봐.’”

“‘그거랑 상관 없이 손해가 크다. 절대 좋은 상황은 아니다, 루이스.’”

“‘그건 나도 알지. 그냥 불행 중 다행이라고.’”

푸른 머리의 남자, 오스카 워드의 말에 루이스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루이스는 반파된 연구소를 훑어보다가 바로 뒤에 있는 온몸이 검은색으로 통일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보스, 어쩌지? 자료까지 싹 다 빼 간 모양인데?’”

“‘그거야 큰 상관이 없지. 어차피 자료는 주기마다 받고 있었으니까.’”

“‘너한테 안 물었어, 오스카.’”

루이스와 오스카가 투닥대는 와중에 그들의 보스, 아더 페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스? 무슨 일 있어?’”

아더가 부드럽게 손을 들었다.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아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갑작스러운 보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린 루이스와 오스카는 아더를 따라 약간 걷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기막힌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보스, 이건.’”

한겨울에 펼쳐진 신록의 풍경에 루이스와 오스카가 입을 떡 벌렸다.

게이트가 열리며 각성자라는 게 생긴 뒤로 각종 신기한 일이 일어났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아더가 푸른 숲 사이로 들어갔다. 나무를 쓸어내린 아더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의 목적을 이미 이룬 놈이 있는 것 같군.’”

아더를 리더로 두고 있는 조직. 통칭 ‘오버로드’.

그들의 목적은 모든 각성자의 정점. 즉 인류의 정점인 초월자가 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초월자의 흔적을 아더는,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 * *

오키나와의 리조트 섬 바닷가.

그곳에 도착한 무신련의 길드원들이 모래사장으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바다. 바다다.”

“휴식이다.”

거의 좀비와 같은 모양새로 모래를 밟은 최동협과 신유나가 동시에 입을 부여잡고 구석으로 돌진했다.

“쟤네 왜 저래요?”

“저도 모르죠.”

길드 워크숍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이초아의 물음에 백한영이 어깨를 으쓱거리곤 둘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무슨 일이니. 뒤늦은 비행기 멀미니?”

“교관님…….”

최동협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한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내가 모르는 외부의 공격에 당한 건가?

“무슨 일이야. 혹시 저주라도 받은 거야?”

“모래가…….”

“모래가 왜.”

“던전에서 몇 주일 동안 모래사장만 봤더니 이제 모래사장만 봐도 구역질이 나요…….”

“아하.”

백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초아에게 돌아갔다.

이초아가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래요.”

“별것 없습니다. 그냥 PTSD가 올라온 모양입니다.”

“…그거 괜찮은 것 맞아요?”

“강해지기 위해서 희생해야 되는 부분이죠.”

매정한 백한영의 말에 이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부분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하하.”

김태식이 볼을 긁적이며 백한영의 옆에 섰다. 모래사장을 봐도 별 느낌이 들지 않는 자신과 신유나와 최동협을 비교하니 괜히 미안해지는 것이다.

“저만 수련을 거른 것 같아서 그렇네요.”

“바빴잖아. 어쩔 수 없지.”

옷을 꽉 잡아끄는 소냐를 어깨 위로 올리는 김태식을 보며 백한영은 지난 일주일 동안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일단 소냐는 김태식이 맡기로 했다. 시설로 갈 것인가 김태식과 함께 살 것이냐의 선택지에서 소냐가 김태식을 골랐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여러 수속을 밟느라 정신없었던 김태식을 훈련에 끌고 갈 정도로 백한영도 귀신은 아니었다.

“으으…….”

…지금 모래사장을 기어다니고 있는 최동협과 신유나가 들으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랬다.

“한영 씨!”

누군가 손을 흔들며 백한영에게 달려왔다.

이초아와 마찬가지로 외부인이면서 길드 워크숍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한유림이었다.

“날씨 좋네요. 기상청에서 비가 온다고 해서 불안했는데, 기우였나 봐요.”

“그… 유림 씨?”

“네?”

“정말 귀중한 휴가를 이런 데 쓰셔도 괜찮나요?”

근본적으로 백한영이 오키나와에 온 건 길드원 복지 차원이 컸다.

대부분의 일정이 길드원을 케어하는 쪽으로 잡혀 있었기에 외부인이 참가해도 별 재미를 못 볼 가능성이 컸고, 그래서 백한영은 처음에 한유림의 참가를 거절했었다.

“어차피 혼자 있어 봤자 할 것도 없고. 그리고 은하도 있잖아요. 심심할 일은 없죠.”

“그러면 괜찮지만.”

하지만 워크숍엔 백은하도 참가했고, 동생의 친한 언니인 한유림도 자연스럽게 참가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결론이 나 버렸다.

백한영은 상관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휴일을 망치는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괜찮다면야 아무래도 좋았다.

“오빠는 걱정이 너무 많아. 같이 여행은 왔지만 따로따로 논다고 생각하면 편하잖아.”

“그건 내가 싫어.”

은하랑 놀기 위해서 자동 사냥 기계(길드원) 육성을 시작한 건데 기껏 여행을 와서 따로따로 논다?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백한영의 대답에 눈을 깜빡인 백은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한유림으로 타깃을 바꾸었다.

“언니는 선글라스 좀 껴. 해외라고 벗으면 어떻게 해. 언니 인기 몰라? 그리고 아시아권은 오히려 해외가 언니 팬이 더 많을걸.”

“얼굴 가리는 건 싫은데…….”

“이리 와.”

강제로 한유나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우는 백은하를 뒤로한 채 백한영이 모래사장에 발을 들여 놨다.

VIP만 이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비치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원래 휴가는 떠들석하게 즐기는 거지. 조용하게 즐기는 게 아니라.

“태식아, 우선 자리부터 잡자. 파라솔? 그런 것도 하나 대여하고.”

“파라솔? 알았어.”

“그리고 바비큐 해야 되니까 장도 봐 오는 게 좋겠다.”

“그거라면 여기 준비해 놨지. 자. 고베산 와규와 각종 돼지고기야. 소시지도 있어. 독일에서 직접 공수해 온 거라고.”

“오.”

백한영은 남자가 내민 아이스박스를 열어 봤다.

여러 개의 아이스박스가 고기로 꽉 차 있는 게, 아주 제대로 된 바비큐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탁. 아이스박스를 닫고 백한영이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말했다.

“어때? 만족스럽지?”

“누구세요?”

백한영이 드물게 당황했다. 하도 자연스럽게 끼어들길래 순간 이 사람을 초대해 놓고 까먹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누구냐는 물음에 남자, 엔도 이츠키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대답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몰랐나 보군. 엔도 이츠키다.”

“…네?”

“엔도 이츠키다.”

“그것만 들어선 모르겠는데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세요.”

이번엔 엔도 이츠키가 당황했다. 설마 자신을 못 알아볼 거라곤 생각치 못한 것이다.

“일본의 S급 각성자 엔도 이츠키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보지는 않겠지?”

“어… S급 각성자셨어요?”

“우리 월드 게이트 때 만났잖아! 까먹은 거냐!”

“언제요?”

백한영은 억울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 해도 한 번 본 사람을 잊어버릴 정도는 아닌데. 모함이었다.

둘 사이에 이초아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그… 보긴 했어요.”

“봤다고요?”

백한영이 화들짝 놀랐다. 진짜로 안면을 튼 사람이었다니.

그러고 보면 한 번 본 사람도 잘 잊는 것 같기는 해. 근데 그게 뭐.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언제 만났는데요?”

“월드 게이트 때 백한영 씨가 절 구해 주러 오셨잖아요.”

“그랬죠.”

“그때 거기에 저분도 있었어요.”

이초아의 말에 백한영은 당시의 기억을 되새겼다.

피바다. 쓰러지기 직전의 이초아. 그 앞에 있는 사람의 형태를 한 살 덩어리를.

‘엔도 이츠키라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는데?’

백한영이 재차 기억을 되짚었다. 대체 어디에 있었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당시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백한영이 중얼거렸다.

“그때 쓰러져 있던 사람의 얼굴을 내가 어떻게 기억해, 미친놈아.”

“실망이네. 나는 널 기억하고 있는데.”

“그야 댁은 날 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렇죠.”

“세세한 건 제쳐 놓자고. 아무튼 내가 가져온 고기는 어때. 특상품만 챙겨 왔다고.”

확실히 고기의 질이 굉장히 뛰어났다. S급 각성자라 돈이 많은 모양이었다.

“잠깐. 돈이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세요. 거기다 남의 길드 워크숍에는 왜 참가하려는 겁니까. 애초에 우리 그 정도로는 안 친하잖아요.”

“식사 약속을 잡았는데 시간이 안 나서 말이야. 이참에 밥이나 같이 먹으려고.”

“누구랑요?”

백한영의 말에 엔도 이츠키가 이초아를 바라봤다.

백한영도 마찬가지로 이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랑요? 언제요?”

“저번에.”

“어…….”

이초아가 기억을 뒤졌다. 내가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얼른 쾌차하세요.’

‘그래. 근데 혹시 시간이 나면 같이…….’

‘수고하셨습니다.’

비슷한 대화가 오간 기억이 있긴 한데, 이건…….

“그때 거절하지 않았어요?”

“역시 못 들은 게 아니라 거절이었나.”

“당연하죠.”

단호한 이초아의 말에 엔도 이츠키가 턱을 매만졌다. 속이 쓰린 듯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자 손뼉을 치며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이제 됐죠? 고기는 혼자 드세요.”

“그건 좀 그래. 앞의 이유도 컸지만, 정부에서 부탁해서 온 거기도 하거든.”

“…일본 정부는 갑자기 왜요?”

“왜냐니. 너는 S급 각성자가 갑자기 입국했는데 동태를 살펴 달라는 말이 안 오갈 줄 알았어?”

안 오갈 줄 알았다.

이건 백한영의 S급 각성자에 대한 인식이 세간과 달라서 생긴 문제였다.

백한영의 입장에선 S급 각성자라고 해도 별 감흥이 안 들었지만, 다른 사람에겐 S급 각성자는 명백히 인류의 정점이자 국가 최대의 전력이었다. 전략 병기가 말도 없이 갑자기 자기 나라에 입국하면 슬쩍 사람을 붙여 확인하고 싶어지는 게 권력자의 습성인 것이다.

아. 백한영이 하늘을 바라본 후 슬쩍 아이스박스를 내려다봤다.

고기가 참 맛있어 보이긴 했다.

“혹시 거절하면 불이익이 있나요?”

“그렇지는 않지. S급 각성자랑 척지고 싶은 권력자가 어딨어.”

“저번에 정부가 S급 각성자가 포함된 우리나라 조사 팀에 대놓고 수작 부리지 않았나요?”

“그 일 이후로 날아간 대가리가 한둘이 아니야. 당장은 사릴걸?”

“…그러면 정부의 부탁을 거절해도 됐잖아요. S급 각성자라면서요. 굳이 왜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계세요.”

“말했잖아, 앞의 이유도 컸다고. 너랑 얘기를 해 보고 싶기도 했고.”

하아. 작게 한숨을 쉰 백한영은 잠깐 고민하고는 이내 아이스박스를 들어 엔도 이츠키에게 들려 줬다.

“혹시 고기 잘 구우세요?”

“친가가 고깃집을 해서 말이야. 전문가지.”

“우리 애들은 쉬어야 되니까, 잡일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참가해도 좋아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잡일꾼 한 명 고용한다고 치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엔도 이츠키를 워크숍에 합류시키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김태식이 다가와 조심히 말을 걸었다.

“형, 제가 해도 되는데.”

“너도 쉬어야지. 애까지 데려와 놓고 일만 할 거야? 소냐는 누구랑 놀라고.”

“뭐 얼마나 일한다고 그래요. 기껏해야 잡일 몇 개가 끝인데.”

“아무튼 너는 소냐나 신경 써. 심지가 굳은 아이라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아침에 가족을 전부 잃었어. 네가 잘 챙겨 줘야 해.”

“…네, 형.”

백한영의 말에 김태식은 선크림을 발라 주겠다는 백은하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소냐를 흘긋 바라봤다.

마음이 복잡한 듯했다.

‘결국 시간이 약이지.’

백한영은 소냐와 자신의 옛 추억을 겹쳐서 보았다.

지금의 소냐와 똑같이 어린 나이에 가족을 전부 잃고, 거기에 천마의 업까지 짊어졌던 한 소녀의 모습을.

‘독고린. 잘 지냈으면 좋겠네. 이상한 짓 안 하고.’

속으로 소녀의 안녕을 기원한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우선 파라솔부터 대여하죠. 어디로 가야 되나요.”

“친가가 바닷가라 내가 잘 알지. 따라와라. 풀코스로 안내해 주겠다.”

“부산 사람인가.”

* * *

검신이 산을 잘라 만든 부유섬 위에 세워진 검신련 최상층. 그곳에 한 여자와 남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독고린 님, 정말로.”

“이미 정했다.”

술법사의 말에 대답한 독고린은 진 안으로 천천히 몸을 집어넣었다.

차원을 넘어, 사람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0